생명의 근원, 하나님 (2018.02.10. 대학부 동계수련회 셋째날 설교)

     

창세기 50장

15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18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수련회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거의 완전체가 된 것 같아요. 가득가득 차있는 여러분을 보니 기대가 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합니다.


수련회를 준비하면서, 저는 사실 마음속 한켠에 큰 부담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청년들이 함께 와서 기도하는데,

 여러분들이 꼭 하나님을 만나고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이 있고

내가 경험하고 느낀 그 하나님, 나를 사로잡은 그 하나님을 만나고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왜 제 마음에 부담으로 다가왔냐면, 


정직하게 고백할때 그 일이 저에게 달려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건 제 능력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수 있게되고,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신비로운 일이냐면, 모든 의심과 근심, 두려움과 불안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어제 꼭 대답해주고 싶은 질문이 있었는데 대답을 해주지 못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제가 챙겨왔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질문과 의심들이 우리 안에 있는데, 

그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하는 것이 옳은가의 문제인 것 입니다.


보통은 두가지의 방식을 취합니다.

첫째는 질문을 멈추는 것입니다. 의심을 멈추는 것입니다. 그저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순수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맹목적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자기가 믿고 있는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신앙은 매순간 살아서 꿈틀거리는 데, 딱딱하게 굳어버린 신앙을 믿게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바리새인과 같이 됩니다.


둘째는 질문만 하는 경우입니다. 계속해서 질문합니다. 끊임없이 의심합니다.

이러한 신앙은 정직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자신의 물음과 질문을 외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은 결국엔 지쳐버리고 많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그 질문을 하고 물음을 해도 그 답을 스스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것은 복음이 전파되는 방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말씀은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들음을 결단하는 행위에서 시작됩니다.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저의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솔직히 삶의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인생을 복음에 걸었습니다. 공부도 잘했습니다. 나름 재능도 있었습니다. 시험공부를 조금해도 시험을 잘 보는 재능도 있었습니다. 저는 대학시절 많이 놀았습니다. 노는 것이 얼마나 재밌는지도 잘 압니다. 돈이 좋은것도 잘 압니다. 그런데 여행을 통해, 여러 고민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달았습니다. (뜨거운 체험이나 신앙적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목사가 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저의 이야기에 귀를 귀울여주는 것입니다. 저를 신뢰해주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왜 저런 소리를 할까 이야기를 귀울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자신을 걸어보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질문과 의심을 멈출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그 질문들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요청합니다. 들어라. 들어라. 들어라. 그 들음을 통해 전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의심이 많고, 여전히 질문이 많고, 여전히 내 안에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지만, 전 존재를 통해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여러분이 그 만남을 누리고 싶습니까?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전 삶을 통해 응답할 것입니다. (항공권 + 여행지)


수련회 말씀을 통해 여러분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할 때.

여전히 의심이 있고 두려움 있겠지만,

그 길을 찾아 나서는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이번 수련회는 요셉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제 어제,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셉의 삶은 어떠했나요?


요셉의 삶은 기구합니다.


간단히 재 브리핑 해드리겠습니다.


1. 야곱 가족의 상황과 요셉이 받았던 편애

2. 요셉의 노예생활과 보디발의 아내

3. 요셉의 감옥생활과 떡 맡은 관원장, 술맡은 관원장

4. 파라오의 꿈과 총리

5. 형들과의 재회


요셉의 삶을 지탱했던 것들이 몇가지 있습니다.

1. 아버지의 사랑

2. 성실함

3. 지혜


그 모든 것들에게 배신당한 요셉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사실 요셉의 이야기에는 놀라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야기하시는 장면이 안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겐 직접 나타나주셨습니다. 야곱은 함께 씨름을 했습니다. 

모세는 불붙은 떨기나무가 나타났습니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무엇이 있나요? 꿈 밖에 없습니다. 

되려 삶은 점점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저는 창세기 말씀을 통해 흥미로운 지점이 있었습니다.

