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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백성

category 주일 설교 2011. 5. 28. 01:31

 

베드로전서 2장 1절 ~ 10절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6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자니라

 

사람의 삶은 그 사람의 정체성이 좌우합니다. 삶의 다양한 정황 속에서 그것을 뚫고 나가는 힘은 그의 정체성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 닥쳤을 때 어떤 사람이 변하는 것을 보고 그의 정체가 밝혀졌다고 합니다. 또한 어떠한 상황에도 꿋꿋히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사람을 보고 정체가 확실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처럼 고난과 역경은 사람의 정체를 드러내 줍니다. 생각해 보면 정체성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내면의 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여행 중에 다녀온 두 곳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티베트의 수도 라싸이며, 두 번째는 티베트의 망명정부가 있는 맥클로드 간즈라는 곳입니다.

 

티베트 라싸                                                    맥클로드 간즈
가난한 사람들                                                 비교적 부유함
대체로 교육을 못받음                          사회 지도층과 지식인들
문화가 파괴되고 자유가 억압됨      문화가 보존되고 자유롭게 삶
버려진 다수                                                       선택된 소수

 

티베트 라싸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 울분과 고통을 가슴속 깊이 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지켜야할 정체성에 대해서 확실하게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외국인을 위한 파티가 있다고 해서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이 풍부하였고, 마음껏 놀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놀았고, 티베트 친구들과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은 무료였고, 우리는 풍성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파티를 마친 뒤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파티를 들어올 때는 정문으로 들어왔지만 나갈 때는 쪽문으로 나가야만 했습니다. 그 쪽문에는 그 파티를 준비했던 주인이 서있었습니다. 그는 울면서 우리의 손을 잡고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오늘 우리를 기억해 주십시오. 티베트의 고통과 티베트의 아픔을 기억해주십시오. 우리의 상황을 꼭 고국에 돌아가서 이야기해주십시오. 그 모든 음식과 모든 대접은 이 한마디를 전하고 싶은 그의 정성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목숨을 걸고 우리를 대접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의 정체성 때문입니다. 티베트 라싸에서 만난 대학생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중국정부는 우리의 문화를 파괴한다. 중국 정부는 어린 학생들을 북경이나 청두로 끌고와서 중국식으로 교육시킨다. 그들은 우리에게 중국인이 되라고 강요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할수록 우리 문화 우리 고국을 위한 우리의 사랑은 뜨거워지고, 우리는 더욱 더 티베트 인이 될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정체성입니다. 반면 부유한 맥클로드 간즈에서 만난 티베트 친구들은 다 그런것은 아니지만 돈을 버는 데 바빴습니다. 그들의 눈은 빛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자신이 중국인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외국인들에게 관광상품을 팔고, 외국인들과 사귀어서 잠자리를 갖으려고 하는 젊은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독립을 위해 싸운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 속에서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되돌아 봅니다. 우리는 어떠한 정체성을 가져야 할까요? 멀리는 초대교회의 성도들로부터 가깝게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온 선교사들, 일제 강점기와 전쟁 중에 목숨을 걸고 순교하신 순교자들. 우리 교회에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얼마전 이땅을 흔들었던 이태석 신부. 그들은 어떠한 정체성을 가졌을까요?

 

