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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의 욕심 (2019.01.09. 수요예배 설교)


사도행전 8장

9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 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10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11    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그들이 따르더니

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13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15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17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9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20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21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22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23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24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 하니라


우리 교회에서 얼마 걸리지 않는 곳에 ‘사직단’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조선시대에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습니다. 지금도 그곳에 가보면 널따란 제단이 있습니다. 농업을 가장 중요한 나라의 근간이라 여겼기 때문에 조선 왕은 이곳에서 매년 정월, 봄, 가을, 그리고 천재지변이 일어났을 때마다 제사를 지냈습니다. 


왕이 이렇게 매년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렸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제사를 통해 왕의 권세와 위엄을 확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농경사회였던 당시, 먹고 사는 문제는 전적으로 농업의 성공에 달려있었습니다. 그리고 농업의 성공은 기후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왕은 좋은 기후를 위해 무엇인가 역할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제사는 백성을 사랑하는 왕의 마음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좋은 통로가 되었습니다.


왕은 토지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에게 제사를 드렸지만, 그가 정작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왕권이요, 그 왕권을 지지해줄 백성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이 모든 제사의 모습을 드린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제사가 비를 내리게 해주거나, 따뜻한 기후를 가져다주는 것은 다음 문제였습니다.


이와 같이 사직단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역사 속에서 종교가 때때로 어떠한 역할을 해왔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종교는 이처럼 신의 이름을 빌어, 신의 권위를 이용해,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권력자의 도구로 사용되어왔습니다. 바벨론 왕은 바벨론의 신 마르둑을 숭배함으로 자기의 권위를 높였습니다. 이집트 파라오는 태양신 라를 숭배함으로 자기의 권위를 높였습니다. 중국의 황제는 자신을 천자, 곧 하늘의 아들이라 칭했고, 로마 황제들은 자기 자신을 살아있는 신으로 높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삼국시대 때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불교를 도입한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신을 숭배했지만, 실은 신의 이름으로 포장된 자기 권력 숭배였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이 이러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시몬은 오랫동안 사람들이 놀라는 마술을 행해왔습니다. 주석에 따르면 아마도 병을 치유하거나 여러 이적이 보여준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은 시몬이 이러한 일들을 오랫동안 보여주자 크게 놀라며 따랐습니다. 성경은 낮은 계층의 사람부터 높은 계층의 사람들까지 다 따랐다고 증언합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그를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까지 칭송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메시아’로 높였습니다. 여기까지를 보면 시몬의 이런 모습은 마치 예수님의 사역했던 모습처럼 보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몬이 예수님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교만함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자칭 큰 자’로 불렀습니다. 그가 마술을 하는 근원적인 동기는 자신을 높이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치 권력자들이 자신을 높이기 위해 신을 숭배하고, 종교를 이용했던 것처럼, 시몬 또한 자기 자신을 큰 자로 높이고 사람들의 칭송을 얻기 위해 마술을 이용했던 것입니다. 그가 행하였던 수많은 이적은 조금도 그 자신을 바꾸지 못했고, 오히려 자기 자신의 죄성을 강화하는데 활용되었을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시몬 앞에 빌립이 나타났습니다. 빌립은 복음을 전하며 표적과 큰 능력을 드러내었습니다. 시몬은 빌립의 이러한 능력을 보고, 그를 동류로 여겼습니다. 그는 빌립을 통해 자신이 한 층 더 강화되길 바란 것 같습니다. 그는 빌립이 전한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고,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녔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의 모습은 누구보다 충성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의 이적과 능력에 놀랐습니다. 