요셉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어제 전도사님이 참 좋은 해석을 해주셨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그는 아름다운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가 일하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일들이 일어나 형통하게 되었다고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상황이 의아했습니다. 

아니 형통하려면 노예가 되지 말아야지, 감옥에 가지 말아야지, 얼른 꺼내줘야지 하나님은 곳곳에서 요셉에게 침묵하고 계셨습니다.


그때에 요셉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있음을 신뢰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와 같습니다.


저는 요셉의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 청년들이 생각났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보여야 하나님을 믿지요,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져야 하나님을 따르지요,

하나님이 느껴지지도 않고, 하나님을 믿을 수도 없는 데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 솔직히 내가 보는 눈이 많아서 열심히 하고 있지만,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을 아직 잘 알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내가 이렇게 열심히 봉사 사역을 했는데

나에게 해준 게 무엇인가요?

취업이 딱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좋은 대학을 보내주시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멋진 애인을 주시는 것도 아니고


더 솔직히 말하면

내 가정의 문제, 상황의 문제, 여건의 문제 하나도 해결되는 게 없습니다.

열심히 기도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어떻게 믿습니까?

전도사님 목사님 앞에서 목소리 크게 지르면서 음악 크게 틀고 기도하는데

그거 솔직히 우리 감정 동요시키려고 그런거 아닙니까?

우리 과거 솔직히 고백하라고 하는데, 

그거 옛날 캠프에서 엄마아빠 생각하게 해서 울리는 거랑 뭐가 다릅니까?

하나님 어디있습니까? 


저는 이러한 고백이 정말 솔직하게 우리가 하고 있는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질문들이 제 안에서 공명될때

저는 진정으로 무기력함을 느꼈고, 

하나님을 설명할 방법을 못 찾았으며,


그래서 그저, 요셉처럼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절망의 계단으로 한칸씩 내려갈 때

어둠으로 들어갈때, 

가장 불신으로 던져질때,

그 어둠과 불신의 자리에서 동시에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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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사는게 사는게 아니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여러분 사는 게 사는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어떻게 하면 사는 것이 사는 것이 됩니까?


삶에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삶의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삶에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본 기억이 있으신가요?

갑자기 인생이 흑백에서 칼라로 바뀝니다.


그런데, 우리 삶은 늘 의미, 가치, 사랑 이런것들로 부터 소외당했습니다.


1. 해야하는 것이 늘 우리 앞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는 것들을 어떻게든 느끼고자 우리는 다양한 것들을 나름대로 추구해왔습니다. 


그 한계들을 명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진짜 삶을 만나는 것입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어서 위대한 사람인가요, 아닙니다.

요셉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삶을 그 하나님의 신뢰 위에서 해석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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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생명의 삶을 살길 소망합니다.



사랑, 양날의 칼 (2018.02.09. 대학부 동계수련회 첫날 설교)


창세기 37장


요셉과 형제들


1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2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4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6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7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8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10    그가 그의 꿈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하매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네가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11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다


12    그의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 떼를 칠 때에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14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 

15    어떤 사람이 그를 만난즉 그가 들에서 방황하는지라 그 사람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네가 무엇을 찾느냐 

16    그가 이르되 내가 내 형들을 찾으오니 청하건대 그들이 양치는 곳을 내게 가르쳐 주소서 

17    그 사람이 이르되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 하니라 요셉이 그의 형들의 뒤를 따라 가서 도단에서 그들을 만나니라 

18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19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20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21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22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 함이었더라 

23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24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25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낙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26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27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28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29    르우벤이 돌아와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찢고 

30    아우들에게로 되돌아와서 이르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 

31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32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33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 

34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35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36    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

주제 : 우리의 현실은 왜곡된 사랑으로 빚어진 경우가 많다.

      그 가운데 우리의 상처와 연약함, 우리의 죄와 악이 있다.

      이제, 모든 것들을 주께로 가져오자.

      주의 사랑 안에서 진정한 회복을 경험하자 -> 하나님께 집중하자.


서론 1: 수련회의 의미

여러분은 이번 수련회에 무엇을 기대하고 오셨습니까?


