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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2018.07.27. 주일5부예배설교)


전도서 4장

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여러분의 일상에 어떠한 의미가 되나요?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까?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러분은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나요?

 

성경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곳곳에서 말씀합니다.


야고보서 1장 27절은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새번역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 즉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은 어려운 이들을 돌보고, 자신을 세상의 방식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어떠한 것도 우상으로 삼지 않고, 우상 숭배적 문화에 자신을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미가서 6장 8절은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 앞에서 정의롭게 사는 것, 사람을 사랑하는 것, 우리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코람데오의 삶을 사는 것을 말씀은 우리에게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22장 37~4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세상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무엇도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두지 않고,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뜻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돈보다, 학벌보다, 직장보다, 명예나 권력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 곁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나와 이웃을 구분하지 않고, 서열화하지 않고, 도구화하지 않고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살아가야 하는 삶입니다.


사실 우리가 교회를 오래 다니게 되면 이러한 선포는 여러 번 듣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을 실제로 살아가는 것이 참 어렵기 때문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녹록치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야 할 길과 세상의 방식이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면서도,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이 너무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돈을 중심으로, 힘을 중심으로, 욕망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그러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추구하는 삶은 그 자체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0장 2절에서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라고 선포합니다.


이제 회사에 들어간 제 친구들의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들, 사업을 하는 친구들의 이야기입니다. 대학시절 신앙의 고민들은 술자리에 참여하는 정도였다면, 직장에서의 고민들은 재정 비리의 문제, 룸싸롱 문화와 같은 접대의 문제, 심지어 많은 이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는 사회 윤리의 문제들이 겹겹이 쌓여있었습니다. 옳은 길을 가려다가는 회사에서 모욕을 당하고, 비난을 받고, 심지어 해고되는 일들도 일어나곤 합니다. 정의를 세우고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이 실제로 십자가의 길로 이어지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곤 합니다.


강력한 권력 앞에서 우리 개인의 힘은 너무 무력합니다. 잠시 불의에 눈을 감으면 우리의 생존에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불의에 저항하기에 삶에 다가올 타격이 너무 클 수 있습니다. 결혼을 하고 자녀가 생기면 훨씬 더 선택은 어렵습니다. 때로는 필요에 따라 타협하고 견뎌내야 하는 상황이 오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황들을 염두해서 루터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담대하게 죄를 지어라. 그러나 더욱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신뢰하라.’


네 맘대로 살아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죄악들을 모두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 죄악들만을 헤아리는 것은 결국 율법주의로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그 사랑에 반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은혜에 반응하는 삶이 이러한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대응할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죄악들을 마주치게 되기도 하고, 그 앞에서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절망하게 됩니다. 죄악을 피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기도 하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회사를 다니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러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힘씁니다. 근본적으로 이러한 문제를 이길 수 있는 힘은 결국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 얼마나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가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읽고, 예배에 나오고, 찬양을 드립니다. 기도를 합니다.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 문제를 극복하려고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드리는 성도들 가운데에도 치열하고 분투하고 있는 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과 애씀이 우리를 배신할 때 우리는 더욱 큰 절망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첫째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일정하지만, 우리의 믿음이 일정하지가 않음을 바라보게 됩니다. 늘 신앙이 성장했으면 좋겠는데, 사실을 우리의 신앙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또한 정작 위기 상황이 왔을 때 우리 각자의 신앙이 별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바라볼 때에 절망하게 됩니다. 여러번 이러한 절망을 경험하게 되면 과연 이러한 신앙적 노력들이 의미가 있는가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둘째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실망감이 들 때 이러한 회의에 빠집니다. 고등부 시절 애쓰고 노력해서 교회 사역을 했는데, 교회 어른들이 결국 좋은 대학 다니는 청년들을 더 선호하는 것을 느낄 때, 대학부 청년부 사역을 최선을 다해 사역했는데, 결국 좋은 직장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면 교회에서 설자리가 없다고 느낄 때, 세상이 서로를 판단하는 것처럼, 결국 여기에서도 세속적인 기준과 가치관이 서로를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처럼 보일 때 우리는 절망하게 됩니다.


이 절망과 의심을 극복하지 못하면, 아 결국 신앙은 신앙일 뿐이구나, 세상에선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야 하는구나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내가 만일 낙오하게 된다면 그 누구도 나를 챙겨주지 않는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신앙 생활은 내세를 위한 것일 뿐, 오늘 내 삶에서 궁극적으로 큰 의미가 되는 것은 아니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믿음과 삶이 구분되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의지가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현실 때문입니다. 그저 믿음 생활 만으로 일상의 삶이 잘되는 것이 아니구나, 일상의 삶이 잘 되지 않으면 믿음 생활이 어렵구나, 일상의 삶이 잘되는 것도, 내 신앙을 지키는 것도 모두 어렵구나를 깨닫게 되며 우리는 고민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면, 결국 우리는 어떤 삶을 살게 됩니까? 교회와 세상의 삶이 구분됩니다,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이 구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제가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라는 명제로 축소됩니다. 정의를 구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라 하는 선포가 헌금을 열심히 내고,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고, 예배에 빠지지 말아라 하는 것으로 축소되고 맙니다. 실제로 우리의 학교 생활이나 직장 생활에서는 신앙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도저히 힘을 낼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러한 종교 생활을 통해서 우리는 일주일간 세상을 살면서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일들을 회개하고, 지치고 쓰러진 마음을 위로 받으며, 혹 하나님께서 주실 은혜, 곧 마음의 안정과 평안과 성공을 간구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나아가 죄악된 삶을 살아가는 것들의 죄책감을 이겨내기 위해 더욱 종교 생활에만 매진하게 되기도 하고,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의 축복이라 여기며 자기 합리화를 하기도 합니다. 이제 세상 속에 여전히 존재하는 악의 문제, 고통의 문제에는 도저히 우리의 시선을 돌릴 여유도 없고, 버틸 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그저 여러분 믿는 대로 실천해야 한다고 계속해서 설교자가 강조하면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방향성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일뿐 구체적인 방법론이 아닙니다.