그러던 중 예루살렘에서 사도들, 베드로와 요한을 내려 보냈습니다. 빌립 집사가 사역하던 사마리아에 세례는 받았지만, 성령을 받지 못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것이 곧 성령 받음의 증표인데, 이들은 아직 성령을 받기도 전에 세례를 먼저 받은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이 이들을 위해 안수하자 즉각 이들에게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자신을 구원한 사건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단지 성령 충만의 증표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심령이 근본적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나 시몬은 이 사건 앞에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았습니다. 자기를 높여줄 능력, 사람들이 칭송해줄 기적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이적과 기적, 종교는 자신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사건의 의미를 깨닫고, 그것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저 그 능력만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사도들에게 돈을 내면서 요청하였습니다. “나에게도 그런 권능을 주어 내가 손을 얹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는 사도들 역시 자기와 같은 부류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종교는 의례 그렇고 그런 것이라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종교라는 것이 돈을 위해, 자기를 높이기 위해, 사람들에게 칭찬과 높임을 받기 위해 필요한 것다, 그렇기에 그는 이 능력을 돈을 주면 살 수 있는 것이다 라고 생각했고, 사도들 역시 지금껏 수많은 종교인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똑같이 이 방식에 동의할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전형적인 종교 장사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이에 격하게 비판하였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고 생각하였으니, 당신은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우리의 일에 당신이 차지할 자리도 몫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 악한 생각을 회개하고, 주님께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행여나 그대는 그대 마음 속의 나쁜 생각을 용서받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보니, 당신은 악의가 가득하며, 불의에 얽매여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비판으로 시몬을 비판하였습니다. 시몬은 이와 같은 반응에 오히려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진짜’ 신앙인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비판은 오늘 우리에게 ‘신앙’이 무엇인지를 깊게 생각하게 만듭니다. 가짜 중에 가장 문제가 되는 가짜는 진짜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비슷한 가짜입니다. 시장에서도 나이키의 가짜 제품이 나이스라고 한다면 되려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똑같이 생긴 가짜 제품은 모두를 속인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킵니다. 시몬처럼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고, 전심을 다하여 사역하는 사람, 그러나 그 중심이 하나님이 아닌 자기로 가득찬 사람은 남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마저 속이려는 사람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나 결국 그 끝이 자기를 향하고 있다면, 그것은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악의가 가득하고 불의에 얽매여 있으며 하나님 나라에 차지할 몫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위험함을 알았기에 더욱 강하게 비판하였습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죄를 자기 안으로 굽은 마음이라 하였습니다. 죄인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위해 신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위한 신상을 세우고, 자기를 위한 교리와 율법을 만들며, 자기를 위한 공동체와 교회를 세웁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그 끝은 자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와 정반대의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신의 뜻을 내려놓으셨습니다. 공동체와 교회를 위해, 죄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종교 권력과 정치 체제를 우상으로 높이는 교리와 율법을 비판하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근본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모욕과 굴욕와 상처와 죽음의 십자가의 길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셨습니다. 인류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우상을 세우는 것을 종교로 정의한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철저히 반종교적인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인간의 죄성을 정확히 알았기에 하나님을 자기를 높이기 위해 활용하려는 시도들을 계속해서 강하게 비판합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음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출애굽의 이야기는 자신을 하나님처럼 높이는 애굽 제국의 방식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 백성의 방식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종교적으로 이용하려는 사울의 교만한 행동을 지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 산당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하심으로, 하나님을 자기 방법대로 자기의 욕망을 위해 섬기는 것을 거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특정하게 밝히시지도 않으시고, 당신을 형상화 할 것을 거절하심으로 우리가 우리의 뜻대로 하나님을 정의내리는 것을 비판하셨습니다. 