수련회라 한다면 응당 경험되어지는 것들이 있지요.

1. 뜨거운 기도회의 시간

2. 함께 하는 즐거운 공동체 시간

3. 맛있는 식사와 자연에서의 회복

4. 좋아했던 그녀, 그와의 우연한 만남


목사님은 이 모든 것들이 여러분에게 간절히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다만 이 모든 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이 시간부터 우리의 주파수를 주님께 맞추셨으면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내가 소통할 수 있을까를 계속 신경 쓰셨으면 좋겠습니다.


밥을 먹을 때에도, 산책을 할 때에도, 조원들과 대화를 나눌 때에도, 함께 공동체 프로그램을 할 때에도, 좋아하는 친구와 우연히 대화를 하게 되었을 때에도, 물론 말씀 들을 때에도, 찬양을 할 때에도, 기도를 할 때에도 계속 하나님을 기억하고, 신경 쓰고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수련회의 핵심 의미는 내 삶의 일부를 시간을 내어 주님과 집중하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여러분의 태도가 조금씩 바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말투와 표정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변 사람들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이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번 수련회를 통해 여러분을 만나시길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만날수록 새로운 분이십니다. 지난 수련회에 하나님을 만났던 경험이 있으십니까? 이번 수련회는 그 하나님 만났던 경험을 되풀이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이제껏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모습들을 놀랍게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혹시 하나님을 한 번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느끼지 못했던 분들이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만나기 위해 준비하고 또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번 수련회를 통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깊이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말씀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서론 2: 이번 수련회의 주제


여러분 올해 대학부 주제가 무엇인가요?

‘올리브’입니다.

올리브에는 어떤 뜻이 있나요? All live, All leave, All love


맞습니다. 올리브에는 생명과 떠남과 사랑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세 단어는 우리의 신앙을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단어들입니다. 한 단어 한 단어 안에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번 수련회를 통해 이 올리브에 대해 깊이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저와 김영광 전도사님이 함께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준비하면서 어떻게 하면 올리브라는 주제를 잘 나눌 수 있을지를 고민했습니다. 함께 준비하던 중, 요셉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요셉의 생애를 통해, 요셉 주변의 인물들을 통해 올리브의 주제들을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원래 우리 대학부의 주제는 생명, 떠남, 사랑 순서로 진행됩니다. 그런데, 이번 수련회는 그 순서를 조금 바꾸어서 진행하고자 합니다. 사랑, 떠남, 생명입니다. 제가 첫날 사랑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고, 둘째날에는 김영광 전도사님께서 떠남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나눌 것입니다. 셋째날은 다시 제가 생명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각 말씀들을 통해 우리가 우리 자신을 깊이 바라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한 시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본론 1 : 요셉의 생애와 왜곡된 사랑


여러분 편애를 경험해보신적이 있으신가요? 편애를 받았다면 사랑을 받는 쪽이었나요? 아니면 사랑을 못받는 쪽이었나요? 


저는 편애를 받아보기도 했고, 편애를 당하기도 했었습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에는 늘 선생님의 편애가 있었습니다. 많은 선생님들이 공부 잘하는 친구들을 좋아했고, 돈 많은 집 아이들을 좋아했습니다. 촌지도 많이 받았고, 선생님의 편견도 심했습니다. 한번은 어떤 여자 친구가 도둑으로 오해를 받았는데, 정말 계속 맞으면서 아니라고 부인한 적이 있었습니다. 솔직히 제 생각으로는 저 정도 부인하면 믿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만약에 그 친구가 진짜 아니었다면 그 친구 마음에 평생 상처가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편애는 어린 친구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줍니다. 사랑을 못 받는 친구 뿐 아니라 사랑받는 친구들 역시 상처를 받습니다. 그 사랑이 왜곡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편애가 가득한 공간 안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은 심각한 갈등을 경험하게 됩니다. 분열과 다툼, 질투와 폭력이 싹트게 됩니다.


