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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7장 18절 ~ 28절

18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19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20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21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22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 함이었더라 
23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24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25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낙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26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27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28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젊은 청년이 여행 중에 한 어촌마을에 들렸습니다. 마을을 구경하던 중 마을의 촌장 노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촌장의 허름한 차림새에 우월한 마음이 든 청년은 이 노인을 골탕먹여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어르신, 어르신은 평생 이 마을에서 어부만 하면서 지냈는지요?

그렇지. 난 이 곳에서 50년이 넘게 어부를 하면서 지내왔어.

어르신 그렇다면 어르신이 어부를 하면서 다녀온 바다의 끝은 어디신지요?

내가 다녀온 것은 그리 멀지 않아. 고작 하룻나절이면 다녀올 수 있는 곳들이지.
난 이 곳을 떠나지 않고 평생을 보냈다네

그렇다면 어르신은 바다에 대해서 저보다 잘 안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을까요? 저는 지난 3년간 세계 각지의 바다를 다 구경하고 왔으니까요. 어르신의 평생동안 할 일을 전 빠른기간내에 다 해치웠지요.

허허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말이네. 젊은이. 난 바다의 껍데기는 조금밖에 모를지 몰라도, 저 녀석이 무엇을 담고 있는 지는 누구보다 잘 안다네. 자네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 훤히 보이는 것처럼 말일세.. 허허

바다를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각지의 바다의 표면을 수없이 본다고 해서 그 바다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바닷가를 가거나 배를 타면서 보는 바다를 통해서 우리가 그 바다가 무엇인가를 다 알 수 있을까요? 이 노인은 바다를 안다고 어쭙잖게 지식을 뽐내는 젊은이를 비웃고 말았습니다. 바다는 겉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다의 깊이는 밖에서 보는 것으로 측량할 수 없고, 바다 속의 신비함은 그 속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매 순간 변하는 조류와 파도의 흐름은 그것을 온몸으로 겪어낸 사람만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바다가 담고 있는 것은 그 깊이 속으로 깊이 들어간 이만이 알 수 있는 것 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매우 유명한 말씀입니다. 요셉이 팔려가는 장면입니다.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니셨던 분은 수십 번도 넘게 들었을 말씀입니다. 아마 이 말씀을 통해 나올 수 있는 교훈정도는 달달달 외우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혹시 이 젊은이와 같이 말씀의 겉모습만을 매번 반복하여 들으며 내가 이 모든 것을 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말씀과 구원의 그 깊이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말씀을 어떻게 읽는 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성서를 우리가 원하는 성취의 도구로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요셉은 전형적인 고생 후 성공을 이룬 케이스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렸지만, 그 신앙을 잘 지켰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쓰셔서 성공을 이루었다가 주로 하는 해석방법입니다. 그 성취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만 하는 가는 각각의 시선에 따라 달라집니다. 주로 꿈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보디발의 아내를 떠났던 것처럼 죄를 떠나야 한다. 등등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 결과가 ‘성공’이라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말씀을 그렇게 바라봅니다. 그래서 그것에 맞는 말씀을 좋아하고 그런 말씀에서만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완전한 개혁을 이루었던 요시아 왕이 이방인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한 이야기나 욥과 같은 의인의 고난의 문제는 외면합니다.

두 번째 읽는 방식을 성서를 ‘율법’으로만 받아드리는 경우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끊임없이 삶을 채찍질합니다. 반드시 어떻게 살면 안된다. 반드시 어떻게 살아야 한다.하는 율법조항으로만 생각합니다. 말씀을 일종의 강박처럼 받아드립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이 멍에가 됩니다. 저도 어린 시절 성경을 읽기가 부담스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도대체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왜 이렇게 많이 나오는 지, 자유롭게 살고 싶었던 저는 그 이야기들이 굉장히 버겁게 느껴졌습니다. 마치 그대로 살지 않으면 죽어서 불구덩이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고통을 당하며 살게 되진 않을 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렇게 사는 것이 옳다 라고 생각하는 것만 잔뜩 쌓여가게 되었고, 그것은 고스란히 남을 정죄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말씀을 율법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은 말씀을 이용해 자신과 타인을 정죄하는데 급급합니다.

