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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1장
1    이 일은 아하수에로 왕 때에 있었던 일이니 아하수에로는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백이십칠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라
2    당시에 아하수에로 왕이 수산 궁에서 즉위하고
3    왕위에 있은 지 제삼년에 그의 모든 지방관과 신하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 바사와 메대의 장수와 각 지방의 귀족과 지방관들이 다 왕 앞에 있는지라
4    왕이 여러 날 곧 백팔십 일 동안에 그의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내니라
5    이 날이 지나매 왕이 또 도성 수산에 있는 귀천간의 백성을 위하여 왕궁 후원 뜰에서 칠 일 동안 잔치를 베풀새
6    백색, 녹색, 청색 휘장을 자색 가는 베 줄로 대리석 기둥 은고리에 매고 금과 은으로 만든 걸상을 화반석, 백석, 운모석, 흑석을 깐 땅에 진설하고
7    금 잔으로 마시게 하니 잔의 모양이 각기 다르고 왕이 풍부하였으므로 어주가 한이 없으며
8    마시는 것도 법도가 있어 사람으로 억지로 하지 않게 하니 이는 왕이 모든 궁내 관리에게 명령하여 각 사람이 마음대로 하게 함이더라
9    왕후 와스디도 아하수에로 왕궁에서 여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라
10    제칠일에 왕이 주흥이 일어나서 어전 내시 므후만과 비스다와 하르보나와 빅다와 아박다와 세달과 가르가스 일곱 사람을 명령하여
11    왕후 와스디를 청하여 왕후의 관을 정제하고 왕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그의 아리따움을 뭇 백성과 지방관들에게 보이게 하라 하니 이는 왕후의 용모가 보기에 좋음이라
12    그러나 왕후 와스디는 내시가 전하는 왕명을 따르기를 싫어하니 왕이 진노하여 마음속이 불 붙는 듯하더라
13    왕이 사례를 아는 현자들에게 묻되 (왕이 규례와 법률을 아는 자에게 묻는 전례가 있는데
14    그 때에 왕에게 가까이 하여 왕의 기색을 살피며 나라 첫 자리에 앉은 자는 바사와 메대의 일곱 지방관 곧 가르스나와 세달과 아드마다와 다시스와 메레스와 마르스나와 므무간이라)
15    왕후 와스디가 내시가 전하는 아하수에로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니 규례대로 하면 어떻게 처치할까
16    므무간이 왕과 지방관 앞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왕후 와스디가 왕에게만 잘못했을 뿐 아니라 아하수에로 왕의 각 지방의 관리들과 뭇 백성에게도 잘못하였나이다
17    아하수에로 왕이 명령하여 왕후 와스디를 청하여도 오지 아니하였다 하는 왕후의 행위의 소문이 모든 여인들에게 전파되면 그들도 그들의 남편을 멸시할 것인즉
18    오늘이라도 바사와 메대의 귀부인들이 왕후의 행위를 듣고 왕의 모든 지방관들에게 그렇게 말하리니 멸시와 분노가 많이 일어나리이다
19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실진대 와스디가 다시는 왕 앞에 오지 못하게 하는 조서를 내리되 바사와 메대의 법률에 기록하여 변개함이 없게 하고 그 왕후의 자리를 그보다 나은 사람에게 주소서
20    왕의 조서가 이 광대한 전국에 반포되면 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여인들이 그들의 남편을 존경하리이다 하니라
21    왕과 지방관들이 그 말을 옳게 여긴지라 왕이 므무간의 말대로 행하여
22    각 지방 각 백성의 문자와 언어로 모든 지방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남편이 자기의 집을 주관하게 하고 자기 민족의 언어로 말하게 하라 하였더라

페르시아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이란의 조상들이 세운 나라였습니다. 이 나라가 엄청 큰 제국이었습니다. 당시 근동세계, 이집트, 아프리카 일부, 인도일부, 그리스 일부까지 다스리던 나라였습니다. 에스더 이야기는 이 거대한 나라의 왕궁에서 시작됩니다.

 

이 나라의 왕이 있었습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황제에 가까운 높은 왕이었습니다. 이 왕의 이름은 아하수에로였습니다. ‘크세르크세스’왕으로 유명한데, 혹시 예전에 영화 300 기억하시나요? 거기에서 나는 관대하다. 했던 왕이 있는데, 바로 그 왕입니다.