오늘 요셉의 이야기는 이렇게 편애와 함께 시작됩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야곱에서 시작됩니다. 야곱의 이야기 역시 편애로부터 시작됩니다. 야곱에겐 형 에서가 있었습니다. 이 둘은 쌍둥이었습니다. 이 둘은 이삭과 리브가의 아들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좀 더 여성적이었고, 에서는 남성적인 모습에 가까웠습니다. 어머니었던 리브가는 야곱을 편애했고,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편애했습니다. 욕심이 많았던 야곱은 이 편애를 이용했습니다.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서 아버지 이삭을 속이는 데 성공했고, 형 대신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형 에서를 크게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야곱은 형을 피해 먼 지역으로 도망칠 수 밖에 없습니다. 야곱은 타향에서 고생을 하며 지냈습니다. 이러한 고생 속에서 야곱은 더욱 자신을 챙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함께 지냈던 사람이 삼촌 라반이었습니다. 삼촌은 야곱을 철저히 이용하였습니다. 야곱은 삼촌의 딸이었던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삼촌은 7년 노동을 댓가로 라헬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삼촌은 야곱을 속이고 레아를 아내로 주었습니다. 결국 야곱은 다시 라헬을 아내로 받아들이기 위해 7년 노동을 더 하기로 약속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야곱은 이후 6년을 더 일하여 총 20여년을 삼촌 밑에서 노예처럼 일했습니다.


이러한 상황과 배경 속에서 야곱은 자신의 아내들을 철저히 구분해서 대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레아와 라헬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특별히 레아는 야곱의 자식들을 많이 낳는 반면, 라헬은 자녀를 낳을 수 없어서 더욱 갈등이 심해졌습니다. 자신을 자신의 세력으로 여겼던 두 여인은 자신의 시녀들마저 동원해서 자녀 많이 낳기 경쟁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레아는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블론, 디나의 어머니가 되었고, 실바는 갓과 아셀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빌하는 단과 납달리의 어머니가 되었고, 라헬은 요셉과 베냐민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치열한 경쟁 구도 안에서 야곱의 총애를 받는 라헬의 자녀는 두 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그중 첫째였던 요셉은 야곱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야곱의 겪었던 삶의 고난, 치열한 경쟁, 두려움과 공포, 배신감과 치욕 그 모든 것이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낸 편애, 그것이 요셉을 향한 야곱의 사랑이었습니다.


요셉이 받았던 것은 그저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너는 특별해야한다는 강요가 담긴 사랑이었습니다. 너는 가장 빛나야 한다는 압력이 있는 사랑이었습니다. 요셉은 끊임없이 아버지로부터 관심을 받았고, 그 관심에 합당한 성과를 드러내야 했습니다.


애니어그램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저는 3번 유형입니다. 전도사님은 지난 주일에 2번 유형이라고 했습니다. 2번 유형을 말씀하시면서 칭찬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착한 아이가 되어야 했다고 했습니다. 3번 유형은 칭찬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성취를 해야하는 아이였습니다. 많은 칭찬들이 오히려 독이 된 것입니다. 칭찬 중독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요셉의 삶의 자리는 어떠했을까요? 어머니가 무려 세 명이나 됩니다. 그중에 자기 어머니는 없습니다. 동생인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나머지 어머니들이 눈치를 주었을까요? 요셉에겐 형들이 10명이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형들 굉장히 무서운 형들이었습니다. 세겜이 동생을 욕보이자 그 마을 전체를 몰살시킨 형들이었습니다. 요셉은 하루하루 가시방석과 같은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요셉에겐 아버지의 인정만이 유일한 생존의 근거요, 자신감의 바탕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가장 사랑하신다는 그 우월감으로 어머니들과 형제들의 눈치를 견뎌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형들을 무시하고 형들을 고자질하면서 자기 존재감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이 행복한 인생이라고 생각이 드시나요? 요셉은 꿈꾸는 사람이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서 발버둥쳤던 사람에 가깝습니다. 요셉은 꿈을 꿉니다.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신에게 인사하는 꿈이었습니다. 보통 건강한 자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러한 꿈을 꿨다하더라도 그 꿈을 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정욕구가 배려보다 앞선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께, 형들에게 자신의 꿈 이야기를 떠벌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존재를 확신했던 것입니다.


