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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고갱이 (2020.11.01. 주일 예배 설교)

마태복음 12장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성도 여러분들 중에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습니다. 연세대학교 신학과는 특별히 교단 안에 있는 신학교도 아니고, 특별히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해 세워진 신학교도 아니었기 때문에 학교의 분위기가 참 자유로웠습니다. 좋게 말씀드리면 자유롭게 여러 생각을 할 수 있는 분위기였고, 다르게 말씀드리면 신앙을 흔들 수 있는 다양한 생각들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그곳에서 공부를 하다보면, 내가 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갖게 됩니다. 종교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경험했던 신앙체험이 다른 종교에서도 비슷하게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성서학을 공부하면서 말씀을 그저 하나의 종교 문헌처럼 바라보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교회사를 공부하면서 수많은 잘못과 죄악들을 저질렀던 교회의 역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면서 우리의 믿음이 많은 부분 각 시대의 철학과 사상에 빚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기독교에는 특별한 것이 없는가, 내가 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가를 깊이 고민했던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느날, 장목사님께서 제게 와서, 하나님을 믿기가 어렵다고 했던 날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저는 우리의 신앙과 뿌리가 무엇으로부터 와야 하는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우리의 신앙은 ‘결국 이 땅에서 있었던 분명한 사건 – 예수님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과 ‘그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 사도들의 고백을 믿는 것’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놀라운 비밀이 감추어져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고갱이)

사실 우리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하나님을 느끼곤 합니다. 아름다운 자연(히말라야)을 보면서 경이로움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자녀들이 태어났을 때,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끼며 하나님을 느끼기도 합니다. 인생 속에서 굽이굽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끼기도 합니다. 어떤 신앙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예배 속에서, 말씀 속에서 어떤 감동을 느끼게 되게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느끼게 해주십니다. 신학은 이러한 것들을 ‘일반 계시’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러한 것들도 참 소중합니다. (그러나 신학을 공부하면서 이러한 경험들은 다른 종교에도 있다는 것을 배우고 혼란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분명한 길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학은 그것을 ‘특별계시’라 부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신앙의 핵심이요, 뿌리요, 중심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만일 당신은 왜 그리스도인이 되셨습니까 묻는다면, 그 답은 늘 예수님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꼭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예수님을 꼭 붙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놀라운 비밀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어떤 의미가 되는가,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보게 하는가? 예수님을 곱씹고 곱씹어 그 충만한 은혜로 들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 여정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것,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

오늘 말씀은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38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께서 여러 곳에서 기적을 베푸시고, 능력을 행하신다는 소식이 들리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중 몇 사람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주시길 원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가 진짜 메시아인지 궁금했고,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의심했기에 확실한 증거를 보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2000년전 살았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의 마음과 생각은 근본적인 면에서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표적을 바라며 신앙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살아계시다면 나에게 표적을 보여주십시오. 저에게 하나님을 느끼게 해주십시오, 제가 하는 이 일들이 잘 이루어지도록 도와주십시오. 제 인생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주십시오. 제 몸을 치료해주십시오. 주님 저희에게 표적을 보여주십시오. 이렇게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적을 바라는 우리의 기도는 틀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간절함을 담아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간절한 마음, 상한 마음, 갈망하는 마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리고 때때로 그 기도에 응답하시고, 때때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통해 우리에게 당신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십니다. 

금요일마다 룻기 말씀을 우리가 함께 나누는데, 룻기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가득합니다. 위로하시는 하나님,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도우시는 하나님, 변화시키시는 하나님, 예수님 닮게 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기사와 이적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표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우리의 신앙의 근본이 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예수님 자신입니다.