우리의 욕망과 우리의 뜻대로 하나님을 만드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포장된 우리 욕망을 숭배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알지 못하게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선한행위를 통해 자기 자신이 높아지려는 것이 얼마나 교묘한 형태의 우상숭배인지 아셨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골방해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마저도 자기를 높이는 행위가 될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비교하시며 자신의 의로움과 성실한 종교생활을 자랑한 바리새인보다 자신의 죄인됨을 통렬히 고백한 세리를 의롭다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통해 자신을 높이려는 인간의 죄악됨이 얼마나 뿌리깊고, 악한 것인지를 예수님께서는 아셨습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혈루병 걸린 여인, 모욕을 감수하면서 자신의 자녀를 고쳐달라고 한 수로보니게 여인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이들의 간절한 기도와 간구를 예수님을 이용하려는 태도라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들은 진실로 자신의 삶에 예수님이 필요함을 고백함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말씀이 바리새인을 비판하고, 교만한 유대인들을 비판하고, 또 시몬을 비판하는 것을 말씀하시고 싶은 것은 자기의 교만함과 높아짐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교묘한 교만함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숭배하는 모습으로 결국은 자신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의 가르침 앞에 서게 된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근원적인 양심에 찔림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모두 잘못된 종교적 습성, 뿌리깊은 자기 중심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닮으려 한다하더라도, 뒤돌아보면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할때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주님을 위해 헌신하였다 하더라도, 우리가 희생하였다 하더라도, 기도하고 순종하는 길을 갔다 하더라도, 우리의 뒷모습을 뒤돌아보면 여전히 우리의 죄악됨을 발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눈을 가리면, 아무리 반드시 걷겠다 노력하고 애써도 결국 눈을 뜨고 되돌아보면 좌우로 휘청거렸던 우리의 흔적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잘하면 교만의 함정에, 못하면 절망의 함정에 빠지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의 나오는 마술사 시몬을 교회 전통에서는 마구로 시몬이라 불렀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결국 이단 영지주의의 사제가 되었습니다. 스스로 영적인 지혜를 얻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분파였습니다. 교만함의 함정을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훗날 성직매매를 시모니즘이라 부르게 될 만큼 그는 불명예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시몬 마구로와 대비되는 인물, 곧 시몬 베드로는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랐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결국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하였습니다. 그것도 예수님과 같이 매달릴 수 없다하여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 둘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결단과 능력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데 있었습니다. 되돌아보면 베드로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었고, 메시아를 따라서 회복된 왕국의 지도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로비를 벌이던 다른 제자들과 다투었고, 로마에 의해 예수님이 처형당하자 죽을 것이 두려워 도망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훗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성령의 도우심 아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사건임을 깊이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마술사 성령의 능력은 원했지만 성령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던 것과는 대비됩니다. 여기에 우리 답이 있습니다.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사는,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영원함을 소망하나 늘 유한함을 발견합니다. 오늘 하루의 고단함을 이겨내기 힘들고, 다가오는 삶의 불안과 두려움을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진실로 만나지 못한다면, 결국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거짓 하나님을 만드는 방법을 찾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모습을 보이든 그 근원은 결국 우리 자신을 스스로 높이려는 것과 이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섯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미끄러지는 것, 파랑새라고 잡은 순간 그 색이 변해버리는 것 그것이 우리의 운명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나의 행동과 나의 감정과 나의 지식과 나의 업적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닌 여기 우리 앞에 서있는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내가 곧 내 스스로를 높이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로운 신을 세우는 교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나를 사랑하사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시고, 용서하시고, 다시 회복시키셨음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나를 높이기 위해 주님을 찾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자신의 낮아짐을 감수하시며 우리를 만나주시고 사랑해주셨음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이 일이 매일매일 우리의 삶에서 부딪히는 사건이 되어야 하고, 이 사건이 진실로 우리 삶을 사로잡는 현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통해 우리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비로소 선악과를 뱉어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새문안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에겐 참으로 깊은 역사와 좋은 제도, 훌륭한 신앙의 유산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다면, 이 모든 것들은 가장 교묘히 은폐된 우리의 우상이 됩니다. 마술사 시몬처럼 믿고, 세례를 받고, 열심히 따라다녀도, 아무소용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이것들 때문에 망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날카로운 비판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는 말씀은 여전히 우리에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가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주목해야 합니다. 오직 믿음, 오직 말씀, 오직 은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우리를 진실로 살게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주님께 구해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말씀 한구절을 통해 말씀을 마치고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