 

이 왕이 즉위한지 3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이 왕이 장군들과 귀족들과 지방관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무려 여섯 달동안 진행되는 잔치였습니다. 우리 회사에서 하루저녁만 회식을 해도 적지않은 비용이 들텐데, 무려 여섯달 동안 산해진미를 쌓아놓고 매일 먹고 마시며 즐기는 잔치를 여니 그 비용이 엄청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잔치를 벌였던 것일까요? 바로 이 제국의 왕으로서 자신의 능력과 권세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대한 건축물이나 엄청난 부유함을 보면 누구나 위축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진 사람을 보면 자연스럽게 우러러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은 참 큰 사람입니다. 그런데 보통사람들은 사실 위축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화감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쫄린다, 경상도 말로 쪼린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권력자들은 이러한 사람의 마음을 잘 알고 이용하는 사람들입니다. 대대로 권력자들은 높고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을 좋아했습니다. 많은 군대를 보여주면서 과시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크고 화려한 잔치를 열어 사람들에게 자신이 이렇게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공산당이 다스리는 국가들은 하나같이 건물들이 웅장합니다. 국가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북한 카드섹션 하는 걸 보면, 거의 영화같습니다. 다 권력자의 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참 잔치에 참여하다보면, 아 우리 황제의 힘이 대단하구나, 내가 우러르고 충성할 만한 사람이구나, 앞으로 이분에게 잘보여야겠구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생각을 새기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무려 6달동안의 잔치를 끝낸 뒤에 일주일동안 추가로 잔치를 벌였습니다. 앞서 6달은 권력자들을 위한 잔치였다면, 이 일주일은 모든 백성들을 위하여 벌인 잔치였습니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먹고 마실 수 있는 잔치였습니다. 앞선 잔치가 핵심 권력층의 충성을 다짐하는 잔치였다면, 이 잔치는 많은 백성들의 민심을 얻기위한 잔치였습니다. 왕은 왕궁 후원 뜰을 멋지게 장식하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아름다운 것들로 온통 치장하였습니다. (6절, 7절 – 백, 녹, 청색 휘장 + 자색 베 줄 + 은색 고리 _ 금과 은으로 만든 걸상 + 화반석, 백석, 운모석, 흑석 바닥 + 다양한 모양의 금잔) 그러고선 평소에 법에 따라 마음껏 마시지 못했던 술도 마음껏 마시게 하였습니다. 휘황 찬란한 곳에서 마음을 풀고 먹고 마시게 함으로 왕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높인 것입니다. 마음 얻는 데에는 밥사는 것만한게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들 속에 함정이 있습니다. 더 좋은 것, 더 화려한 것, 더 높은 것들을 보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이 웃자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웃자라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제가 지난 여름에 농촌에서 대학생들과 함께 농촌봉사 및 지역선교를 했었습니다. 여러교회에서 진행했기 때문에 부지런히 차를 타고 왔다갔다 해야했습니다. 그런데 농촌 지역에서 운전을 할때마다 어려운점이 있었는데, 밤이 되면 칠흑같이 어두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가로등이 없어서 어두운 게 아니라 일부러 꺼놓고 있어서 어두운 것이었습니다. 농작물들이 웃자라지 말라고 등을 꺼놓은 것이었습니다. 빛이 없으면 작물이 자라지 못합니다. 그런데 밤에도 빛을 계속 받으면 작물이 과도하게 자라서 정작 맺어야할 열매는 부실하게 맺고 맙니다. 그래서 다들 깜깜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욕망도 이와 같습니다. 사람이 욕망이 없으면 살수가 없습니다. 식욕, 수면욕, 성욕, 물질욕 다 적절하게 필요한 욕망입니다. 이러한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을 유지할 수가 있고, 나아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찾는 길에도 욕망이 필요합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에도 우리 안에 거룩한 욕망, 곧 소원을 두고 일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잘못된 빛, 잘못된 자극에 계속 반응하게 되면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욕심을 점점 더 자라나게 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늘 더 좋은 것, 더 화려한 것, 더 달콤한 것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고, 이러한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잘못된 방향으로 웃자라게 됩니다. 갈증이 날 때 바닷물을 마시면 더 목마른 것처럼 마음을 빼앗기면 빼앗길수록 이러한 것들이 더욱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우리의 욕심은 자라는 데, 점점 더 채워지기는커녕, 더 목마른 상태가 되는 것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빼앗겨 가는 상태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이 웃자라게 되면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는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허영입니다. 마음이 부풀어 올라서 자기를 계속해서 드러내려고만합니다. 자연스럽게 거짓자랑이 많아지고, 허세가 높아집니다. 둘째는 교만과 열등감입니다. 내가 조금이라도 잘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자랑하지 않고는 견딜수 없어지고, 조금이라도 부족한 것들이 있다면 열등감과 질투에 붙들려 살아갑니다. 셋째는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더 많은 것을 갖지 못해서 불안해하고, 가진것들을 빼앗길까봐 두려워합니다. 넷째는 우상숭배입니다. 결국 나의 욕망 그 자체가 우상이 되어, 그 욕망 속에서 허덕이게 됩니다.

