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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7. 주일예배 설교. 마태복음 27:1~10)

 

마태복음 27

1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3   때에 예수를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   대제사장들이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가격 매겨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삼십을 가지고

10   토기장이의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우리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이 보낸 사람들에게 사로잡히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으로 즉시 대제사장의 집에 끌려가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셨고,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권능을 가진 분이라는 사실을 선포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분노하였고 마구 때렸습니다. 분위기 속에서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이제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공식적으로 처형하기 위해 총독 빌라도에게 넘기기로 하였습니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이었기에, 예수님을 처형하기 위해 당시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 총독의 판결을 얻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그저 종교 재판에 의한 투석 처형을 넘어서 십자가로 처형하고자 하였습니다. 십자가 형으로 처형하면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는 명분을 얻을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로마에 저항한 자라는 명분을 얻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러한 상황을 계속해서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팔았던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폭력을 당하고, 심지어 처형당할 상황이 펼쳐지자 크게 당황하고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상황이 심각해지고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예수님을 넘겨주고 받았던 삼십을 다시 들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돈을 돌려주면서 다시 예수님을 풀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가룟유다는 그들에게 이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내가 죄없는 사람을 배반하여 그의 피를 흘리게 하였습니다. 내가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반응은 싸늘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룟 유다에게 대답하였습니다.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우리가 알바가 아니다. 문제이니 네가 감당하거라.” 그들은 가룟 유다에게 이와 같이 차갑고 매몰차게 대답하였습니다.

 

대답을 들은 가룟 유다는 절망하였습니다. 자신이 감당할 없는 죄를 저질렀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업질러진 물처럼 절대로 되돌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무력감과 죄책감, 그리고 절망감이 그를 완전히 집어 삼켰습니다.가룟 유다는 은을 성전의 성소에 던져 넣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고 말았습니다.

 

가룟 유다가 죽고 뒤에, 대제사장들은 돈을 거두고, 돈을 어떻게 사용할까 의논하였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성전 재정으로 되돌리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돈은 예수님의 목숨값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지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돈을 성전에 귀속시키면, 대가없이 사람의 목숨을 취한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이러한 선택은 그들이 예수님의 목숨을 돈을 주고 샀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습니다. 묘지는 이후에 마태복음이 쓰여지던 시기까지 피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말씀은 모든 일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씀으로 예언한 일이 이루어진 일이라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인간의 악함과 연약함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사람의 악함은 어디에서 올까요? 오늘 말씀은 바로 부분을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셈입니다. 계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셈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이익을 헤아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세는 ) 마음의 중심을 차지하고 마음의 전부를 차지할 우리의 삶은 어그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보다 셈이 중요해지고, 하나님보다 셈이 중요해질 사람은 악하게 되고 죄를 범하게 됩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머리속엔 속셈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무엇이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셈에 따라 행하였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 계속해서 사람을 이용하였습니다.

 

