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의 욕심 (2019.01.09. 수요예배 설교)


사도행전 8장

9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 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10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11    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그들이 따르더니

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13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15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17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9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20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21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22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23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24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 하니라


우리 교회에서 얼마 걸리지 않는 곳에 ‘사직단’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조선시대에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습니다. 지금도 그곳에 가보면 널따란 제단이 있습니다. 농업을 가장 중요한 나라의 근간이라 여겼기 때문에 조선 왕은 이곳에서 매년 정월, 봄, 가을, 그리고 천재지변이 일어났을 때마다 제사를 지냈습니다. 


왕이 이렇게 매년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렸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제사를 통해 왕의 권세와 위엄을 확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농경사회였던 당시, 먹고 사는 문제는 전적으로 농업의 성공에 달려있었습니다. 그리고 농업의 성공은 기후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왕은 좋은 기후를 위해 무엇인가 역할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제사는 백성을 사랑하는 왕의 마음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좋은 통로가 되었습니다.


왕은 토지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에게 제사를 드렸지만, 그가 정작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왕권이요, 그 왕권을 지지해줄 백성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이 모든 제사의 모습을 드린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제사가 비를 내리게 해주거나, 따뜻한 기후를 가져다주는 것은 다음 문제였습니다.


이와 같이 사직단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역사 속에서 종교가 때때로 어떠한 역할을 해왔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종교는 이처럼 신의 이름을 빌어, 신의 권위를 이용해,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권력자의 도구로 사용되어왔습니다. 바벨론 왕은 바벨론의 신 마르둑을 숭배함으로 자기의 권위를 높였습니다. 이집트 파라오는 태양신 라를 숭배함으로 자기의 권위를 높였습니다. 중국의 황제는 자신을 천자, 곧 하늘의 아들이라 칭했고, 로마 황제들은 자기 자신을 살아있는 신으로 높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삼국시대 때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불교를 도입한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신을 숭배했지만, 실은 신의 이름으로 포장된 자기 권력 숭배였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이 이러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시몬은 오랫동안 사람들이 놀라는 마술을 행해왔습니다. 주석에 따르면 아마도 병을 치유하거나 여러 이적이 보여준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은 시몬이 이러한 일들을 오랫동안 보여주자 크게 놀라며 따랐습니다. 성경은 낮은 계층의 사람부터 높은 계층의 사람들까지 다 따랐다고 증언합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그를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까지 칭송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메시아’로 높였습니다. 여기까지를 보면 시몬의 이런 모습은 마치 예수님의 사역했던 모습처럼 보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몬이 예수님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교만함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자칭 큰 자’로 불렀습니다. 그가 마술을 하는 근원적인 동기는 자신을 높이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치 권력자들이 자신을 높이기 위해 신을 숭배하고, 종교를 이용했던 것처럼, 시몬 또한 자기 자신을 큰 자로 높이고 사람들의 칭송을 얻기 위해 마술을 이용했던 것입니다. 그가 행하였던 수많은 이적은 조금도 그 자신을 바꾸지 못했고, 오히려 자기 자신의 죄성을 강화하는데 활용되었을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시몬 앞에 빌립이 나타났습니다. 빌립은 복음을 전하며 표적과 큰 능력을 드러내었습니다. 시몬은 빌립의 이러한 능력을 보고, 그를 동류로 여겼습니다. 그는 빌립을 통해 자신이 한 층 더 강화되길 바란 것 같습니다. 그는 빌립이 전한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고,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녔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의 모습은 누구보다 충성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의 이적과 능력에 놀랐습니다. 