 

우리의 원수는 우리의 이러한 마음을 이용합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그랬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세상 산해진미와 화려한 장식들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빼앗았습니다. 그들의 욕심을 자극함으로 충성을 이끌어내었고, 그들을 배불리 먹임으로 그들을 노예 삼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잠언 4장 23절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요한1서 2장 15, 1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야고보서 1장 1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런데 무서운 것은 아하수에로 왕 역시 자기가 만든 그 함정에 스스로 빠져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준 뒤에, 왕이 진짜 자랑하고 싶은 것이 하나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름다운 자기의 왕비 와스디였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잔뜩 취한 후에, 내시 7명을 보내어 왕비에게 나올 것을 청하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아내를 자기의 소유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가장 귀한 보물을 친구들에게 자랑하듯이 자기 아내를 자랑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는 술에 취해, 자기 권력에 취해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아내를 사람들에게 전시하려고 하였습니다. 가장 사랑해야할 사람을 가장 도구처럼 활용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욕심이 취하면 무엇이든 도구화합니다. 모든 사람을 도구화합니다. 모든 자연 또한 도구화합니다. 자신 또한 도구화 합니다. 하나님도 도구화 합니다. 아하수에로는 이러한 함정에 빠져버렸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착각, 자기가 하나님과 같이 높아졌다는 착각에 빠졌습니다. 가장 무서운 욕심인 자기 우상화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왕후 와스디가 그것을 거절한 것입니다. 왕후는 왕이 자신을 그런식으로 대우하는 것이 불편했을 것입니다. 자신을 물건 대하듯 처리하는 왕의 태도는 인격적인 교제가 전혀 없는 무례한 태도였던 것입니다. 자신이 왕의 명령을 거절했을 때 어떠한 결과를 맞이할지 분명히 알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왕후는 왕의 명령을 거절했습니다. 왕비를 데리러 간 내시들이 그냥 돌아오자 왕은 진노하였습니다. 술까지 취했으니 아마도 대노하였을 것입니다. 성경은 마음 속이 불 붙는 듯 하였다라고 표현합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과시하는 자리,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던 아하수에로 왕이 결국 자기와 가장 가까이에 있어야할 아내 한사람의 마음도 움직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욕망의 끝은 관계의 파괴입니다. 욕심이 누군가를 도구화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마이더스의 손이라고 잘 알려진 신화가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매우 탐욕스러웠던 미다스 왕은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더 많은 부귀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술(酒)의 신 디오니소스에게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디오니소스는 소원을 들어주었고, 미다스는 정원수, 조각물, 가구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황금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만지기만 하면 황금이 되니 도대체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상심한 그는 무심코 자기 딸을 안았다가 기겁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금 조각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미다스는 디오니소스에게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달라고 간청했으며, 다오니소스의 선심으로 미다스는 팍톨로스 강물에 목욕함으로써 원래의 미다스로 회귀할 수 있었습니다. 욕심에 빠진 사람이 모든 것을 돈으로 바꾸고 싶어할 때, 그 사람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욕망의 끝자락에서 아하수에로는 자신의 죄악을 드러내고 말았고, 결국 아내와의 관계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이 때에 왕은 당연히 왕후 와스다를 찾아봐야 했습니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직접 찾아가 이야기를 해서 푸는 게 정상일 것입니다. 그런데 왕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내와의 관계보다 왕의 권위와 위엄이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왕은 오직 아내가 자신의 명령을 거역하고, 자신의 체면을 깎았다는 사실에만 주목했습니다. 왕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엉뚱하게도 사례를 아는 현자, 자신의 신하들에게 이 문제를 물어보았습니다. 신하들은 이 문제를 비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문제를 단순한 불출석 문제나 왕과 왕후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나라의 남편과 아내의 문제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신하들은 교묘했습니다. 이 사건을 왕후가 왕을 무시한 문제로 두면 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질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남성과 여성의 보편적 관계 문제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왕후를 처리하는 것을 통해 오히려 왕이 고작 자기의 권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남성의 권위를 높여주는 일을 하였다고 사건을 프레이밍한 것입니다. 당사자간의 문제를 통치의 문제로 바꿈으로서 왕의 권위를 회복하고, 오히려 왕을 높이는 분위기로 몰아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에스더 1장의 이야기를 보면서 먼저 저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더불어 이 말씀은 우리교회에 하시는 말씀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잔치를 벌이고 싶은 마음을 내려 놓아라’는 것입니다. 아하수에로의 잔치는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잔치였습니다. 요한1서에 나오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자극하는 잔치였습니다. 욕심을 자극하고, 욕망을 자극하는 장치였습니다. 이러한 잔치, 세상의 것으로 가득 채우는 잔치를 열고 싶은 마음이 목회자 안에, 또 우리 교회안에 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교회 안에 그런 잔치적 요소는 무엇일까요? 