결국 요셉은 더욱 더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시간이 지나가면서 요셉이란 존재가 형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건너편에 있는 동네 이름이 무엇인가요? 정동입니다. 이 정동 이름이 왜 정동인지 아시나요? 정릉이 있었던 동네라 정동입니다. 이 정릉은 신덕왕후라는 왕비의 무덤인데,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둘째 부인입니다. 이성계가 이 둘째 부인만을 총애하고, 둘째 부인에게서 난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 하자, 이성계의 첫째 부인의 다섯 번째 아들이었던 이방원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둘째 부인의 아들들을 모조리 죽여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성계의 둘째 부인이자 자신의 계모의 무덤을 파서 지금의 정동으로 옮겨 버리고, 그 무덤을 장식했던 돌은 청계천에 버렸습니다. 


이 사건은 요셉의 사건과 매우 비슷합니다. 형들은 항상 편애를 일삼던 아버지 야곱에 대한 분노, 어머니에 대한 연민을 동생 요셉에게 투사했습니다. 이들은 그 깊은 분노를 참지 못해 요셉을 죽이고자 하였고, 몇몇 온건한 형들이 아니었다면, 요셉은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들여다보면, 야곱, 레아, 빌하, 실바, 라헬, 요셉, 베냐민, 요셉의 형들 모두 비극의 주인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살기위해 애썼고, 사랑받기 위해 애썼지만, 결국 그 끝은 비참한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야곱 가족의 비극은 사실 우리들 모두의 비극, 이 땅에 살아가는 인간이 가진 필연적인 비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비극적 파국 속에서 애절하게 울고 말았습니다. 그는 무지했고, 편애했으며, 절망했습니다.


본론 2: 비극


우리는 모두 사랑을 갈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들에게 온전한 사랑을 줄 수 없습니다. 때때로 왜곡된 사랑을 주기도 하고, 때때로 문제가 많은 사랑을 주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비극이 발생합니다. 


저는 요셉의 이야기를 들으며 오늘 우리의 이야기를 다시 듣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가요? 먼 이야기를 찾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가족들의 이야기들에 한번 귀를 기울어 봅시다. 여러분, 여러분은 가정에서 행복하신가요? 몇몇 가족들은 진정으로 행복한 가족들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정말 많은 가족들, 솔직히 행복하지 않습니다. 하루하루를 버티며 사는 가족이 참 많습니다.


왜 이렇게 다들 힘들게 사는 것일까요? 한사람, 한사람 살펴보면 다 각자의 사정이 있고, 좋은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함께 모여서 어울리다보면 그 안에서 우리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사랑을 주려고 하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 전혀 교감하지 못하는 어려운 상황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부모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안정된 삶을 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안정되지 못한 삶이 참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으로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인생에서 안정을 얻지 못하면 정말 큰일이 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되려 우리 안에 불안함이 더 커지고 맙니다.


부모님은 여러분이 더 앞선 삶을 추구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 경쟁심과 열등감을 증폭시킵니다.


혹은 선생님이나 제가 누군가를 더 사랑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 요셉처럼 다른이의 미움을 동시에 얻게하고, 마음을 비틀어 왜곡 시킵니다.


더 많이 누리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 사랑을 주는 법, 공감하는 법, 감사하는 법을 잃게 만들어줍니다.


최선을 다해 사랑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우리를 되려 무너뜨립니다. 

이솝우화 – 개구리와 생쥐

개구리와 생쥐는 친한 친구입니다.

둘은 날마다 만나서 재미있게 놀지요.

둘은 어느 곳에 가든지 함께 가기로 약속하고 발목을 서로 묶었습니다.

"오늘은 어디로 놀러 갈까?" 생쥐가 물었습니다.

"연못이 좋아. 난 지금 너무 더워서 한바탕 헤엄을 치고 싶어."