그러던 중 예루살렘에서 사도들, 베드로와 요한을 내려 보냈습니다. 빌립 집사가 사역하던 사마리아에 세례는 받았지만, 성령을 받지 못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것이 곧 성령 받음의 증표인데, 이들은 아직 성령을 받기도 전에 세례를 먼저 받은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이 이들을 위해 안수하자 즉각 이들에게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자신을 구원한 사건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단지 성령 충만의 증표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심령이 근본적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나 시몬은 이 사건 앞에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았습니다. 자기를 높여줄 능력, 사람들이 칭송해줄 기적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이적과 기적, 종교는 자신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사건의 의미를 깨닫고, 그것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저 그 능력만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사도들에게 돈을 내면서 요청하였습니다. “나에게도 그런 권능을 주어 내가 손을 얹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는 사도들 역시 자기와 같은 부류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종교는 의례 그렇고 그런 것이라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종교라는 것이 돈을 위해, 자기를 높이기 위해, 사람들에게 칭찬과 높임을 받기 위해 필요한 것다, 그렇기에 그는 이 능력을 돈을 주면 살 수 있는 것이다 라고 생각했고, 사도들 역시 지금껏 수많은 종교인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똑같이 이 방식에 동의할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전형적인 종교 장사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이에 격하게 비판하였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고 생각하였으니, 당신은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우리의 일에 당신이 차지할 자리도 몫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 악한 생각을 회개하고, 주님께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행여나 그대는 그대 마음 속의 나쁜 생각을 용서받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보니, 당신은 악의가 가득하며, 불의에 얽매여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비판으로 시몬을 비판하였습니다. 시몬은 이와 같은 반응에 오히려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진짜’ 신앙인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비판은 오늘 우리에게 ‘신앙’이 무엇인지를 깊게 생각하게 만듭니다. 가짜 중에 가장 문제가 되는 가짜는 진짜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비슷한 가짜입니다. 시장에서도 나이키의 가짜 제품이 나이스라고 한다면 되려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똑같이 생긴 가짜 제품은 모두를 속인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킵니다. 시몬처럼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고, 전심을 다하여 사역하는 사람, 그러나 그 중심이 하나님이 아닌 자기로 가득찬 사람은 남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마저 속이려는 사람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나 결국 그 끝이 자기를 향하고 있다면, 그것은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악의가 가득하고 불의에 얽매여 있으며 하나님 나라에 차지할 몫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위험함을 알았기에 더욱 강하게 비판하였습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죄를 자기 안으로 굽은 마음이라 하였습니다. 죄인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위해 신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위한 신상을 세우고, 자기를 위한 교리와 율법을 만들며, 자기를 위한 공동체와 교회를 세웁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그 끝은 자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와 정반대의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신의 뜻을 내려놓으셨습니다. 공동체와 교회를 위해, 죄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종교 권력과 정치 체제를 우상으로 높이는 교리와 율법을 비판하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근본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모욕과 굴욕와 상처와 죽음의 십자가의 길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셨습니다. 인류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우상을 세우는 것을 종교로 정의한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철저히 반종교적인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인간의 죄성을 정확히 알았기에 하나님을 자기를 높이기 위해 활용하려는 시도들을 계속해서 강하게 비판합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음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출애굽의 이야기는 자신을 하나님처럼 높이는 애굽 제국의 방식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 백성의 방식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종교적으로 이용하려는 사울의 교만한 행동을 지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 산당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하심으로, 하나님을 자기 방법대로 자기의 욕망을 위해 섬기는 것을 거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특정하게 밝히시지도 않으시고, 당신을 형상화 할 것을 거절하심으로 우리가 우리의 뜻대로 하나님을 정의내리는 것을 비판하셨습니다. 