하나님 없이 하는 모든 것, 예수 그리스도에 속하지 않는 모든 것,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는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목사는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 목회 기술이나 방법에만 집중합니다. 프로그램을 찾고, 여러 가지 종교적 장치들에 주목합니다. 심지어 예배와 말씀, 기도를 드리는 것 조차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자신의 목회 성공과 교회의 성장에만 향해있을때가 있습니다. 성도들에게는 어떤 잔치가 있을 수 있을까요? 교회의 이름을 자랑하고, 교회의 규모를 자랑하고, 교회 시스템과 교회 구성원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교회 조직을 더욱 우리 눈에 보이기 좋기에만 힘쓰는 것, 좀 더 그럴듯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것 이러한 것들이 모두 ‘잔치를 벌여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으려는 것’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잔치를 벌이려는 것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보혜사, 중보자, 인도자이신 성령님만을 주목하고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핵심이라면 모든 것은 우리를 풍성하게 하는 것이 될 것이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에서 소외된다면, 우리 안에 인간적인 마음이 먼저 들어선다면, 모든 것이 죄의 길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랑하는 이를 수단으로 삼지 말아라’는 것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자기의 아내를 자랑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랑하고 싶었던 것은 아내와의 사랑의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내의 겉모습을 자랑하고 싶어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인격으로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은 아내를 자기의 장식품, 자기의 자랑거리 정도로만 여겼습니다. 여기에 왕의 치명적인 실수가 담겨있습니다. 왕은 아내를 자기 물건처럼 여긴 것입니다. 이 아하수에로 왕을 보면서 우리 교회가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깊이 깨닫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먼저 제가 우리 성도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말씀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한 성도, 한 성도를 절대로 내 목회를 위한 도구로 삼지 말아라, 그들을 존재 그 자체로 존중하고 사랑하고 섬길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만일 제 마음 속에 아 저 성도는 부자 성도니깐 헌금을 많이 내겠지, 아 저 성도는 일을 잘하니깐 교회에 도움이 될거야, 아 저 성도는 전도를 잘하니깐 교회에 꼭 필요하겠다. 아 저 성도는 젊으니깐 오랫동안 교회에 도움이 되겠지, 이러한 생각이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먼저 드는 순간, 제 목회는 그 순간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큰 죄악이 될 것입니다. 목회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장 교묘한 방식으로 제 욕망을 채우는 일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늘 목사의 자랑이고, 면류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안에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 복음을 드러내는 빛과 소금으로서의 자랑이요, 면류관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가장 추악한 모습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목회자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수단으로 삼는 세상의 방식을 단호히 거절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 누군가를 만나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이익을 내어주면서까지 서로를 사랑하는 곳입니다. 우리 새벽교회는 늘 서로 사랑하되 있는 모습 그대로를 가장 귀한 존재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자기 죄악을 합리화하는 목소리를 경계하라’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왕비를 불렀을 때, 왕비가 나타나지 않은 것은 당시 문화를 보았을 때 분명히 아내의 잘못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아내의 잘못 이전에 왕 스스로 역시 자신의 잘못을 되돌아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내와의 망가진 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자신의 감정에만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다독여줄 신하들을 불렀습니다. 신하들은 왕의 의도에 맞추어 모든 잘못을 왕비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리고 왕비를 처벌하는 일이 얼마나 훌륭한 일인지를 설명해내었습니다. 왕비는 남편을 모독한 것이기 때문에, 왕비를 처벌하는 것은 모든 남편을 세우는 훌륭한 일이라고 치켜세운 것입니다. 왕은 실수한 왕이 아니라 모든 남편의 권위를 세워주는 훌륭한 왕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있을 때 우리는 서로간의 친밀한 관계 안에서 자칫 큰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죄악을 합리화해주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이민사회라는 어려운 환경에서는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으로 인해 죄를 합리화할 상황이 더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특별히 저는 목회자로서 그러한 위험을 더욱 크게 느낍니다. 저의 교만함, 저의 연약함, 저의 부족함이 매순간 어려운 환경에 의해 합리화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우리는 그러나 그러한 함점에 빠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보여줄 때에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서로가 서로를 더욱 사랑하고, 예수님 따라 먼저 바른길의 모법을 보여주고, 예수님 안에서 서로 용납하고 품어줄 때 우리는 우리의 죄악의 사슬에서 이겨내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하수에로가 아내를 품어주었다면, 오히려 자기의 잘못을 깊이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죄를 합리화하지 않되, 죄를 정죄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비추어주는 것, 그것이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힘써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