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오직. (2011.11.18 설교)

category 주일 설교 2011. 11. 20. 21:02
여호수아 24장 15절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오늘 여기 한 노인이 등장합니다. 그는 노쇠한 몸을 이끌고 수많은 사람들의 앞에 섰습니다. 그는 오랬 동안 이 백성들의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 였습니다. 그렇지만, 오늘은 조금 다릅니다. 아마도 강한 목소리라기보다는 온 마음을 담은 그래서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입니다. 그는 한평생을 회고하는 마음으로, 그 진실한 마음을 담아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장 약했던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숱한 강대국들 사이에서 우리를 건져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이곳에 서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수많은 풍요롭고 강해보이는 이방신들을 섬기시려면 섬기십시오. 하지만 나와 내 가족은 오직 여호와를 섬기겠습니다. 그 노인은 자신이 한평생 경험했던 그 신앙을 오늘 자신이 평생을 통해 인도했던 이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어야할 말씀은 이 말씀입니다.

'오직 나와 내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하는 말씀은 우리집에 항상 걸려있던 가훈이었습니다. 저 말이 성경 어디에 있는 말씀인지도, 무슨 뜻으로 하는 말씀인지도 몰랐지만 항상 눈에 보이게 되어서 자연스럽게 외우고 되뇌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간단해 보이는 이 가훈은 우리 가족이 가치를 무엇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지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비록 길고 유창한 가훈은 아니지만, 삶에 구체적으로 도움이 되는 명언도 아니었지만, 이 가훈은 우리가족이 마음과 정신 속 가장 깊고 깊은 곳에 두어야 할 가치! 마음속에서 용광로 같이 불타고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를 우리들 마음속에 던져 주었습니다. 바로 이 말씀은 여호수아가 그 평생을 바쳐 그 자손들에게 외쳤던 말씀이며,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와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목숨을 걸고 외쳤던 말씀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선포된 복음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노인, 여호수아는 젊은 시절부터 하나님을 만났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는 모세와 동행하여 시내산에 올랐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회막에 임하였을 때 그는 밤낮으로 회막을 지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세의 곁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온몸으로 느꼈고 그의 존재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전율하였고 하나님을 누구보다 더 가까이에서 경험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의 근원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살수 있음을 알게 되었고, 우리가 어떠한 능력이 있다하더라도 하나님이 없으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에 거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흔히 착각합니다. 어떤 신비로운 체험을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혹은 하나님이 주어진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떤이에게는 신비로운 체험이 평생을 통해 전혀 일어나지 않기도 합니다.(요셉) 어떤 이들은 평생 신비적인 체험을 하면서 살기도 합니다.(엘리야) 어떤이들은 평생 율법을 잘 지켜낼 수 있는 능력과 상황이 되기도 하고,(바리새인) 어떤 이들은 그렇지 못하기도 합니다.(세리) 이러한 것들은 모두 상대적입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아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이러한 것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생명의 근원됨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절대적인 앎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 되심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곧 그분이 우리에게 행하신 사랑임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곧 바로 그것을 깨달아 안 사람들입니다. 여호수아는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그 깨달음은 그의 삶 평생을 통하여 그를 이끌었으며, 오늘 이시간의 고백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여호수아는 가나안땅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모리인의 커다란 몸집과 발달된 철기 문화, 도저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성벽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나안땅을 점령하는 이 전쟁이 침략과 정복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이 없는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구원을 주시는 분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가나안땅은 풍요로운 땅이지만 그곳은 자기 욕망과 탐욕이 지배하는 땅이었습니다. 생명보다 풍요로움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땅이었습니다. 강해보이고 좋아보이나 그곳은 생명을 죽이는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없이 욕망으로 내달리는 인간의 문화를 가진 그 곳은 결국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그곳은 살아도 죽는 땅이요, 죽어도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을 생명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꾸고자 하셨습니다. 애굽에서 종으로 살던 가장 약한 히브리민족을 이끌어 애굽과 가나안, 메소포타미아의 죽음의 문명들을 하나님의 생명의 문명으로 바꾸고자 하셨습니다. 젖은 히브리 문화에서 생명을 의미합니다. 꿀은 말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말씀이 넘치는 그 땅으로 바꾸고자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의 정복은 구원과 생명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약함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강함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만이 보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외쳤습니다.
 
<민수기 14: 6-9> 
6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나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전쟁을 자신들의 땅을 차지하는 전쟁이라고 생각했고, 하나님은 전쟁을 도와주는 신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겐 객관적인 조건과 상황이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라는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까요? 우리 또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고 알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섬기고 믿는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시는 그 하나님인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을 믿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위에 우리가 있다면 저 강한 산성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것이고, 우리가 풍요로움에 사로잡혀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떠나는 어리석음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안다면 세상의 성공과 실패에, 부와 가난, 명예와 권세에 목숨을 걸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이 그러한 것들에 매여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생명이시며 구원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건 마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여행할 때 그 여행지가 어디인지, 무엇을 먹는지가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아마 그 사랑하는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에 집중할 것이고, 그 사람을 알고 그 사람의 사랑을 얻기 위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여행길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볼까 무엇을 할까에만 관심이 있다면 그래서 다툼이 생기고 갈등이 생기고 어려움이 생긴다면 그것은 이미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정복한 성들이 대표적으로 성읍들이 있을까요? 네. 여리고성이 있습니다. 네. 네. 이런저런 성들이 있습니다. 저는 여호수아에서 가장 인상적인 두 성읍을 꼽으라면 여리고성과 아이성을 꼽겠습니다. 여리고성은 굉장히 강한 성이었습니다.  요단을 건너 첫번째로 점령한 성으로 가나안의 강대한 문명을 상징하는 성이었습니다. 가나안의 세속 문명의 상징이었습니다. 가장 어려울것으로 생각되는 전투가 그들의 눈앞에 나타나게 된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한 점은 이 성읍이 무너진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무너졌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강한 것도 하나님의 구원사역앞에서 철저히 무너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보여주셨습니다. 가장 풍요로운 것도 하나님의 능력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졌을때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는 라합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만이 구원이자 생명이라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큰 성읍 여리고성, 인간의 욕망과 탐욕이 넘치는 성, 스스로를 높이고 안전하다 생각하는 그 성, 죽음의 성은 하나님의 구원과 생명과 사랑앞에서 그렇게 무너졌습니다. 