우리의 욕망과 우리의 뜻대로 하나님을 만드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포장된 우리 욕망을 숭배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알지 못하게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선한행위를 통해 자기 자신이 높아지려는 것이 얼마나 교묘한 형태의 우상숭배인지 아셨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골방해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마저도 자기를 높이는 행위가 될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비교하시며 자신의 의로움과 성실한 종교생활을 자랑한 바리새인보다 자신의 죄인됨을 통렬히 고백한 세리를 의롭다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통해 자신을 높이려는 인간의 죄악됨이 얼마나 뿌리깊고, 악한 것인지를 예수님께서는 아셨습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혈루병 걸린 여인, 모욕을 감수하면서 자신의 자녀를 고쳐달라고 한 수로보니게 여인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이들의 간절한 기도와 간구를 예수님을 이용하려는 태도라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들은 진실로 자신의 삶에 예수님이 필요함을 고백함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말씀이 바리새인을 비판하고, 교만한 유대인들을 비판하고, 또 시몬을 비판하는 것을 말씀하시고 싶은 것은 자기의 교만함과 높아짐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교묘한 교만함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숭배하는 모습으로 결국은 자신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의 가르침 앞에 서게 된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근원적인 양심에 찔림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모두 잘못된 종교적 습성, 뿌리깊은 자기 중심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닮으려 한다하더라도, 뒤돌아보면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할때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주님을 위해 헌신하였다 하더라도, 우리가 희생하였다 하더라도, 기도하고 순종하는 길을 갔다 하더라도, 우리의 뒷모습을 뒤돌아보면 여전히 우리의 죄악됨을 발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눈을 가리면, 아무리 반드시 걷겠다 노력하고 애써도 결국 눈을 뜨고 되돌아보면 좌우로 휘청거렸던 우리의 흔적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잘하면 교만의 함정에, 못하면 절망의 함정에 빠지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의 나오는 마술사 시몬을 교회 전통에서는 마구로 시몬이라 불렀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결국 이단 영지주의의 사제가 되었습니다. 스스로 영적인 지혜를 얻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분파였습니다. 교만함의 함정을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훗날 성직매매를 시모니즘이라 부르게 될 만큼 그는 불명예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시몬 마구로와 대비되는 인물, 곧 시몬 베드로는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랐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결국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하였습니다. 그것도 예수님과 같이 매달릴 수 없다하여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 둘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결단과 능력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데 있었습니다. 되돌아보면 베드로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었고, 메시아를 따라서 회복된 왕국의 지도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로비를 벌이던 다른 제자들과 다투었고, 로마에 의해 예수님이 처형당하자 죽을 것이 두려워 도망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훗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성령의 도우심 아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사건임을 깊이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마술사 성령의 능력은 원했지만 성령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던 것과는 대비됩니다. 여기에 우리 답이 있습니다.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사는,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영원함을 소망하나 늘 유한함을 발견합니다. 오늘 하루의 고단함을 이겨내기 힘들고, 다가오는 삶의 불안과 두려움을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진실로 만나지 못한다면, 결국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거짓 하나님을 만드는 방법을 찾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모습을 보이든 그 근원은 결국 우리 자신을 스스로 높이려는 것과 이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섯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미끄러지는 것, 파랑새라고 잡은 순간 그 색이 변해버리는 것 그것이 우리의 운명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나의 행동과 나의 감정과 나의 지식과 나의 업적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닌 여기 우리 앞에 서있는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내가 곧 내 스스로를 높이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로운 신을 세우는 교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나를 사랑하사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시고, 용서하시고, 다시 회복시키셨음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나를 높이기 위해 주님을 찾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자신의 낮아짐을 감수하시며 우리를 만나주시고 사랑해주셨음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이 일이 매일매일 우리의 삶에서 부딪히는 사건이 되어야 하고, 이 사건이 진실로 우리 삶을 사로잡는 현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통해 우리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비로소 선악과를 뱉어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새문안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에겐 참으로 깊은 역사와 좋은 제도, 훌륭한 신앙의 유산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다면, 이 모든 것들은 가장 교묘히 은폐된 우리의 우상이 됩니다. 마술사 시몬처럼 믿고, 세례를 받고, 열심히 따라다녀도, 아무소용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이것들 때문에 망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날카로운 비판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는 말씀은 여전히 우리에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가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주목해야 합니다. 오직 믿음, 오직 말씀, 오직 은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우리를 진실로 살게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주님께 구해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말씀 한구절을 통해 말씀을 마치고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말씀>