두 가지 방법은 모두 성경을 읽는 주인공이 바로 ‘나’입니다. 말씀을 읽는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자기만 보고 있습니다. 이 방법에서 나의 성취, 나의 의가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어떻게 하면 정답이 없는 이 세상에서 말씀 안에서 정답을 끄집어낼까에 대한 발버둥입니다. 말씀 속에서 나의 해답을 찾아내려 하다보면 이런 방법을 사용하게 됩니다. 성경은 성취를 위한 자기계발서도 아니고, 완벽한 정치, 경제, 사회체제를 이루어낼 법전도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담겨진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는 말씀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세 번째 방식은 말씀 속에서 이어져오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는 방식입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어떻게 드러내고 계신지.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 방식으로 표현되었는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오늘 우리에게 임하게 되었는지를 그 결을 따라 읽는 것입니다. 각각의 사건 이면에 하나님의 존재를 목도하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말씀 안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을 보는 방식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말씀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의 주인공이 빠진 상태에서 말씀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모든 사건 뒤에서 면면히 흘러져 오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가 눈을 떠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세 번째입니다.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말씀을 배움으로서 어떤 성취를 이루어 낼 수도 있고, 어떤 율법을 지킬 수 있지만, 이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요셉의 삶을 지켜보면, 그 또한 성숙해가면서 첫 번째, 두 번째 시선에서 세 번째 시선으로 그 깊이가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장면은 요셉이 형들에 의해서 팔려가는 장면입니다. 그가 팔려가게 된 계기는 형들과의 심각한 불화였습니다. 요셉의 모습에서, 그리고 형들의 모습에서 그들은 그들에게 임한 꿈과 말씀을 철저히 그들의 생각대로 받아드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살펴보면 요셉과 형들이 불화를 일으킨 계기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 첫째 꿈 이야기, 둘째 요셉의 고자질입니다. 요셉은 꿈을 꾸었습니다. 잘 알다시피 형들이 만든 짚단이 요셉이 만든 집단에게 절을 하는 꿈과 해와 달과 열한별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요셉과 형들은 모두 이것을 성취로 해석하였습니다. 요셉은 이 꿈들을 자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고, 형들은 이것을 시기하느라 견딜 수 없었습니다. 요셉도 형들도 그들의 가족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계획 같은 것은 관심도 없었습니다. 다만 이미 하나님을 아는 야곱만이 그것을 간직해두었다라고 말씀은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철저히 외면당하시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또한 자기의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만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머니 레아로 인해서 아버지 야곱에서 편애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혼자서 색동옷을 입고, 형들과는 다른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는 다른 형제들과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돈독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몰랐습니다. 그는 형들의 심정을 생각하지 않았고, 그들의 배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형들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형들이 어떤 잘못들을 하는 지 정죄하기에 바빴고 아버지께 그것들을 말하기에 바빴습니다. 아버지의 편애로 인해 그가 사는 세상은 자기로 가득 찬 세상이었고, 자기애와 자기의가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요셉이 형들에 의해 팔려간 것은 어쩌면 열차가 달려오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형제들과 하나님을 알지못하는 요셉의 삶은 그렇게 부딪쳤습니다.