그러한 방향을 추구하기 위해 구체적인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 옆에 있는 여러분의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동지이자 벗이자 가족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우리는 본능적으로 모든 생각을 ‘나 홀로’, ‘개인’이라는 전제를 하고 살아갑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던저진 메시지의 전제가 바로 개인입니다. 어찌되었는 내가 노력해서 입시를 잘 봐야 한다. 어찌되었든 내가 애써서 취업을 해야한다. 어찌되었든 내가 노력해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해야한다. 어찌 되었든 내가 내 애를 잘 키워야 한다. 모든 삶의 책임과 의무가 개인단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을 해내지 못했을때의 열등감, 불안감, 절망감을 고스란히 개인에게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문화는 우리의 신앙에도 그대로 영향을 주었습니다. 네가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네가 신앙생활을 잘해야 하고, 네가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하고, 네가 고난을 홀로 당해야 하고, 네가 그 가운데에서도 신앙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 네 홀로 모든 일을 감당해야 한다. 이러한 메시지가 우리의 마음 속에 계속에서 울려 퍼진다면 천하의 모세, 다윗이나 바울이 와도 우리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삽겹줄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믿음은 각 개인이 지탱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을 책임진다는 고백은 공동체적으로 고백되어야 합니다. 공동체가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챙겨주고 사랑해주며 함께 신앙생활을 이끌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만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그런데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은 이 은혜와 믿음과 사랑이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의 서로 사랑 안에서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임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몸된 교회를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이것은 서로의 삶을 챙겨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과 생활을 구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공동체에서 헌신하고 애쓰고 있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그것을 그 개인의 의무로만 여길것이 아니라 그의 삶과 길을 살펴봐주어야 합니다. 혹 어느 한 사람이 그 자신의 신앙을 지키다 핍박을 당하게 된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그의 삶을 함께 나누며 그가 겪어야 할 고난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어줘야 합니다. 혹 어느 한 사람이 삶을 살다가 예상치 못한 질병이나 사고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그 어려움과 고난이 그의 믿음을 흔들지 못하도록 도움을 주고 붙잡아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서로가 서로를 진실로 가족으로 여길 때에만 가능합니다. 형제, 자매라는 용어는 그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청년때에 형제 자매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습니다. 뭔가 좀 쑥스럽고 낯간지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도사가 되고난 뒤에는 형제, 자매라는 용어가 참 좋았습니다. 뭔가 직분이 없는, 그러나 아직 이름 부르기에 어색하거나, 나이가 비슷한 청년들에게 부르기에 딱 편한 호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제, 자매라는 말은 단지 그런 용도로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진실로 내 앞에 있는 사람을 혈육으로 여기고 함께 하겠다는 고백입니다.


지식인의 제1덕목은 용기입니다. 용기가 있어야 비로소 말을 할 수 있게 되고, 말을 할 수 있게 되어야 생각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용기는 어디에서 나올 수 있을까요? 저는 용기는 공동체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선포합니다. 형제 자매가 많은 집안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진실로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고 지켜주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공동체가 세상 속에 나아가 똑같이 불의에 고난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여 울고 있으며, 아무도 도와주는 이가 없어 소외당하는 이들의 가족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광화문에서 첫 번째 부르심을 받은 교회 공동체로 살아가는 우리는 더욱 그러한 소명을 받았습니다.


우선, 여러분 곁에 있는 형제, 자매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한명, 두명 그렇게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사귀십시오. 그저 교회 생활을 하는데에서 머물지 마시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차를 마시고, 함께 노십시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서로의 신앙을 경청해주십시오. 서로의 삶의 어려움을 들어주십시오. 내가 가진 아픔을 나누십시오. 혹 상처받을까 거절당할까 두렵더라도 용기를 내어 다가가십시오. 손을 내밀고, 손을 잡으십시오. 함께 웃는 시간이 있다면, 또 함께 우는 시간도 있어야 합니다. (어린 시절 친구들 – 정용이 신발, 깊은 대화) 내 곁에 있는 친구에게 진실된 마음을 선물로 주셔야 합니다. 함께 꿈을 꾸시고, 함께 하나님을 이야기하십시오. 혹 나와 다른이가 있다면 그때는 더욱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그와 벗이 된다면 우리는 더 큰 하나님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학벌과 외모와 부유함과 사상과 교회에 얼마나 오래다녔냐와 지역과 인종과 성별과 여타 어떠한 것으로도 상대를 평가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처럼 함께 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진실된 우정이 생긴다면, 우정이 우정으로 연결되어 그물망처럼 우리가 서로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이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를 온땅 가운데 드러내는 빛과 소금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