또 하나의 성 아이성을 봅니다. 보잘 것 없는 성, 누가 보아도 살짝 건들기만 하면 무너질 것 같은 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전투에서 패배하였습니다. 이유는 아간이 자신의 욕심을 위해 아름다운 외투 한벌과 은 이백세겔과 금 덩어리 오십세겔을 빼돌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전투가 시작하기 전,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수아에게 다 올라갈 필요도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사실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전쟁은 단순히 하나님의 힘을 이용한 정복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들은 그저 먹고 살 땅이 필요했습니다. 정복을 추구하는 그들은 욕망을 삶의 중심으로 살아가는 가나안 사람들의 태도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정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효율'이었습니다. '효율'을 추구하는 그들은 이삼천명이면 충분히 칠 수 있겠다고 조언합니다. 그들의 그러한 태도는 '아간'의 태도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이성의 전투에 패배한 것은 아간의 빼돌림 때문이었지만, 사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 전부의 태도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을 모르는 그것이 그들을 실패로 이끌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리고성과 같이 거대한 문제 앞에서 좌절하였으나 하나님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해결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아이성과 같이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던 것이 오히려 우리의 발목을 잡으며 우리를 괴롭혔던 기억이 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그 큰 문제나 작은 문제를 넘어선 하나님의 뜻이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내 삶의 중심이 되면 문제가 해결되어도 자기 뜻대로 그것을 감사하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자기 소견대로 그것을 해석합니다. 특히 오래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은 이러한 문제에 너무도 쉽게 빠져들어 도무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자기 신앙을 가지고 신앙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 앞에만 집착하고 있지는 않은 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다에 나가보면 파도가 있고 조류가 있습니다. 배를 움직이는 것은 결국 큰 바다의 흐름인 조류입니다.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는 것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큰 조류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류를 보지 못하고 파도가 출렁여 배가 위로 올라가면 성공하였다 은혜다 기뻐하고 파도가 출렁여 배가 밑으로 내려가면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파도일 뿐입니다. 그것에 집착하는 순간 하나님의 섭리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호수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나와 내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이 말에는 너무도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의미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가 우리를 구원하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여호와는 유일한 내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그분은 유일하게 나를 온전히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것을 이제 내가 압니다. 이제 내가 내 삶의 토대와 내 삶의 중심을 온전히 하나님께 두고 살겠습니다. 특별히 이 가나안의 풍요로움과  욕망, 자기 중심적인 문화가 가져오는 모든 우상을 하나님이라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갖지 않겠습니다. 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바알도 하나님이 아니요 아세라도 그모스도 몰렉도 하나님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 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여호수아의 고백을 이스라엘 백성이 들었을까요? 24장에서는 잘 대답합니다만 그들의 역사는 결코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의 이스라엘 역사는 우상숭배의 역사입니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바벨론으로 끌려가기 전까지 시기의 이스라엘 유적지 전역에서 드라빔과 우상이 끊임없이 발견된다고 합니다. 그들이 오랜세월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진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수밖에 없었고, 그때서야 그들은 비로소 구원의 하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목소리에 응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목소리에 어떻게 응답하시길 원하실까요? 우리도 그들과 같이 망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사건을 바라봄으로 이 물음에 응답하시길 원하십니다. 역사는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스라엘에 가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찾아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그 땅은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들 속에 이루어지는 하나님나라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방종교인을 죽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살인입니다. 우리가 정복해야 할 가나안 땅은 세속화된 우리의 생각, 욕망으로 살아가고, 다른 이들을 정복하려는 마음으로 살아가려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우리안의 가나안 문화입니다. 그것을 죽이고 그것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곧 우리의 죄가 곧 무너져야 할 가나안 땅이고, 우리안에 세워야 할 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것이 무엇으로 가능할까요? 바로 우리 안에 오신 하나님, 우리안에 오신 구원, 우리안에 오신 생명, 우리안에 오신 사랑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속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 죽으심은 성경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될 때 죽게될 죄와 악한 권세의 죽음, 그리고 우리의 죄에 대한 죽음입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처럼 우리의 죄도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무너져 죽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부활, 우리 예수님의 그 부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오늘 이곳, 나와 교회와 이 세상모든 곳에 이루어지는 그 부활, 생명이 강이되어 모든 땅에 흐르는 그 부활이 우리에게 임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유일한 길입니다.

<갈 2:20>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알려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의 창조주이고, 너희 생명의 근원이고, 너희를 구원할 자이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비로소 살것이다. 그러나 그 드러내심을 받아드리고 온전히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죽이심으로 자신이 생명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주고자 그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응답할 차례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보여주셨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눈앞에 보이는 이익과 자기 소견에 옳은 데로 행하였던 우리가 응답할 차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당신을 구원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오늘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나와 내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주일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나라 (2011.12.16)  (0) 2011.12.17
마리아의 기도 (2011.12.11)  (0) 2011.12.15
공감 (2011.08.28)  (0) 2011.08.28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2011.8.12 설교 원본)  (0) 2011.08.14
주의 멍에  (0) 2011.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