마가복음 16장

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11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12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나눔>

1. 부활하신 예수님이 처음으로 자신을 보이신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2. 예수님께서 많은 제자들 중에 왜 마리아에게 자신의 모습을 가장 먼저 보이셨는지 그 이유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미루어 묵상할 수 밖에 없는데, 아마도 부활의 소식이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되는지를 알리려는 주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3. 당대의 여인은 오늘날보다 훨씬 더 낮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더군다나 그녀는 일곱 귀신에 들렸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누구보다 비참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이 여인이 주님을 만나 해방된 삶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참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4. 이러한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매우 깊은 슬픔과 절망의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겨우 회복되었는데 다시금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그리고 죽으신 뒤에도 예수님의 곁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진실로 예수님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5.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부활의 소식이 가장 큰 희망과 기쁨의 소식으로 다가올 사람은 다름 아닌 막달라 마리아였을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가장 사랑했기에 가장 슬퍼했고, 예수님을 온전한 소망으로 두었기에 가장 절망한 여인이었습니다. 이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의 첫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6. 부활은 십자가를 뚫고 드러난 사건입니다. 절망을 이겨낸 소망이요, 증오를 이겨낸 사랑이요, 비참을 이겨낸 영광이요, 죽음을 이겨낸 생명의 사건입니다. 부활은 절망과 희생과 낮아짐과 죽음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궁극적으로 소망과 영광과 영생과 사랑을 선포하는 사건입니다. 


7. 그렇기에 자신의 비참함을 깊이 인식한 사람, 이 세상의 고통을 깊이 공감하는 사람에게 부활의 의미는 더욱 깊이 다가오게 됩니다. 오늘이 첫 만남은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부활의 신비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8.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마리아는 이제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아마도 마리아가 예수님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부활은 그들에게 생각의 범주 밖의 일이었습니다. 죽음은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 이기지 못한 절망이기 때문입니다.


9. 그러나 부활 사건은 세상에 속한 사건이 아닙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믿음의 범주 밖의 일입니다. 사람들은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당연함을 부수고,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마리아의 증언을 믿지 못하였으나 곧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은 사도가 되었습니다.


10. 세상은 여전히 깊은 어둠에 있고, 우리의 삶의 고통과 아픔들은 너무도 큽니다. 그리하여 소망과 기쁨을 이야기하는 것은 순진한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절망은 너무 뚜렷이 보이고 희망은 너무 멀리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의 이 땅을 뚫고 들어오신 놀랍고도 신비한 사건입니다. 부활 신앙은 이 사건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현실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금요일입니다. 오늘부터 주일까지, 십자가와 부활을 깊이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이 시간들을 통해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11. https://www.youtube.com/watch?v=QQlOdBW7EVA (예수 하나님의 공의)

<말씀>

마가복음 16장

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나눔>

1. 예수님이 죽은 뒤 사흘이 지났습니다. 예수님은 금요일에 돌아가셨고, 안식일은 토요일이었으며, 예수님은 일요일, 곧 주일에 부활하셨습니다.


2. 오늘 말씀은 그 부활의 첫 상황을 보여줍니다. 주일 매우 일찍 동틀 무렵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가 예수님의 시체에 바를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갔습니다. 그 무덤은 돌로 막은 동굴의 모습이었습니다.


3. 그런데 마땅히 닫혀 있어야 할 돌 문이 굴려져 있었고, 무덤은 열려 있었습니다. 말씀에 따르면 그 돌은 매우 큰돌이라 표현되어 있는데, 아마도 한 두 사람의 힘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4. 세 여인이 무덤 동굴 안에 들어가자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무덤 안에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천사였습니다. 천사는 이들에게 말했습니다. “놀라지 말아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찾는구나, 그러나 그는 살아나셨고, 이미 여기 계시지 않다.” 예수님의 시체가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있지 않았습니다. 


5. 천사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전에 살아계셨을 때 말씀하셨던 것처럼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로 먼저 가셨으니, 너희가 갈릴리에 가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가서 베드로와 모든 제자에게 이 소식을 전하라” 


6. 천사들을 만난 여자들은 매우 크게 놀랐습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떨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여자들은 무덤에서 도망쳤고, 너무 무서워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7.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생각과 상상 범주 밖의 일입니다. 합리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여자들도 그랬습니다. 당시까지 죽음을 넘어서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고, 부활을 목격한 사람 역시 단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다른 성경 인물들이 다시 살아난 사건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같은 육체로 회복된 그들은 다시 죽었지만, 예수님은 영원한 몸으로 부활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신적인 사건,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온전히 임한 사건이었습니다.


