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5장 13-18절
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 지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여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 즉 삼년 육개월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18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교회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이 곳에 모였을까요? 오늘날 교회는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을까요? 사람들은 우리 교회를 무엇이라 하나요? 추석 명절 간 나이가 제법 있는 지인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교회를 자기들만 아는 이기적인 집단이라고 일갈하였습니다. 교회에서 떠드는 사랑이란 자기들끼리 모여서 자기들끼리 챙겨주는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철처히 협소한 사랑을 하는 사이비 집단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자기 중심적이라 하였습니다. 교회는 자신의 배만 불리고, 자신의 세만 확장하고, 자신들끼리만 섬기는 사랑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평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저는 그 앞에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속으로 반은 맞고 반을 틀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가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은 맞다고 생각하였고, 자기들끼리만 사랑한다는 점에서 반은 틀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교회는 자기들끼리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아니 한국교회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 줄 아시오? 한국교회가 섬기는 일을 그만둔다면 즉각 한국사회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르오. 세상 사람들의 이기적인 모습에 비한 다면 그나마 교인들은 낫다는 것을 모르시오? 하는 질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인분의 그 질문 앞에 그 질문에 대답하는 한국교회는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 저 먼 곳, 어디에선가 누군가를 섬기며 희생하는 그 분이 아니라 저였습니다. 자기 것을 다 내어주며 사랑하는 그 한국교회의 누군가가 아니라 저 자신이었습니다. 저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고, 가까이에 있는 내 형제, 내 자매, 내 성도님들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었습니다. 내가 한국교회라고 한다면 한국교회는 철저히 타락한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세상은 엄중히 우리에게 질문하게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타락하지 않았느냐? 한국교회에 사랑이 있느냐?이 대답은 멀리 한국교회의 누군가가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대답해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가 대답해야 합니다. 삼각교회가 대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타락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정말 사랑합니까?
오늘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우리가 우리를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고자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듣고자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저는 지인의 질문을 듣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교회만큼 사랑을 많이 이야기하는 곳이 없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예수님 닮기를 소망합니다. 매 순간 사랑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사랑이 없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왜 저는 사랑이 없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왜 우리 교회는 사랑이 없을 까요?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쉽게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평가는 냉정합니다. 세상과 다를바가 없다. 아니다. 교회가 세상보다 더 이기적이다.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어디에서부터 크게 오해하고 있었을까요?
사랑의 방식은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움켜쥐는 사랑과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움켜쥐는 사랑은 그 사랑의 주인공이 나입니다. 내어주는 사랑은 그 대상이 주인공입니다. 움켜쥐는 사랑은 나를 위해 그 대상이 필요합니다. 내어주는 사랑은 그 대상을 위해 나를 흔쾌히 주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움켜쥐는 사랑으로 기도와 예배를 드리고, 움켜쥐는 사랑으로 예수님을 믿고, 움켜쥐는 사랑으로 섬기는 모습을 가져왔습니다. 기도와 예배를 움켜쥐고 그것을 나를 위해 사용했습니다. 제가 아동부 전도사입니다. 우리 아동부 아이들은 어린이들입니다. 예배시간에 떠드는 경우가 존재합니다. 처음에 부임했을 때 아이들이 떠들자 제 마음속에는 화가 불같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을 생각해서 화를 낸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화는 아이들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화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움켜쥔 나의 예배를 망치는 것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움켜 쥡니다. 기도를 하며 늘어가는 기도 그 자체를 움켜쥡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기 보다 기도를 쌓아서 어떤 것을 이루려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움켜쥐어 사랑합니다. 누군가 자기 교회를 비판하면 불같이 화를 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를 사랑하는 것인지를 정말 생각해보면 ‘나의 교회’를 침범한 것에 대한 분노입니다. 언제나 그러한 움켜쥠 속에서는 타인을 비난하고 정죄합니다. 우리는 율법과 도덕도 움켜 쥡니다. 우리는 헌신도 움켜쥡니다. 헌신을 하는 그 순간에도 헌신을 나의 것으로 삼고, 내 이름을 높이고, 헌신을 자기 의로 삼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그 노력이 허사이며 애씀이 무너지는 것은 바로 우리가 움켜쥐는 사랑을 하기 때문입니다. 움켜쥐는 사랑 속에서는 언제나 불화가 일어나고, 언제나 교만이 자리잡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가리워집니다. 움켜쥐는 사랑을 했던 대표적인 사람들은 바리새인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가로막게 하는 결정적인 방해물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것이든 움켜쥔 그것이 우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사랑은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내어주는 사랑을 해야합니다. 