다같이 39~42절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우리 주님은 강하게 선포하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표적을 구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는 관심이 없고 그저 자기의 욕심을 위해 표적을 구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는 무관심한 채 오직 표적만을 바라보는 것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것을 악하고 음란하다고 표현하셨습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다른 사람을 찾는 것과 같은 일이라 비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표적보다 근본적인 것이 있음을 선포하십니다. 바로 우리 예수님, 그 분 자신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있을 그 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요나의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요나는 구약의 요나서에 나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게 회개를 선포하는 사람으로 요나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공격했던 원수의 나라, 앗수르의 수도였기에 요나는 그들이 회개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냥 회개하지 않고 멸망했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뜻을 거스르고 배를 타도 다른 지역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풍랑을 만났고, 요나는 바다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커다란 물고기가 요나를 집어 삼켰고, 사흘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건져지게 되었습니다. 요나는 마음을 돌려 니느웨에 회개를 선포하였고, 니느웨는 심판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요나 이야기를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었다가 살아난 것처럼, 자기 자신도 죽음 속에 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이야기를 듣고 회개한 것처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소식을 듣고 회개할 날이 다가옴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실 진짜 표적은 곧 십자가와 부활임을 우리에게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을 한 단계 더 깊은 곳으로 인도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주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용서 앞에서 우리 자신을 진지하게 살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그 용서가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용서와 용납 가운데 우리가 감히 헤아릴 수도 없는 깊은 사랑이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 18절 19절 말씀처럼 우리의 앎을 초월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얼마나 헤아릴 수 없이 큰지를 깨닫는 것, 로마서 8장 38장 39장 말씀처럼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도 끊을 수 없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 그리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영원한 사랑 안에서 우리는 죽음도 넘어서게 되었음을 믿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바라고 원했던 일들이 이루어지는 표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랍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크고 크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솔로몬의 지혜를 흠모하여 찾아왔던 에디오피아 여왕의 이야기를 하시며, 솔로몬보다 더 큰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지혜에 주목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일이 되면 교회에 나옵니다. 우리 중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는 무관심한 채 그저 교회 생활을 위하여, 관계를 위하여, 삶에 유익을 얻고자 교회에 나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 돌아가는 것은, 마치 중국집에 가서 음식은 안먹고 그저 앉아 있다가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을 진지하게 부르십니다. 이제 와서 그리스도인이 되어보지 않겠니? 그리스도를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의 풍성한 은혜를 누려보지 않겠니? 초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그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표적만을 바라며 교회에 나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다 듣고, 그 갈망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리고 일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더 중심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네가 너를 위해 준비한 것, 곧 예수님께 더 집중해보지 않겠니? 십자가와 부활의 풍성한 은혜와 사랑 가운데 들어와보지 않겠니? 주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주님의 표적만을 바라보는 신앙은, 마치 중국집에 와서 단무지만 먹고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진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주님은 끝으로 귀신이야기를 하시며 오늘 말씀을 마치셨습니다. 43절에서 45절 말씀입니다. 다같이 봉독하겠습니다.

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치료에는 응급처치가 있고, 근본적인 치료가 있습니다. 삶의 문제들과 고민들에 대한 치료에도 응급처치가 있고, 근본적인 치료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찾아와 응급처치만 받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잠시잠깐 위로를 받고 돌아갑니다. 재정적인 어려움과 삶의 고난 속에서 주님의 도우심을 받고 돌아갑니다. 삶의 중요한 문제들이 있을 때 주님께 매달렸다가 다시 상황이 좋아지면 느슨해집니다. 주님의 표적에 의존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표적에 의존하는 신앙생활은 그저 응급처치에 불과하다고 말씀을 오늘 귀신 비유를 통해 설명하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을 사로잡고 있던 귀신이 하나님의 표적을 통해 쫓겨났다. 그런데 그 귀신은 광야를 다니며 자기가 새롭게 사로잡을 사람이 있는지를 찾아보다가 결국 찾지 못하였다. 그러자 그 귀신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다시 예전 그 사람에게 돌아가보자 하여 와 보니, 그 귀신이 살던 그 사람의 집이 훨씬 더 나아졌음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그 귀신은 이참에 자기 동료 귀신 일곱을 데리고 다시 들어갔고, 그 사람의 형편은 훨씬 심각해지게 되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힘입어서 내 삶을 개선해 보려는 노력들을 했다가 실패한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우리의 신앙이 무너지고, 우리의 삶이 더 엉망이 된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상황을 귀신 이야기를 통해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은 표적이나 이적, 체험이나 경험, 지식이나 의지로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께 주목할 때, 예수님께 집중할 때, 예수님께 붙들려 있을 때 나아질 수 있습니다. 그분의 용서하심을 바라보며 회개하는 삶을 살 때, 그분의 사랑을 바라보며 그 사랑으로 나를 채워 나갈 때, 그 분의 부활 생명을 바라보며 참 소망을 붙들 때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 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예수, 예수님께 더욱 나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 되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