먼저 이들의 속에서 예수님은 자신들의 이익에 방해가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가차없이 처형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들은 처형을 위해 적절한 명분과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이를 위해 가룟 유다를 이용하였습니다. 그를 통해 예수님을 체포하고, 그를 통해 제자마저 배신한 사람이라는 명분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의 효용이 다하자 그를 가차 없이 버렸습니다. 이들은 또한 처형을 대신 처리해주고 훗날의 비난을 감당해줄 사람이 필요하였습니다. 이들은 이를 위해 빌라도 마저 이용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처형의 실질적 책임자가 되어 가장 비판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모든 행동에는 셈이 있었고, 셈을 위해 언제든, 누구든 이용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들은 심지어 예수님을 돈을 가지고 나그네, 부랑자들의 묘지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을 이를 통해 칭송을 얻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살인을 위해 사용한 돈으로 자선사업을 하였고, 자선 사업 마저도 자신들의 명성을 얻는 도구로 활용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가룟 유다 역시 셈을 밝히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 4절부터 6절까지의 말씀은 이러한 가롯 유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4   제자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말씀은 저희가 이전에 함께 나누었던 말씀과 같은 내용의 말씀입니다. 여인이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를 부었을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여인에게 기름을 허비하냐 책망하며, 기름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낫다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씀은 가룟 유다가 돈을 가로챌 속셈이었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이처럼 가룟 유다는 돈에 밝고, 셈에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셈을 선한일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심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날 때에도 셈을 가지고 만났습니다. 가룟 유다는 마음 속에서 예수님을 두고 셈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셈과 예수님의 길이 맞지 않으니, 역시 예수님을 넘기는 것이 낫겠다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룟 유다의 속셈은 대제사장들, 장로들의 속셈과 만나 파국에 이르렀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고 빌라도에게 넘겨진 것을 보고 뒤에야 자신의 계산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일을 저지르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은 돈으로 계산할 없는 것이었습니다. 의로운 , 무죄한 자의 피는 돈으로 계산할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배신한 자가 받게되는 심판은 돈으로 계산할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계산할 없는 것들을 깨닫지 못한채, 잘못된 셈을 하였고, 다른 악한자들의 속셈에 휘말려 모든 것을 청구 받게 것이었습니다. 그는 크게 뉘우쳤지만 일을 되돌릴 방법이 없었습니다. 셈에 밝은 그는 자신이 빚이 얼마나 큰지를 알아챘습니다. 결국 자기가 가진 가장 값진 , 결국 자기 목숨으로 그는 빚을 갚으려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죽음으로도 빚을 갚지 못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셈을 잘하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적인 원수, 사탄과 마귀들 입니다. 영화 타짜를 보면 도박의 고수들이 초보자들을 도박에 빠뜨릴 때에 처음에 져줘서 마치 도박을 잘하는 사람이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렇게 자신감이 충만해진 초보자를 탈탈 털어서 결국엔 모든 것을 가져가버리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것이 마치 악한 원수가 우리에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셈에 누구보다 빠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주고서라도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떨어뜨리는 , 그것이 그들에게 유익이 됨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악한 원수가 우리에게 쓰는 아주 유용한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에게 셈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셨습니다. 그때에 사탄이 와서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그의 유혹의 방식은 철저히 셈을 가르치고자 것이었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보아라. 성전에서 떨어질 때에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 지를 확인해보아라. 나에게 절을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겠다. 너의 생존, 너의 안전, 너의 번영을 헤아려보아라. 그것들을 계산해 보아라. 그것들을 갖는 것이 뜻을 가장 빨리 이루는 길이 되지 않겠냐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셈을 잘하는 것이 네가 진짜 완전해지는 길이라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면, 결국 셈을 가장 잘하는 이에게 이용당하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마치 셈을 잘하는 가룟 유다가 셈을 잘하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이용당하는 것처럼,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셈을 잘하는 사탄 마귀에게 이용당하는 것처럼 이용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셈이 우리를 구원할 것처럼 생각했지만, 셈을 누구보다 잘하는 마귀에게 이용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에는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냐, 네가 스스로 감당하라는 냉담한 목소리만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셈을 생각할 때엔, 셈이 당장 나에게 유익이 되고, 나를 살리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 없는 셈의 길은 우리를 원수의 함정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른 길이 있습니다. 바로, 셈을 넘어서는 사랑을 베풀어 주신 우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사야 55 1절과 8, 9절은 이러한 하나님의 길을 보여줍니다.

 

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먹되 없이,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8   이는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셈을 넘어섭니다. 우리의 생각과 길을 넘어섭니다. 우리의 셈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이것에 바로 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매일 사용한 은혜라는 단어는 바로 선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보답을 기대하며 선물을 주기도 하고, 보답하는 의미로 선물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선물은 말그대로 완전하고 온전한 선물입니다.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내어주시고,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품어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랑하심으로 우리를 불러주시고, 모든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 안에 거하는 사람이 비로소 진정한 생명, 진정한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셈을 넘어서서 사랑하라. 셈을 넘어서서 용서하라. 셈을 넘어서서 품고. 샘을 넘어서서 은혜를 베풀어라.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계명, 새로운 질서, 하나님의 계명과 질서를 우리에게 선포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가르칩니다. 셈을 잘해야 살아남는다. 속에 생명이 있다. 속에 사랑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아니, 셈은 셈으로 당하고, 셈은 악한 원수의 속임수에 넘어가며, 셈은 책임질 없는 문제 앞에서 너를 무너뜨린다. 그러나 샘을 넘는 사랑이 너를 진짜 풍성하게 하고, 셈이 없는 진실된 말씀이 너를 온전히 세우며, 셈을 넘는 은혜가 너를 용서하고 구원으로 인도한다.

 

가룟 유다에겐 마지막 선택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바로 죽기 직전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죽음으로도 갚을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셈을 포기했어야만 했습니다. 주님, 저는 저의 죄를 갚을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저는 오직 주님의 용서가 필요합니다. 만일 그때 그가 셈을 넘어서는 긍휼과 자비와 용서를 바라보았다면, 그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놀라운 긍휼과 자비와 용서, 그리고 사랑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셈을 넘어서는 운혜를 얻었다는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정체성 안에서 우리는 셈을 넘은 용서와 사랑, 은혜를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삶을 위해 셈은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아무 셈도 하지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셈을 하되, 셈을 넘어서는 삶을 사는 , 셈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사는 , 그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야할 길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은혜와 용서를 받아드리고 나누고 사는 우리 모든 성도님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