8. 이 사건을 처음 경험한 여인들의 반응은 하나님을 마주한 이들의 반응을 보여줍니다.  (모세와 이사야와 같이) 이들의 반응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 앞에서 놀라운 경외감과 두려움을 느꼈던 이들의 반응과 매우 흡사합니다. 이 여자들이 이 부활의 충격을 이겨내고, 그 깊은 의미를 깨닫기 위해선 성령님의 임재와 깊은 신앙적 깨달음이 필요했습니다. 이후 제자들, 바울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9. 그리스도교에서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화적 이야기나 종교적 설화가 아닙니다. 부활은 초대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사도들이 온 존재를 부딪치며 경험한 매우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부활 앞에서 온 존재가 흔들리는 경이로움과 경외로움을 경험했고, 그 부활을 깊게 이해한 후에는 부활을 증언하기 위해 온 생명을 걸었습니다.


10.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부활의 증언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사도들과 첫 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부활의 증언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그 놀라운 사건을 지금 이곳에서 동일하게 우리 가운데 드러내십니다. 우리 모두는 이를 갈망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성령 안에서 우리 안에 온전히 믿음으로 다가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번 고난 주간과 부활 사건을 통해 그 놀라운 은혜를 누리게 되길 소망합니다.


11. https://www.youtube.com/watch?v=6Dl5lXZfSUY (주님의 임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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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사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혹은 공동체가 즐거워서, 혹은 수련회 때 받은 감동으로, 혹은 내 삶에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어떠한 방식으로 교회를 다녔든 오늘 우리가 다같이 새문안 교회 대학부 공동체에 함께 하게 된 것,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게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저의 꿈을 넘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꿈,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의 꿈, 오늘도 여러분을 도우시는 성령님의 꿈이라 생각합니다. 그 꿈은 여러분이 진실로 여러분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를 알고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실로 삶의 기쁨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실로 사랑 안에서 사랑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실로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3.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꿈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담겨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저 보면 예수님의 죽음과 내 삶은 전혀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그저 고통스러운 사건에 불과하고, 우리에게 또 하나님 짐을 얹어주는 사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한끼 금식한다고, 우리가 미디어를 참는다고, 우리가 고난주간 예배를 드린다고 우리의 삶이 무엇이 달라질까, 우리의 생각이 무엇이 달라질까 느껴지기도 합니다.


4.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의 고난을 그저 고통과 고난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 고통과 고난에 담겨있는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주목합니다. 그 사랑을 곱씹고 곱씹는 시간이 바로 고난주간입니다. 그 사랑 앞에서 우리의 삶 전체를 새롭게 해석합니다. 우리가 무엇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를 진실로 살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생각하고 되돌아보는 시간이 고난주간입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아침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그것을 위해 금요일 저녁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그것을 위해 금식과 절제를 합니다.


5. 세상이 너무 바쁘게 돌아갑니다. 도저히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의 삶에 대해, 우리의 죽음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가장 깊은 곳, 가장 중심이 되는 것, 가장 바탕이 되는 자리는 바로 이 성찰의 자리입니다. 사랑하는 대학부 여러분 이 자리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저 ‘교회생활인’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보내기엔 여러분의 젊음과 우리의 생이 너무 아깝습니다. 이 귀한 시간, 진실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말씀>

마가복음 15장

40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41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 또 이 외에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더라

42    이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44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가 오래냐 묻고 

45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주는지라 

46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47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나눔>

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있었을 때 끝까지 예수님 곁에 있던 이들은 여자들이었습니다. 많은 제자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뿔뿔히 흩어졌을 때, 많은 대중들이 실망하여 사라졌을 때 여인들은 끝까지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2. 성경은 이들이 막달라 마리아,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이었다고 증언합니다.


3. 모든 것이 좋고, 도움이 될 때 곁에 있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누가 봐도 실패한 순간, 아무런 희망이 남지 않은 실망스러운 순간, 심지어 함께 있는 것이 자신에게 손해가 되고 위험이 되는 순간까지 곁을 지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4. 그러나 이 여인들은 끝까지 예수님의 곁을 지켰습니다. 이로써 이들은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5.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순간, 절망이 어둠처럼 모든 땅에 내리는 순간, 모든 기쁨과 기대가 사라지는 순간, 역설적으로 그 순간에 이 여자들의 사랑이 빛이 되어 별처럼 반짝이고 있습니다. 