"하지만 나는 헤엄을 못 치잖아."

"괜찮아 나 하는 거 보고 배우면 되."

생쥐가 무서워 하는데도 장난 심한 개구리는 연못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개구리는 생쥐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물 속에서 풍덩 풍덩 헤엄을 쳤습니다.

그러는 사이 생쥐는 물을 잔뜩 먹고 그만 죽고 말았어요.

죽은 생쥐가 연못 위를 떠다니는 것을 솔개가 보았습니다.

솔개는 휙 생쥐를 채어 하늘 높이 올라갔습니다.

그 끝에 대롱 대롱 개구리가 달려왔습니다.

그래서 개구리도 함께 솔개의 밥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기에 함께하고자 했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주려했던 개구리는 결국 생쥐와 함께 슬픈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이와 같은 부분이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저는 대학부를 보면서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을 만나면 다 좋은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함께 모여서 일을하고, 함께 공동체를 꾸려가기 시작하면 어려움들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사랑을 원하는데,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은 늘 한계가 있고,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서로에게 전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린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씨앗을 뿌리려고 애쓰지만 어느새 뒤돌아보면 가라지가 잔뜩자라서 망쳐버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그 가운데에서 얼마나 상처를 받는 지 알 수 없습니다.


사랑은 우리의 결핍 속에서 왜곡되게 재생산됩니다. 우리의 상처가 우리의 사랑에 반영됩니다. 결국 우리의 사랑은 깊은 상처만을 남기는 것입니다.


본론 3 : 희망


사랑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땅의 수많은 비극은 사랑을 갈구하나 진정한 사랑이 없기에 비롯됩니다. 우리의 많은 비극들이 결국은 자기 사랑을 추구하다 발생한 비극입니다. 우리는 짝사랑이 얼마나 큰 비극을 가져오는 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는 복음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대학부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


이 사랑은 단순히 감정적 차원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어떤 교리적 차원도 아닙니다. 이 사랑은 우리 삶의 모든 문제와 맞닿아 있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에만 우리는 진정으로 삶의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는 우리의 상처들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 가정에서 

   학교에서 

   교회에서 

   나 자신을 볼 때


우리 안에는 왜곡된 사랑의 상처로 가득합니다. 

불안감, 열등감, 두려움, 분노, 미움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는 우리의 죄악들을 회개할 수 있습니다.

-> 우리의 상처와 아픔들은 우리 내면의 죄성들과 결합해 수많은 죄악을 

질투했기에 미워했고, 두려웠기에 공격했으며, 불안했기에 무시했던 경험들

내가 더 갖고자 빼앗고, 내 욕망을 위해 상대를 이용했으며, 하나님을 거절했던 순간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나온 것은 그분의 놀라운 사랑을 깊이 깨닫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 사랑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한일서 4장 10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로마서 8장 35~37절)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앞에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 그분의 사랑을 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아는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요,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고백이요, 진실로 나를 가장 존귀한 존재로 여긴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느지를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것을 통해 모든 삶의 문제들이 해결되길 원합니다. 여러분이 사랑의 깊은 세계에서 살기를 소망합니다.


그 일을 위해 성령님이 오늘 여러분들을 도우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짐진자들아 나 내게로 오라



<말씀>

마가복음 9장

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4    (없음)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6    (없음)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나눔>

1. 오늘 말씀은 매우 빠르게 전개됩니다. 맥락을 잘 붙잡고 가지 않으면 잘 이해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한 절 한 절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오늘 말씀의 시작은 어느 한 사건을 통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제자 그룹에 속하지 않았던 어떤 한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의 이름에 권세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의 이름을 활용해 귀신을 쫓아낸 것 같습니다.