오늘 우리는 베드로전서의 말씀을 통하여 이 정체성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베드로 전서는 빌립보서, 히브리서, 요한계시록과 함께 고통당하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대표적인 서신서입니다. 베드로는 점점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 때문에 핍박당하고 조롱당하는 각 교회의 성도들에게 로마에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우리가 이 고난속에서 어떻게 살 수 있는 지를 밝혔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개인적으로는 고통과 고난, 어려움 속에서 신앙하고 있는 각 성도님들에게 힘이 되어줄 것입니다. 아주 크게는 점점 더 세속화된 사회와 문화 속에서 우리 한국교회가 어떻게 해야하는 지 방향을 제시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위임예식’을 앞둔 ‘삼각교회 성도’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지난 몇 년간 기다리고 기대하고 기도하며 인내로 교회를 이끌어온 우리교회 모든 성도님들에게, 우리가 어떠한 정체성으로 교회를 이끌어야 할지 지표가 되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첫째로 구원을 추구해야합니다. 다같이 오늘 말씀 1절에서 3절까지 읽도록 하겠습니다.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말씀은 선포합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모든 악독, 모든 기만, 외식, 시기, 비방하는 말을 버려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저지를 수 있는 ‘악’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을 때, 내 자매를 섬기지 않을 때 발생하는 죄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철저히 자기중심적일 때, 이기적일 때 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를 범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죄의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는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지 않아서입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우리는 사랑하려고 하여도 사랑할 수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사랑할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나를 사랑해야 알아야하고, 내가 건강해야 하며, 내가 바로 서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우리 스스로 설수 없고 우리 스스로 우리를 사랑할 수 없게 되어있다는 데 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자기 사랑은 하나님 전제되지 않은 왜곡된 자기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만을 사랑하는 방식은 오히려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중심적 사랑, 이기적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약한 모습을 감추고 싶어 타인 앞에서 외식하고 기만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없애기 위해서 타인을 비방하고 시기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을 타인으로부터 채우기 위해 악독을 저지릅니다. 그러한 방식이 우리의 부족함을 채우는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을 바르게 사랑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의 결과는 치명적인 죄요, 악입니다. 그러한 것은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채우기보다 오히려 악화시킵니다.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한데, 그 사랑을 채우기 위한 노력이 오히려 사랑을 빼앗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다같이 읽겠습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 젖을 진짜 우유를 마시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주석을 살펴보니 실제로 이 우유에 제사를 드리고 우유를 함께 마셨던 종교 집단이 존재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가면 이단이 됩니다. 구약의 전통에서 우유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바로 생명을 상징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오는 순전하고 신령한 생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신령함’이라는 단어와 ‘말씀’이라는 단어가 유사해서 ‘순전한 말씀의 젖’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 순전하고 신령한 생명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구원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앞서 말한 악덕들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우리는 연약한 존재 - 곧 죄인이고,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을 채우려는 노력, 곧 우리가 우리의 방법대로 사랑하려는 노력은 곧 악돋, 기만, 외식, 시기, 비방으로 빠질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전하고 신령한 젖 곧 우리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복음의 생명에 깊이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 것만이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방법입니다. 구원을 추구해야 합니다. 구원을 추구해야 합니다. 생명을 바라바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분영하고 시기하고 다툼하는 것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가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랑해야하고 하나되어야 하고, 정의를 실천해야한다는 것은 다 똑같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추구하고 생명을 바라보고 구원의 깊이로 진정으로 다가가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의 생명을 어떻게 추구해야 합니까? 갓난아기처럼 하라고 말씀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체험해보지 않았지만, 듣는 풍월로, 갓난아기의 젖 빠는 힘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아이가 배고플때 우는 소리 또한 대단합니다. 어쩜 그렇게 우렁차게 우는 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해 젖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에겐 그것이 전부입니다. 아이는 자기가 명품 포대기를 둘렀는지 아닌지, 자기가 잘생겼는지 아닌지 이러한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엄마의 젖이 전부인것처럼 맹렬하게 집중하여 찾습니다. 완전히 젖에 올인하였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생명을 간구하는 것이 이와 같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세례를 죽음에 상징하였던 것에 반해 베드로는 세례를 부활의 의미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이미 부활에 참예하고 있습니다. 이미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가운데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새 생명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를 아닌 사람들입니다. 생명의 말씀의 귀함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맛보았으니 그대로 해야 합니다. 계속 구원의 생명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어떻게? 갓난아이처럼!


 