이러한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신일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악함과 무지함을 압도하는 섭리를 통해서 그의 역사를 이루어가셨습니다. 그들을 악하여 서로가 서로를 참소하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 하며, 형제를 이방사람에게 팔기까지 하였으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참으로 놀랍게 나타납니다. 요셉의 마지막날 하나님의 뜻이 이곳까지 우리를 인도하셨다 고백하는 그의 이야기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하나님이심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셉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빠져듭니다. 형제간의 암투와 배신, 고통과 고난, 유혹과 절망, 그리고 반전과 성취, 영광과 재회, 그리고 용서 우리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갖가지 이야기들에 심취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것들에 심취하는 동안 결정적인 것. 곧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하나님이심을 잊기가 참으로 쉽습니다. 마치 우리 인생사 희노애락에 집중하다보니,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조연이나 보조출연으로 전락시키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야기는 위대하였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창세전부터 시작된 이야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선 당신의 온전한 생명을 드러내시는 창조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다스리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잘 알다시피 배반하고, 죄악을 저지르고, 무너졌습니다. 악하게 되었습니다. 떠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그 창조세계를 일으키시고자 아브라함을 찾아가셨습니다. 창세기에 그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동일하게 약속되는 것을 보고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말씀하셨던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 자손을 별과 모래와 같이 많게 하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땅을 다스리라라고 말씀하셨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저 유브라데에서 애굽강까지 넓은 땅을 주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다시 그 사람 아브라함에게 복이 되어라 하심으로 당신의 뜻이 사람에게 드러나게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아브라함을 거쳐 이삭과 야곱을 거쳐 여기 요셉에게 이어져 온것입니다. 그들이 어떠한 모습이든, 먼저 그가 이루고자 하신 그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요셉의 삶은 비루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그에게 드러내심으로 그를 통하여 수많은 생명을 살려내셨습니다. 그는 비록 노예로 팔려나갔으나 그로 인하여 야곱의 모든 가족이 함께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번성함의 토대가 되었고, 요셉은 수많은 자녀들의 은인이 되었으며, 요셉은 출애굽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공이셨습니다.

우리가 만약 아브라함의 자손의 이야기를 번성과 번영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을 부국강병정도로만 생각한다면,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과의 소중한 언약을 율법정도로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나를 누구보다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나의 생명을 건지시고자 태초부터 지금까지 온 정성과 힘을 다해, 목숨까지도 내주시면서 애쓰시는 것을 도무지 찾아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의 말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말씀이 성육신되어 우리가운데 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17세의 어린요셉과 같은 수준의 신앙 속에서 살고 있지 않나 돌이켜 봐야 합니다. 여전히 세속적인 성취가 신앙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나 생각해봐야 합니다. 내가 세속적으로 성취하였다고 요셉처럼 자랑하기에 바쁘거나, 혹은 내가 가난하고 어렵게 지낸다고 해서 주눅들기에 바쁜것은 아닌지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여전히 율법적인 의가 신앙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나 돌이켜 봐야합니다. 스스로 남을 판단하며, 김집사는 뭐가 문제야. 이장로는 뭐가 문제야, 누구는 이래서 안돼 저래서 안돼 판단하기를 즐겨하지는 않나 돌이켜봐야 합니다. 혹은 그 율법이 두려워서 말씀을 피하고, 교회를 거부하고 도망가지는 않나 돌이켜봐야합니다. 신앙함이란 무엇입니까? 우리의 어떠함을 압도하는 하나님의 은총과 경륜과 섭리를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우리의 어떠어떠함을 압도하는 하나님의 은총과 경륜과 섭리를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겸손해 질 수 있고, 낮아질 수 있으며, 예수 십자가에 참예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말씀이 내 안에서 역동적일 수 있으며, 구원사건이 내 사건으로 다가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집중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또한 기뻐할 수 있는 것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달려있는 구원은 너무 쉽게 무너집니다. 그러나 말씀은 선포합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시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것이다. 말씀은 우리에게 선포합니다. 우리가 세속적인 성취에 골몰해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 우리가 남을 정죄하고 죄악 가운데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 우리가 가난하고 아파서 탄식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 모든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들을 끌어안으시고 당신의 뜻을 기어이 이루어 내 가십니다.

요셉은 그의 삶이 바닥을 쳤을 때 비로소 그 뜻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유다와 그의 형제들도 그 궁핍함속에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을 헌신하며 목숨을 걸고 동생을 구하려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최고의 절망을 겪으시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순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절절한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의 주인공이 하나님이심을 비로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그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깨닫고 회복하는 삶입니다. 그 회복을 목도하고 구원을 이루어가는 삶인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요셉의 삶을 이렇게 평합니다.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시편 105편 19절)
 
우리는 그 의미를 생각하며 고백합니다.

그의 말씀을 통하여 그 경륜, 그 뜻, 그 구원, 그 생명, 그 하나님을 알게 되었도다. 희망을 보게되었도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을 깨닫게 되었도다. 땅에서 하늘을 보게 되었도다.

우리 또한 이렇게 고백되어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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