3. 제자들은 이 소식을 듣고 그 사람이 그 일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습니다. 제자들이 보기에 이 사람은 제자도 아니었고, 예수님으로부터 허락을 받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4.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놀랍게 반응하십니다. 만일 누군가가 내 이름으로 능한일을 행한다면, 그는 우리와 함께 하는 자요, 그는 우리를 위하는 자이니 금지하지 말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5. 오늘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 사역의 놀라운 개방성과 포용성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선택된 사람이 예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어떤 사람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붙잡으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있으며, 예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음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6. 예전 2008년에 인도 여행을 할 때 그곳에서 잡지를 본적이 있었습니다. 테헬카라는 매우 유명한 시사잡지였는데 특집으로 오리샤주의 기독교인 박해에 관한 기사를 내었습니다. 그 안에 기독교인 인터뷰 기사가 있었는데 그 내용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읽었는데 요약하자면 이와 같습니다. ‘가난해서 병에 걸려도 병원에 갈 수 없었는데, 어디선가 소문에 ‘예수’라는 신에게 기도를 하면 병이 낫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도를 한번 해보았고, 놀랍게 병이 낫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 예수라는 신을 믿게 되었고, 그렇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이 지역에 매우 많아지자, 먼 지역에 있던 교회들이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목사를 파송해주어 이 곳에 교회가 생겼습니다. 나는 박해를 죽게 될지도 모르지만, 결코 신앙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글을 보면서 매우 놀라웠고, 충격을 받았고,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에 대해서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7. 예수님의 이름에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구원을 얻고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찌하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붙잡고 그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붙잡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41~50절 말씀은 그러한 예수님의 심정이 담겨져 있습니다.


8. 그리스도께 속한 작은 자를 대접하라. 작은이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놓치지 않도록 애쓰고 배려하라. 예수님의 이름을 붙잡는 것은 우리의 손과 발과 눈보다도 더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놓치는 것은 소금이 맛을 잃는 것과 같다. 예수님의 이름을 붙잡고 사랑의 길로 가라 선포하신 것입니다.


9.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얼마나 예수의 이름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예수 이름의 권세를 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얼마나 다른 이가 예수를 붙잡고 살아가도록 돕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 붙잡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붙잡는 삶이 참된 생명의 삶이요, 사랑의 삶이요, 구원의 삶입니다.


10. https://www.youtube.com/watch?v=6NwlcOdaTBA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씀>

마가복음 9장

30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나눔>

1.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곧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8장에 이어서 다시 한 번 자신이 걸어갈 길이 무엇인지를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 예언은 너무도 충격적이었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무기력하게 돌아가실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 굳게 믿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에 대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모세, 다윗, 엘리야와 같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공통적으로 보여준 능력을 예수님께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놀라운 이적을 보여주었고, 이방 제국, 우상들과 겨루어 승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또한 이러한 일을 보여주시리라 확신했습니다.


3.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수도)으로 올라가시기로 하시자 제자들은 모두 기대에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께서 수차례 이미 가까워졌다고 선포한 하나님 나라, 곧 주님이 통치하시는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우상숭배자들(이방제국)에게 지배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더럽혀졌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참한 억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이 모든 일을 정리하시고 새로운 유대 왕국을 세우시리라 기대했습니다.


4. 이러한 맥락 속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자기가 듣고 있는 것을 듣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주목하는 것을 볼 뿐, 우리의 관심과 집중이 닿지 않는 것은 잘 보지 못합니다. 우리의 세계관과 패러다임은 단순히 우리의 생각일 뿐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통로가 됩니다. 


5. 제자들의 세계관과 관심은 오로지 예수님의 승리에만 집중되어 있었을 뿐 예수님의 죽음은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예수님의 수난고백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했고, 다시 묻는 것도 두려웠으며, 아예 못들은 척하며 자신의 시선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세계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그래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6.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우리 역시 우리 눈에 중요한 것만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과 성공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축복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권세와 능력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힘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안락과 평안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위로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오직 자기가 바라보고 싶은 것만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가진 근원적인 한계입니다. 


7. 나아가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자 다투고 싸우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들이 따르고 섬긴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성공이라는 우상이었고, 이 우상을 가지기 위해 다투기까지 한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은 안중에도 없었을 뿐 아니라 집요하게 자신이 바라보는 것만을 추구했습니다.