6. 이를 통해, 오늘 말씀은 놀라운 역설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삶에 고난이 닥칠 때, 아무런 도움이 느껴지지 않을 때, 우리 삶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사랑이 드러납니다. 조건 없는 사랑, 그저 함께 하는 사랑, 진실로 하는 사랑이 영롱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7. 오늘 말씀에는 이처럼 빛나는 사랑이 또 한사람 등장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반역자들이 당한 처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두둔하거나 감싸는 것, 챙기는 것은 모두 반역으로 취급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보통 십자가형을 당한 사람의 시체는 십자가 뒤에 버려져서 들짐승과 새들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8.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은 ‘당돌히’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했습니다. 그는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신실한 신앙이었습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했고, 예를 표하여 자기 무덤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는 모두가 예수님을 비방하고 떠나갔을 때 진실한 사랑과 용기있는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9. 아리마대 요셉과 여인들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특별히 자기 유익과 자기 감정에 기반한 사랑, 상황과 여건을 고려한 사랑, 조건을 두고 주는 사랑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우리에게 이들은 숭고하고 진실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마저 우리 자신을 위해 사랑하는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이들은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용기를 내어, 끝까지, 신실하게, 진실하게 사랑했습니다. 이들은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우리에겐 오늘 이들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10. https://www.youtube.com/watch?v=vHLleZitN5I (주님만 더)

<말씀>

마가복음 15장

25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26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8    (없음) 

2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30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3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33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36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나눔>

1. 오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순간을 담은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2. 예수님의 죄명은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과연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일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참된 왕이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죄목으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왕이 되고 싶었고, 진정한 왕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 사람들은 오만하고 잔인했습니다. 예수님이 보잘 것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하자 짓밟기 시작했습니다. 이적을 베풀고, 권위 있게 말씀을 전하고, 많은 이들이 따르던 사람이 바닥에 떨어진 것처럼 보이자 더욱 조소하며 조롱하였습니다. 인간의 비열함, 질투, 열등감과 잔인함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4. 사람들은 머리를 흔들며 모욕했습니다. 네 자신을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조롱했습니다. 남은 구원하되 자신은 못 구원하는 실패자라 조롱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여,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그것을 보고 당신을 믿게 하시라 조롱했습니다. 표적을 믿었던 그들은 죽음의 순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을 보고 더욱 비웃었습니다.


5.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지극히 오만해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형용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의 예수님이 인내하시되 끝까지 참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조롱하며 내뱉은 숨결조차도 모두 하나님의 허락과 사랑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지했고, 어리석었으며, 교만하고, 악했습니다. 예수님과 사람사이의 무한한 차이, 그것이 십자가에서 일어난 현실이었습니다.


6. 세시(오전 9시)에 예수님은 못박혔습니다. 육시(오후 12시)가 되자 온 땅이 어두어졌습니다. 구시(오후 3시)에 예수님은 마지막 유언을 남기시고 돌아가셨습니다.


7.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말씀을 외쳤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 뜻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었습니다. 이 외침 속에 예수님께서 견디셨던 십자가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견디신 고난은 단순히 육체적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외면과 침묵,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의 고난이었습니다.


8.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위해,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고난을 받으신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닌 온전히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한 고난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함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고,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는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그 길을 대신 걸어가심으로 진정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9. 예수님께서 죽으신 순간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 휘장은 성전에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두꺼운 커튼이었습니다. 휘장은 하나님과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휘장 너머 지성소로 들어가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경계가 찢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마침내 하나님과 사람은 온전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10. 백부장이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고백했습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예수님의 죽음 속에서 예수님의 진실된 정체가 드러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조롱과 모욕으로 예수님을 비하했지만, 예수님은 죽음으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죄악과 살인을 용서와 생명으로 갚아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구원이 되었습니다. 이번 주는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깊이 묵상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1, https://www.youtube.com/watch?v=rJi0wNooA2Q (십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