내어주는 사랑의 대표적인 모습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우리가 내어주는 사랑을 할 때 어떤 고백을 하게 될까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셨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내어주는 사랑을 해야합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내어주는 사랑을 해야합니다. 나를 내려놓고 사랑해야합니다. 나를 떠나소서 하였던 죄인의 고백, 자기가 가진 향유를 깨어드렸던 여인의 고백, 모든 체면을 내려놓고 뽕나무에 올라갔던 삭개오의 고백, 두 데나리온을 드렸던 과부의 헌금에 담긴 고백,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고백하였던 십자가 강도의 고백. 우리가 해야만 하는, 그리고 우리가 간구해야 사랑은 바로 이 고백에 담긴 사랑입니다. 우리를 우리 스스로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빚진자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섬김, 우리가 하는 모든 찬양, 우리가 하는 모든 봉사, 우리가 하는 모든 사랑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다 고백하는 사랑 위에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은 무슨 사랑입니까?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자, 여자 앞에서 초라해집니다. 진심으로 사랑하면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부족함이 그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앞에서, 존재 앞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감격적인 자기비하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라고 말씀합니다. 더 이상 나를 살리지 말고, 나를 온전히 내려놓고 하나님을 받아들일 것을 선포합니다.
그렇다면 이 두 번째 사랑, 나를 내려놓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그것을 기도라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는 행동입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는 행동입니다. 또한 기도는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게 해주세요 간구하는 행위입니다. 기도는 끊임없이 나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기도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행위입니다. 기도는 이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과 연합하는 행위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그 사랑, 그 내려놓는 사랑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줍니다. 성령님이 기도를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와 만나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14절부터 16절까지를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 지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여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모든 사람들은 병에 걸립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병은 우리가 죽어간다는 사실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병은 죽음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 운명의 상징입니다. 기도의 순간에 이 병을 회복시켜주십니다. 생명의 하나님이 기도하는 순간 우리와 함께 하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병이 낫지 않는 다 하더라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것은 변함이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 그 자체가 희망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함을 받는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됨을 의미합니다. 이 생명의 회복,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하여 기도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는 방법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관계 속에서 드러남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병든자가 있을 때 우리가 기도를 통해 연합해야 한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교회의 장로들은 오늘날 장로님, 목회자를 포함한 교회의 지도자입니다. 교회의 장로들을 청함은 모든 교회가 아픈이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한 치유의 은사를 받은 이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가 함께 기도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치유의 은사를 통해 한 사람이 높아지는 것, 은사가 또 하나의 움켜쥐는 사랑이 되는 것을 거부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모두가 기도를 통해 서로를 사랑할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또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름은 당시의 치료제였습니다. 서로 자기의 것을 내어 치료에 도움을 주고, 또한 기도로서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을 하되 철저히 내어주는 사랑을 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이 기도 안에는 서로간의 죄 고백이 담겨있습니다. 나의 약점, 나의 부족함을 드러내고,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은 자로서의 고백이 담겨있어야 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도를 통해 철저히 하나님앞에서 내어주는 사랑을 해야 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통로입니다. 기도 안에는 하나님의 존재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생명이십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내어주는 사랑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 존재가 드러남을 허락하셨습니다. 치유와 회복, 구원, 사랑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더 이상 움켜주는 사랑이 아니라 내어주는 사랑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 사랑의 역사, 치유와 구원의 역사가 우리안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가 서로에게 깊은 내어주는 사랑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것입니다.
오늘 말씀 17절 1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 즉 삼년 육개월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18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인 엘리야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거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일은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우리 안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기도를 즐거움 가운데 찬양을 매순간 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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