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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2011.08.28)

category 주일 설교 2011. 8. 28. 16:07
로마서 12장 15절
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 기쁜 일에는 혹 빠질 수 있어도 슬픈 일, 어려운 일에는 반드시 함께해야 한다. 유명한 말들입니다. 이 말들은 모두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말해주는 말들입니다. 우리는 기쁜 일을 함께 기뻐해주는 친구를 좋아하기 마련입니다. 제가 부모님이나 어른들을 뵈면 제 자식 자랑할 때 함께 즐거워해주는 친구를 그렇게 좋아하셨습니다. 내가 정말로 기쁠 때 진심으로 함께 기뻐해주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인지상정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봅니다. 정말로 힘든 일, 슬픈 , 어려운 일을 겪고 있을 때 그것을 함께 슬퍼해주고 아파해주면 그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그 고통 속에서 손 한 번 잡아주고, 함께 울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그 마음에 우리는 감동을 받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한 평생 살다보면 기쁜 , 슬픈 , 화나는 , 즐거운 , 어려운 일, 힘든 일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때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이것은 비단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뿐 아니라 모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 부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마땅히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필요한 일, 그리고 누구나 해야 할 일, 그 공감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말씀을 듣고 받아드릴 때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말씀은 언제나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음을 기억하고 이 말씀을 받아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속담과 같이 단순히 교훈을 전하는 수준이라면 이 말씀은 우리의 생명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이 말씀을 받아드리는 방식을 넘어서서 그 뒤에 감추어진 훨씬 더 중요한 이야기를 더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구원을 받은 우리가 회복해야 할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의 삶은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셨던 삶처럼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는 가, 곧 성화된 삶인가를 오늘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말씀은 함께 우는 삶이 예수님 닮은 삶이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함께 우는 삶, 곧 공감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의 가장 적극적인 표현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순간도 우리에게 눈을 떼시지 않으시고, 또한 한순간도 우리에게서 관심을 끊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신 적이 없습니다.

 

창세기 32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창세기 3:21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아담은 죄를 지었습니다. 하와도 죄를 지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나뭇가지가 뿌리에서 잘라져서는, 살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죽이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졌기 때문에 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제 죽어가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죽어가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따뜻한 가죽옷을 해 입히신 것입니다. 죽어가는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고통에 함께 슬퍼하셨던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아버지의 그 사랑하는 마음이 가죽옷에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모습은 우리 조상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하나님이 누구신지 도무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때도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치료해주시고, 보호해주셨습니다. 그것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져있었던 그 순간에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가죽옷을 입히신 것입니다.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두를 위해서 여전히 햇살을 비추어 주시고, 모두를 위해서 공기를 주시고, 모두를 위해서 여전히 생명을 주시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곧 가죽옷입니다. 하나님의 가죽옷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223~25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언약을 기억하사 돌보시고 그들을 기억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의 학대 속에서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을 들으시고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그 고통을 들으심이 바로 하나님이 인도해 가시는 출애굽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눈물 속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나아가서는 그 아브라함 언약의 뿌리인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기억하셨습니다. 다시 고통 속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의 형상과 복을 이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뿌리는 함께 슬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출애굽은 또한 오늘 우리의 사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 울부짖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어디계십니까? 내가 이렇게 힘든데 당신은 무엇을 하시고 계십니까? 당신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이러한 일들이 내게 이렇게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고통을 내가 듣고 있다. 그리고 내가 그 구원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다. 그 하나님의 들으심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시고 계심이 얼마나 큰 다행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기뻐하시고, 우리와 함께 울고 계시며 우리의 고통을 듣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눈물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가장 잘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슬픔과 고통과 탄식 속에서 함께 우시는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눈물은 곧 예수님의 눈물이 되었습니다.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3번 우셨습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맞이한 친구 나사로를 보시고 우셨습니다. 친구가 맞이한 죽음.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떠난 우리 모두가 맞이해야할 죽음을 보시고 우신 것입니. 죽어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 곧 우리와 함께 울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멸망하는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습니다. 우리의 멸망, 우리의 고통, 우리의 죄를 보시고 한탄하시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우신 것입니.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시며 우셨습니다. 결국 이 울음은 주님의 십자가로 이어졌습니다. 슬퍼하는 자 곧 우리들과 함께 우시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그 울음의 끝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함께하심. 그 공감의 끝. 그 사랑의 끝은 십자가의 구원사건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32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위하여 올라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그리고 못 박히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 이에 3)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그 사랑. 그 공감의 끝은 십자가를 향해 오르던 길에도 우리를 위하여 그 온 마음을 다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 죽음의 순간에 우리를 용서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이었습니. 슬퍼하는 자들을 위하여 함께 울라. 그분은 그렇게 십자가로 함께 울고, 십자가로 용서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히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의 눈물, 그 사랑은 그렇게 우리에게 표현되었습니다. 함께 하심은 곧 주님의 죽으심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 죽으심은 그분이 얼마나 가슴 깊은 곳에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계신지에 대해서 보여주셨습니다.

 

다시 말씀을 묵상합니다.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울라. 이 말씀은 오로지 하나님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절절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기뻐하시고 우리와 함께 우시는 분이십니다. 목숨을 다하여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위해 핏값으로 사랑해주시는 분이십니다. 말씀을 보면 볼수록, 예수님의 복음을 알면 알수록, 주님과 함께 신앙생활하면 할수록 그 사랑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납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주님과 함께 이 땅을 살아가면서 우리 하나님의 마음으로 우리 이웃과 함께 기뻐하고 울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 윤동주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오늘도 슬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도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윤동주처럼 그리고 예수님처럼 우리 또한 그 모든 아픔에 함께 울며, 함께 아파해주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시인은 그것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삶이 아닐까 고백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그 하나님의 사랑을 하는 우리가 그 뜻대로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시인은 하나님의 마음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생명을 사랑해야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나에게 스치는 삶 그것이 우리의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 주 사랑하는 제 친구의 아내가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저는 그 친구에서 해 줄 수 있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내가 그 친구와 함께 울어줄 수 만 있다면 그 친구를 그것보다 사랑해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크게 한국사회의 문제, 한국 교회의 문제까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 이곳에 모인 저를 포함한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함께 울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정신은 그렇게 함께 울어주는 것으로 오롯이 드러났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 윤동주의 시에서도 오롯이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오늘 무엇을 위해서 울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주신 생명. 그 생명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부름 받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이 평생 우리의 마음을 치는 북소리가 되길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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