둘째로 우리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함께 죽고, 함께 살아야 합니다. 4절에서 8절까지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6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우리는 산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는 신령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토대로 삼아 예수님처럼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아가야 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처럼 살지 않습니다. 더 정확하고 냉정하게 말하면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함께 4절을 다시한 번 읽겠습니다.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사람에게는 버린바가 되었으나... 예수그리스도와 같이 산다는 것은 사람에게 버린 바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과연 나의 성공과 하나님의 영광이 무슨 상관이 있을 까 진지하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성공하여 ‘하나님의 대사가 되는 것’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세속적인 성공’으로 영광을 받으신다면 여전히 ‘성공’과 ‘인정’과는 상관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받아드리실까를 생각해봐야합니다. 심지어 사도들도 아무도 세속적으로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께서 사람에게는 버린바 되었다. 이것은 노예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복음을 받아드린 당대의 수 많은 그리스도인, 선한 행위를 하려다 조롱을 받고 버림받은 심정을 느끼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포된 말씀입니다. 또한 ‘세속의 성취’를 하나님의 ‘영광’이라 착각하는 어리석은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심령을 뒤집어엎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따라간다는 것은 함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를 따라간다는 것은 그 낮은 자리를 기꺼이 받아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그리고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는 산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돌같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낮은자리에서 버림받은 돌과 같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심으로 살아있는 돌과 같이 되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신 살아있는 돌의 모습. 그 생명이 우리에게 옮겨짐으로 우리 또한 산돌이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매일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매순간 살아납니다. 그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삶이고 부활생명의 신비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 돌 ‘자신을 내려놓고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그 자리’는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는 자리가 될 뿐입니다. 그것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 우린 성도에게는 그 자리가 생명의 그 자리, 보배로운 자리, 죽음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자리, 다가올 영원한 구원을 맛보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버림받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말지. 성도여러분 우리가 세상 속에서, 그리고 우리 교회안에서 마땅히 낮아지고 섬겨지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얼마나 크고 있는 지는 자랑할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가 얼마나 섬기고 있는 지를 자랑해야 합니다. 세속적인 부와 영예, 높임과 힘을 단호히 물리치고 우리가 드러낼 것은 오로지 예수그리스도의 겸손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낮은 섬김을 통해 드러나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세속적인 영광’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생명’으로서의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야야 합니다. 9절, 10절을 함께 봉독하시겠습니다.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신앙. 기독교 신앙의 탁월성은 어디에 있을까요? 저는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행 중에 무슬림 지역의 시장에서 한 무슬림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던 적이 있습니다. 주제는 기독교와 이슬람이었습니다. 그 친구의 가장 큰 의문은 어떻게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가 였습니다. 사람을 신으로 섬기는 기독교는 잘못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대답은 사람이 신이 된 것이 아니라 신이 사람이 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친구의 반론은 유일신 신앙에서 그것이 가능한 것인가?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기적이자 은총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는 대화의 평행선을 달리다. 밝게 인사하고 의례차 이메일 주소를 주고 받고 헤어졌습니다.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은총이 그 기적같은 일이 얼마나 큰 일인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무슬림 친구의 생각처럼 상상할 수 도 없는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사랑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3위 1체 하나님의 완벽한 작품이자 은총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 구원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하게 드러났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끊임없이 조명되고 밝혀져 그 구원에 나에게 임하였음을 알게 하셧습니다. 모든 것이 전적인 은총이고, 우리는 철저히 수동적으로 받아드릴뿐입니다. 우리는 결코 스스로 거룩하여 질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서 선포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궁극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택하신 족속’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이사야(43:20-21)와 출애굽기(19:6)를 통하여 선택된 이스라엘에게 선포된 말씀이었습니다. 이제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자에게 선포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가운데 백성이 아니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우리가 어둠과 죽음 가운데서 긍휼을 얻지 못하였으나 이제는 긍휼을 얻었습니다. 말씀의 핵심은 우리가 은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드러났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어떤 행위, 심지어, 구원을 추구하는 행위나 예수를 따라 죽음에 참여하는 삶의 모습보다더 먼저 이루어진 것입니다. 모든 것에 앞서 그분의 구원이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그때 아무런 조건없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건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감격하고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죄인된 우리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 삼고자 애쓰신 눈물과 피의 흔적입니다. 그 은총과 사랑이 우리를 그분의 백성되게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선포합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 어두운 곳, 지옥의 헬라어는 게헨나입니다. 게헨나는 힌놈의 골짜기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힌놈의 골짜기는 어디입니까? 참혹한 곳입니다. 몰록신에게 자기의 자식을 불에 내던져 제물로 바치던 곳이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신에게 요구하기 위해서, 혹은 그 신이 두려워서 생명을 바치던 곳이었습니다. 저주받은 곳이고, 눈물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불과 죽음과 시체가 항상 있던 곳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어둠. 죽음과 고통이 지배하던 곳에서 나오게 된것입니다.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우리는 그의 은총과 구원으로 오히려 생명 가운데 있게되었습니다. 부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참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온전하심가운데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비참함에서 나와 빛가운데 거하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이러한 구원의 뜻을 우리는 그 감격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됨입니다. 감격하고, 기뻐하고, 감사하고, 사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가 함께 모이는 이 자리가 곧 예배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하나님의 덕을 선포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나아가 세상 가운데 그 덕을 선포하는 것은 곧 선교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삼각교회가 서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성도된 우리가 서 있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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