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내어주는 사랑 (2022.10.09. 주일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11장 17~29절)
고린도전서 11장
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19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1. 모든 종교들은 정기적인 종교 예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예배에는 다른 종교에는 없는 독특한 예식 하나가 있습니다. 성찬식이라고 부르는 것인데요, 저희 교회는 매달 마지막 주에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 성찬식은 세례 받은 모든 사람들이 함께 떡과 포도주를 함께 나눠 먹는 예식입니다. 이 성찬식은 2천년전 기독교회가 처음 세워졌을 때부터 시작했던 예식입니다.
2. 이 성찬식의 유래는 이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른살이 되던 해부터 3년 동안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종교 권력자들에게 사로잡혀 사형을 선고받고, 로마 군인들에게 넘겨져 나무 십자가에 매달린 채로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사로잡히기 전날밤 이제 곧 자신이 이렇게 죽게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제자들을 불러서 저녁 만찬을 여셨습니다. 제자들이 들어올 때에 하나씩 발을 다 씻겨주시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말씀 23절부터 26절까지 말씀은 그 때 당시에 어떠한 대화가 오갔는가를 보여줍니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4. 예수님께서는 식사를 하실 때에 떡을 들고 감사기도를 드린 뒤에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 떡을 먹으면서 나를 기억하여라. 또 떡을 다 먹고 난 후에 포도주를 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내 피다. 내 피를 마시고 새로운 약속을 기억하여라.
5.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난 후에 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였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자기의 몸을 주셨구나, 주님이 우리에게 자기의 피를 주셨구나. 제자들은 이후에 예배 때마다 빵과 포도주를 마시며 자기 몸과 피를 주신 예수님을 기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음을 기억하였습니다. 성찬식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예배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예식입니다. (신에게 음식을 드리고 복을 받는 것 ->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먹고 나도 사랑을 나누어주는 것)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6.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우주의 한 먼지로 태어나서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려 살다가 떠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근본적인 의미가 있음을 믿고, 이 세상 너머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존재가, 우리의 인생이, 나아가 우리의 모든 것이 그 하나님의 사랑안에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7. 작은 선물은 눈에 쉽게 띄지만 큰 선물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남이 우리에게 백불짜리, 천불짜리 선물을 주면 우리는 큰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 혹여나 만불짜리 선물을 주면 눈이 휘등그래질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헌신과 섬김, 아내와 남편이 서로에게 베푸는 헌신과 섬김, 교회에서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헌신과 섬김은 어쩌면 십만불, 백만불로도 평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너무 커서 우리는 느끼지 못하고 너무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곤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그렇게 충격이 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보면 이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생명이라는 것, 하루를 살아가게 하는 모든 것들을 거의 대부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공기, 물, 햇볕, 땅, 대부분의 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작은 새들도, 작은 꽃들도 모두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선물은 너무도 커서 차마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8. 그렇게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삶,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삶을 성경은 ‘죄’라고 선포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 ‘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도덕적이고 법적인 잘못을 의미하는 ‘죄’와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죄’라고 번역된 성경 원어의 뜻은 제자리에 있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하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의미를 찾아 나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돈으로 삶의 의미를 찾고, 명예와 권세로 삶의 의미를 찾고, 즐거움과 쾌락으로 삶의 의미를 찾고, 나름의 방식대로 자기 의미를 추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 안에서 참된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 심지어 이러한 것들을 갖기 위해 남을 해치고 자기도 해치는 것, 이것이 죄의 삶이라 성경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죄의 길로 걸어가는 자의 운명이 죽음이라고 선포합니다.
9. 그러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분명히 보여주신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0.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여 주십니다. 그 사랑을 분명하게 보여주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눈앞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 믿는 것이요,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영생이라고 선포합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가는 삶은 곧 영원한 삶이 됨을 가르쳐 주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 말씀에서 이와 같이 고백했습니다.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11.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가득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헛된 것을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허망한 것들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그러한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자기의 몸을 내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선물로 주셨고, 새로운 생명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12.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고, 우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죽음은 그저 2천년 전에 한 청년의 죽음이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걸어가신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지극히 큰 하나님의 그 사랑을 온전히 깨닫는 사람입니다.
13.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예배 때에 성찬식을 계속해서 하는 것입니다. 성찬식을 통해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몸과 피를 내어 주셔서 그것을 내가 먹고 사는 구나, 내 모든 삶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구나를 깨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나를 감싸고 있는 이 놀라운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내 삶을 세우고, 그 사랑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결단하는 것입니다.
14. 그런데 이 귀한 성찬식을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망치고 있었습니다. 21절, 22절 말씀입니다.
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15. 고린도 교회 역시 바울로부터 전도를 받고, 예배를 드릴 때마다 성찬식을 함께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일요일이 휴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재산이 많아 일을 하지 않고 곧장 와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지만, 또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일을 해야 해서 예배가 끝날 즈음에나 올 수가 있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상황과 형편 때문에 먼저 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16. 그런데 먼저 온 사람들이 성찬식의 빵을 다 배불리 먹어버리고, 늦게 올 사람 것을 남겨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특히 부유한 성도들이 이와 같은 일들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심지어 취할때까지 포도주를 다 마셔버렸습니다. 결국 나중에 온 사람들은 빵과 포도주를 먹지 못하고 굶주린 채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17. 바울은 이 문제를 매우 적나라하게 지적합니다. 여러분, 여러분 집에는 먹을 것 없습니까? 교회 먹으러 옵니까? 여러분은 지금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난한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 할말이 없습니다. 매우 세게 자신의 생각을 전한 것입니다.
18. 성찬식은 주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는 사랑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온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것을 기억하기 위해 떡을 떼어 주셨습니다. 사랑이 대단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사실은 내가 먹고 싶은 것 참고 그거 옆사람에 나누어 주는 것 그게 사랑입니다. 내 마음의 기본적인 욕구를 참고, 다른 사람들의 욕구를 들어주는 것 이게 사랑입니다. (어머니 - 짜장면) 예수님은 떡을 나누어 주는 것을 통해, 그 큰 사랑의 핵심을 전하여 준 것입니다.
19.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입니다. 이 말씀은 성찬식때 우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20.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나처럼 사랑해라. 네 먹을 것 나누어 주며 사랑하라. 네 용서 나누어 주며 사랑하라. 네 시간 나누어 주며 사랑하라. 네 생명 나누어 주며 사랑하라. 하나님이 너에게 그렇게 사랑을 베풀어주고 계시니, 너도 그렇게 사랑하라. 하나님 너에게 주시는 사랑은 헤아릴 수 없이 깊고 넓고 높으니, 그것을 깨닫고, 너도 그렇게 사랑하라.
21. 오늘은 추수 감사절입니다. 우리는 사실 추수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근본적인 정신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요 사랑이다. 오늘도 나는 그분의 사랑으로 산다. 추수 감사절을 보내며,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삶의 자리에서 가장 작은 것에서부터 내 것 나누어 주는 귀한 삶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