8. 우리 역시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실은 예수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은 사실 그것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그 우상을 얻기 위해 이웃의 것을 빼앗고, 질투하고, 불안해하고, 다투는 일을 기꺼이 추구합니다. 


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어린아이는 당대에 가장 천한 사람의 표본이었습니다. 가장 낮은 자를 섬기는 것이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다. 


10. 예수님께서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자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시는 사랑을 깊이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아이를 품는 마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그 사랑으로 가는 길이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도 우리 자신의 우상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기꺼이 우리 곁의 가장 낮은 이웃을 기쁨으로 섬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해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가야 할까요? 이 물음에 진실하게 반응하는 우리 모두 되길 소망합니다.


11. https://www.youtube.com/watch?v=iA54bv_cnbc (예수 따라가며)

<말씀>

마가복음 8장

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12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3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14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15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6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17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20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21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나눔>

1.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을 하시며 놀라운 이적들을 보여주셨습니다. 병든 자들을 고쳐주셨고, 귀신 들린 자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폭풍우를 잠재우셨고, 굶주린 자들을 먹이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2. 그러나 이렇게 놀라운 이적들이 계속해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의심했던 사람들은 예수님께 끊임없이 새로운 기적을 요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끊임없이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에 크게 탄식했습니다.


3. 이들이 끊임없이 예수님께 표적을 요구했던 이유는 이들의 시선이 표적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의 시선은 늘 우리 눈에 보기에 아름답고 위대하고 경이로운 것에 향해 있습니다. 


4. 세계 각지에는 자신들이 믿고 있는 신앙을 표현하기 위해 세운 경이로운 종교 건축물과 종교 유물이 가득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만족을 얻고 종교적인 신비를 체험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시선을 붙잡고, 그 시선에 만족스러운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5. 이러한 인간의 경향성은 오늘 우리 문화에도 가득합니다. ‘아이돌’의 사전적 의미는 우상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아름다운 것, 멋진 것, 화려한 것, 강한 것, 부유한 것들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에도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아름다운 성전, 세상 속에서도 강한 기독교, 성공한 기독교인, 부유하고 명예로운 신앙인의 삶과 같은 미사여구로 우리의 마음을 흔듭니다.


6. 우리는 요청합니다. 예수님, 더욱 위대한 표적을 보여주십시오. 이 세대 속에서 우리를 성공시켜주시고, 우리 교회를 유명하게 해주시고, 우리 기독교의 힘이 강력하게 해주십시오. 우리 가운데 놀라운 신비적 체험을 허락해 주시고, 가장 위대한 지성과 능력이 우리 가운데 드러나게 해주십시오. 


7.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표적이 궁금했을 뿐,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그분의 표적만을 간구했습니다.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관심이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의 능력과 힘에 관심이 있는지.


8.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15절 말씀을 통해 선포하십니다.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누룩은 빵을 부풀게 하지만, 동시에 부패의 상징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의와 명예가 가득한 삶이었습니다. 그것은 크고 아름다워보이지만 실상은 부패한 것이었습니다. 헤롯은 세속 권력과 부가 가득한 삶이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길과는 정반대의 길이었습니다.


9. 제자들은 이 놀라운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급식기적을 다시금 떠올리게 함으로써 제자들을 책망했습니다. 너희들이 무엇으로 살 수 있느냐? 종교적 의냐, 명예냐, 세속 권력과 부냐? 아니다. 너희는 나 곧 예수를 먹을 때 살 수 있다. 그것이 진정으로 너희를 살게 한다. 예수님은 진정한 생명의 길이 자신을 아는 것임을 선포하셨습니다.


10. 마가복음을 크게 두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오늘 말씀은 전반부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그리고 후반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이 나타납니다. 후반부에는 기적도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를 통해 자신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그러한 점에서 의미심장합니다. 우리는 표적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드러났습니다.


11. https://www.youtube.com/watch?v=rCEaPjdIlqI (새로운 마음, 가사를 묵상하며 들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