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처음, 사랑 (2017.01.08. 대학부 집회 설교)


로마서 1장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레위기 19장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올해 우리 대학의 주제는 ‘처음, 사랑’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우리 정성훈 목사님께서 지난주 설교를 통해 자세히 설명해주셨습니다. 오늘은 이 주제에 대한 ‘프리퀄’ 설교입니다. 프리퀄이 뭔지 아시죠? 본편 이전에, 그 본편이 어떤 연유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알려주는 내용을 프리퀄이라고 합니다. 스타워즈 4,5,6편이 본편이라면 1,2,3가 프리퀄에 속한다고 볼 수 있지요. 우리 대학부 주제의 배후에는 사실 우리 교회의 주제가 있습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바로 ‘다시 거룩한 교회로’입니다. 이 주제는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에서 결정된 주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 ‘다시 거룩한 교회로’라는 주제에서 시작하여, ‘처음, 사랑’이라는 주제로 연결되어가는 흐름으로 진행하고자 합니다. 올 한해 우리 모두가 마음을 쓰고 함께 고민하고, 또 실천해야하는 주제라는 점에서 집중해서 말씀을 들어주시길 소망합니다. 더불어 각자의 자리에서 이 주제를 어떻게 실천하고 적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먼저, 왜 올해 ‘다시 거룩한 교회로’라는 주제를 선정했는지를 함께 고민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자고 목표를 주창할 때는, 많은 경우 그 부분이 부족할 때입니다. 우리가 다시 거룩한 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것은, 사실 우리가 거룩한 교회의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내외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 자신을 평가할 때 우리는 거룩한 교회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우리 사회 속에서 우리는 거룩한 교회로서 평가받고 있는가? 냉정하게 살펴보면 우리는 거룩한 교회로서의 모습을 잘 드러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다시금 우리 모두가 거룩한 교회로 돌아가자는 주제로 선정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거룩한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거룩이라고 할 때 더 강력한 ‘종교인’이 되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더 열심히 성경공부하는 것, 더 열심히 교회생활하는 것, 더 열심히 기도하는 것, 더 열심히 전도하는 것 등을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전세계 어느 교회에 견주어도 우리 나라 교회만큼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교회는 흔치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룩한 교회로 스스로를 평가하지도 않고, 그렇게 평가받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러한 열심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부패는 더욱 심각해지고, 우리는 선한 영향력을 전혀 드러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거룩해지지 않고, ‘거룩함’을 흉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해지는 것과 거룩함을 흉내내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깊이 깨닫고, 그 사랑에 반응해서, 다시 사랑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용납하고, 용서해주고, 받아주는 것입니다. 이해하고 품어주는 것입니다. 자기가 먼저 손해보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것이 ‘신앙생활’을 잠시 멈추게 하는 것이라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약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소외된 친구를 더 보살피는 것입니다.


어느 종교나 다 자신들이 주장하는 ‘거룩함’이 있습니다. ‘성스러운 것’이 있지요. ‘성스러운 공간’이 있고, ‘성스러운 시간’이 있습니다. ‘성스러운 사제’들이 있고, ‘성스러운 경전’이 있습니다. 다 각자 그것들을 통해 ‘신적인 것’을 경험합니다. 인도에 가면 ‘성스러운 어머니’라고 부르는 강이 있습니다. 바로 강가라고 부르는 강입니다. 이것을 영어로 갠지스라고 부릅니다. 인도인들은 그 강에서 열심히 목욕을 하면 죄사함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한쪽에서는 그 강에서 죽으면 열반에 이른다고 해서 화장을 하고, 남은 시체를 강에 버립니다. 생사가 공존하는 그곳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티베트에 가면 라싸라는 사원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조캉사원이라는 절이 있습니다. 티베트 불교의 성지이지요. 티베트 불교도들은 그곳을 오체투지라는 절을 하며 뱅글뱅글 돕니다. 심지어 2000킬로가 넘는 길을 절하며 그 사원까지 가기도 합니다. 그것을 통해 더 성스러움으로 나아가길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거룩하여 진다고 고백할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거룩하여질 수 없는 인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 탐욕과 거짓으로 살아가는 인간인 우리들을 위해 죽으신 그 사랑, 그 은혜가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고 선포하는 신앙이 바로 우리가 믿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과 공로로 거룩해지지 못합니다. 우리가 조금 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영적은사를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더 거룩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더 높은 직분에 있다고 해서 더 거룩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거룩해질 수 있는 단 하나의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을 이야기할 때 예수님의 사랑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룩한 존재라 칭함을 받게 되었다면, 그것은 그분의 무한한 사랑과 희생위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거룩한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내가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빚진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용서 받은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곳에서 사랑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낮은 곳을 찾아가는 삶을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땅에 풀어갑니다. 왜곡된 사회 구조가 있다면 사회를 변혁시키는 삶을 살아갑니다. 아픈이들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함께 웃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역사속에는 이렇게 거룩함을 잘 드러낸 이들이 있습니다. 가까운 예로 머나먼 나라에 와서 한평생을 사랑으로 헌신한 언더우드 선교사님이 있습니다. 흑인들의 민권을 위해 묵묵히 길을 걸엇던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있습니다. 한평생 삶을 모조리 헌신해서 사랑을 전한 한경직 목사님, 문익환 목사님, 장기려 박사님, 전태일 등이 있습니다. 이 밖에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비추는 통로가 되어 거룩함을 고백합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자기 희생적 사랑을 통해 진정한 거룩함이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에 매여있을 때 우리는 거룩함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존재’가 됩니다. 


거룩한 교회는 이러한 사랑을 다시금 회복한 교회입니다. 우리 대학부의 주제인 ‘처음, 사랑’은 이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우리의 시작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거룩해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처음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곳에 우리의 근원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사랑의 생명수에 우리의 마음을 적셔야 합니다. 그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적시게 하여 우리는 계속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을 보내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있는 그 자리는 딱 여러분을 위한 자리입니다. 하나님께 우리는 왜 하필 내가 이 자리에 있느냐 질문 하지만, 너라서 너를 믿기에, 내가 그 자리에 너를 보냈다 선포하십니다. 그곳에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서로에게서 예수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사랑과 은혜와 생명이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가 생생히 발견될 것입니다. 이러한 한해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