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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14-26 (2017.01.26. 아침묵상)

category 묵상/마태복음 2017. 1. 26. 14:58

<말씀>

마태복음 9장

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19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20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23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24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25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26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나눔 1>

1. 오늘 말씀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의 금식에 관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 혈루병 여인의 치유, 죽은 아이를 살리심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둘로 정리할 수 있는 데, 예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의 구체적인 예로서 보여주는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 거룩한 삶이란 금식하며 기도하는 삶 아닙니까? 우리도 금식하고, 바리새인들도 금식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습니까? 너무 자유분방한 것은 아닙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따르는 이들의 당연한 의무라 생각되었던 금식을 하지 않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의심스러웠던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해석을 넣어서 나누어보겠습니다. “결혼식 잔치에 왔다고 하자. 그곳에 그날 결혼한 신랑을 만난다면 어떻겠느냐? 당연히 기뻐하지 않겠느냐? (거꾸로 이 신랑이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사라진다면 그때에는 큰 슬픔에 잠기겠지) 지금은 슬퍼하고 근심해야 할 때가 아니라 기뻐해야 할 때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새로 만든 술은 새로운 가죽 부대에 넣어야 한다. 오래된 가죽 부대에 넣으면 새술이 발효되면서 터지기 때문이다. 지금 너희는 옛 방식으로 거룩을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방식의 거룩한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거룩은 금식과 같은 인간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거룩은 (하나님이신) 나와 함께 있는 것이다”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4.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금식은 그 방법의 대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왔을 때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방식인 ‘금식’에만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5.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두 가지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혈루병 걸린 여인을 고쳐주신 기적과 죽은 아이를 살리는 기적이었습니다. 이 두 기적에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나시고, 대화하시고, 만져주신 이들이 모두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이들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혈이 그치지 않는 여인, 시체가 되어버린 아이는 모두 만져서는 안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은 친히 고쳐주신 것입니다. 


6. 이 기적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율법에서는 거룩한 사람이 부정한 것을 만지면 부정해진다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정한 것을 만지자 오히려 생명이 드러나고 회복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곧 거룩의 원천이시오, 거룩 그 자체인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빛이 어둠을 이기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7.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거룩해지기 위해서 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거룩해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는 질문입니다.


8. 거룩함은 곧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궁궐은 화려한 건물이나 웅장한 성을 가진 건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왕이 거처하는 곳이 곧 궁궐입니다. 삼간초가도 그곳에 왕이 있으면 궁궐이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거룩한 삶이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 수많은 노력들을 해내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우리를 거룩하게 할 이를 모시는 삶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물론 왕이 사는 거처를 왕의 격에 맞게 아름답게 짓는 것처럼, 우리 안에 예수님을 모신다면 그 격에 맞게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시고자 하십니다.


9. 예수님을 모시는 삶은 기꺼이 연약하고 죽어가는 이들에게 찾아가서 살피고, 만져주고, 그들과 같은 입장이 되어주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을 섬겨주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거룩함을 지키고자 몸을 사렸습니다. 거룩하지 못한 곳, 거룩하지 못한 사람, 거룩하지 못한 시간, 거룩하지 못한 것들을 최대한 피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바로 빛과 소금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정한 것을 만졌을 때 그것이 새로워졌던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살아간다면 우리가 세상 어느 곳에 있던지 그곳이 우리를 통해 생명을 얻고 변화될 것입니다. 


10. 명절입니다. 많은 가족을 만나고, 많은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유대인들이 했던 것처럼 자기와 다른 이들을 구분 짓고 자기를 보호하려는 데 급급하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예수님께서 하셨던 방법처럼 자기를 낮추고 다른 이들을 섬기며 마음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대사(大使)입니다.


<나눔 2>

1. 오늘 말씀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의 금식에 관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 혈루병 여인의 치유, 죽은 아이를 살리심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둘로 정리할 수 있는 데, 예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의 구체적인 예로서 보여주는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 거룩한 삶이란 금식하며 기도하는 삶 아닙니까? 우리도 금식하고, 바리새인들도 금식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습니까? 너무 자유분방한 것은 아닙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따르는 이들의 당연한 의무라 생각되었던 금식을 하지 않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의심스러웠던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해석을 넣어서 나누어보겠습니다. “결혼식 잔치에 왔다고 하자. 그곳에 그날 결혼한 신랑을 만난다면 어떻겠느냐? 당연히 기뻐하지 않겠느냐? (거꾸로 이 신랑이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사라진다면 그때에는 큰 슬픔에 잠기겠지) 지금은 슬퍼하고 근심해야 할 때가 아니라 기뻐해야 할 때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새로 만든 술은 새로운 가죽부대에 넣어야 한다. 오래된 가죽부대에 넣으면 새술이 발효되면서 터지기 때문이다. 지금 너희는 옛 방식으로 거룩을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방식의 거룩한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거룩은 금식과 같은 인간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거룩은 (하나님이신) 나와 함께 있는 것이다”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4. 유대인들은 열심히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율법의 참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이 하나님 사랑과 은혜의 관계 안에서 지켜야 할 법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이요, 규칙은 그 다음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에만 집중하고, 정작 중요한 하나님과의 관계는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정말 정성껏 율법을 지켰지만, 그 형식에만 집중했을 뿐 그 사랑은 없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유대인들의 문제일 뿐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5.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들의 한계를 해결하시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인간들을 만나주셨습니다. 요한복음(1장)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율법의 형식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에게 율법의 온전한 정신, 곧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6. 그리하여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온전히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과 노력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거룩함이란 우리가 애써서 얻는 것이 아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거룩함이란 우리에게 다가오신 하나님, 곧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7.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러한 가르침이 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두 가지 기적을 연이어 보여주셨습니다. 혈루병(자궁에서 피가 계속 흐르는 병)에 걸린 여인과 죽은 아이를 살리는 기적이었습니다. 


8.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는 최대한 부정한 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여야 했습니다. 하나님에 속하기 위해서, 하나님에 속하지 않다고 가르치는 것을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해야할 것과 하지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고, 만나야 할 이들과 만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고, 있어야 할 곳과 있지 말아야 할 곳을 구분하고, 만져도 되는 것과 만져서는 안되는 것을 구분했습니다. 그들은 거룩해지기 위해 구분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습니다. 정작 도움이 필요한 병자나 약자, 소외된 곳을 외면하며 살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9. 예수님께서는 거침없이 그들에게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만지시고, 고치시고, 살리셨습니다. 거룩한 분이신 예수님께서 부정한 병에 걸린 여인을 만지자 부정한 병이 사라졌고, 부정하다고 여겨지던 죽은 아이의 시체를 만지자 아이가 다시 새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기에, 예수님께서 가는 모든 곳이 거룩한 곳이고, 거룩한 시간이요, 거룩한 삶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의 능력이 드러났습니다.


10.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우리의 삶은 전적으로 새로워졌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거룩함이요 능력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우리 마음 가운데 모실 때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 거룩한 삶, 공의의 삶, 생명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는 곳마다 이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람을 살리고 사회를 변화시키며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신뢰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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