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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 (2011.12.16)

category 주일 설교 2011. 12. 17. 01:14
이사야 61장 1~3절 
 
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말씀은 유명한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 이 말씀을 인용하여 첫 설교를 하셨습니다. 누가복음과 이 곳의 내용이 조금 다른 것은 누가복음은 70인역이라는 헬라어 번역본을 인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읽는 성경은 히브리성경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번역의 차이로 내용이 조금 다름니다. 하지만 읽어보면 같은 내용임은 분명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 안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가득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을 때 각 말씀이 담고 있는 풍성한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 성경을 읽다보면 같은 말씀이라도 읽을 때마다 그 의미가 새로워지고 그 의미가 깊어지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이것은 우물을 파는것과 같습니다. 사실 조금만 파도 물은 쉽게 나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파는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파면 팔 수록 깊고 맑은 물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그렇게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메시아를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이 메시아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함께 오늘 본문을 찬찬히 눈으로 읽어보겠습니다. 평소에 우리가 쉽게 흘려 읽었던, 우리가 다 알고있다라고 생각하는 말씀을 한번 자세히 읽어보겠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리셨다는 뜻은 무엇이고 기름을 부으셨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가난한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이 들렸다, 마음이 상한자를 고치셨다, 포로된 자들을 자유롭게 하셨다. 갖힌자를 놓이게 하셨다 라는 말씀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은혜의 해는 무엇이고 보복의 날은 무엇일까요?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겠다. 재를 대신해서 기쁨의 기름을 주겠다. 찬송의 옷을 주겠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그들이 의의 나무 곧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겠다 라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여기에서 의는 도대체 무엇이고 그 영광은 무엇일까요? 자세히 살펴보면 이 각각의 단어와 뜻이 참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의 각각의 단어는 그 의미를 담고 있는 그릇과 같습니다. 이 그릇 안에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뜻을 담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사랑 그러면 우리가 사랑이라고 느끼는 모든 감정과 느낌, 생각, 행동들이 모두 이 단어 안에 담겨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사랑을 실제로 하면 할수록 사랑이라는 단어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나온 각각의 단어를 깊이 이해하고 그 뜻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그 뜻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워도, 일단 우리에겐 눈치라는 좋은 도구가 있습니다. 눈치로 딱 맞추면 이 본문은 무엇을 뜻할까요? 네 예수님이 오심을 뜻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오시면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라는 뜻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오신지 2000년이 지났는데도 우리들 눈에는 수많은 문제가 그대로 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마르틴부버라는 유대 철학자는 예수님이 정말 메시아라면 왜 그가 온 뒤에도 세상은 그대로인가 하면서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아직도 불의와 가난, 고통이 난무합니다. 포로된 자들, 갖힌 자들은 여전히 너무 많습니다. 슬퍼하는 자, 마음이 상한 자는 셀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을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되셨다라고 고백하고 이 말씀이 우리 속에 이루어졌다라고 고백합니다. 왜 이런 고백을 하게 된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믿는 신앙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시고 무슨 일을 하셨을까요? 

우리가 이 메시아 사건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구약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창세부터 이어진 이스라엘 역사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를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우리들의 모습과 매우 닮았습니다. 모든 사람은 어떤 점에서 다 똑같기 때문입니다. 어떤 모습이 닮았을까요? 바로 자신의 욕구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닮았습니다. 

매슬로우의 5단계 욕구 이론을 가지고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일단 먹고 자고 '죄송합니다' 싸고 이런 것들이 매우 중요합니다. 비단 목숨이 걸리지 않더라도 함께 탕수육 같은 것들을 먹다가 한 조각 남았는데 앞사람이 낼름 먹으면 그게 묘하게 서운 합니다. 제가 배낭여행 중에 베트남 국경을 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이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데 갑자기 설사가 엄청 마려운 것이었습니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온몸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가지고 있던 여행책을 급히 뒤져 베트남어로 화장실이 '또알렛'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짜고짜 기사님에게 가서 정말 큰소리로 또알렛 또알렛을 그 버스가 설 때까지 외쳤습니다. 버스는 저 때문에 서게 되었고, 근처 산으로 부리나케 뛰어가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때 얼마나 간절한 기도가 나오던지. 주여.. 주여.. 우리는 그렇게 생존과 관련된 문제에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또한 출애굽 때 마찬가지의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우리는 조금 더 안전하고, 보호받고, 안정된 삶을 살고자 애씁니다. 우리의 기도제목은 사실 이 부분에 많이 집중되어 있지요. 비를 피할 지붕이 없다는 것  만큼 사람을 서럽게 하는 것도 없지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들은 노숙인일 것입니다. 우리는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고 싶어서 무던히 노력합니다. 나라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깥 외적으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안보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사기를 보면 그들의 이야기는 이러한 안전을 추구하고자 하는 모습이었고,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도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안정이 해결되면 우리는 무엇을 추구할까요? 네 바로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에 힘씁니다. 우리의 기도제목의 우선순위는 바로 이런 소속감, 사랑일 것입니다. 화목한 가정, 평화로운 사회, 안정감을 주는 관계들 이런 것들을 우리는 추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을 요구하였습니다. 왜 왕을 요구하였을까요? 지파별로 흩어져 부족국가 혹은 사사에 의해 다스려지는 국가는 힘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사를 보더라도 삼국시대때 삼국의 힘이 강해지는 때는 바로 왕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그들은 강한 왕을 요구했습니다. 강한 나라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 소속됨으로서 안정감과 소속감을 느끼고 싶었을 것입니다. 

소속감이 생긴 뒤에는 무엇을 원할까요? 명예와 존경을 원할 것입니다. 솔로몬은 화려하게 자신의 궁궐을 치장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성공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온천하에 펼쳐지기를 추구했습니다. 우리도 조금 더 훌륭한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자신이 드러나지 않더라도 자기 자식 대에서는 훌륭한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성공하길 바랍니다. 우리는 그것을 크게 쓰임 받는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신앙서적 중에는 하나님의 대사, 하나님의 약국, 하나님의 장관, 하나님의 시장 등등 이런 책들이 매우 많습니다. 입신양명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도움이 되겠다고 기도합니다. 우리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우 비슷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명예와 존경을 얻은 뒤엔 무엇을 원할까요? 바로 자아성취를 원합니다. 나는 명예도 싫다, 권력도 싫다. 나는 다만 내 삶 속에서 내 삶의 자아를 성취하고 싶다. 내안에 가장 소중한 가치를 추구하고 싶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삶에 진지했습니다. 많은 바리새인들은 사실 어려운 길을 묵묵히 걸었습니다. 그 수많은 율법들을 감내하면서 지켰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귀한 일,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어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매번 기도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가치 '엄격한 도덕', '사회윤리', '경제적 평등', '교회의 교회됨' 등등을 생각하면서 치열하게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도할 것입니다.

조금 길었지만 생존, 안전, 관계와 소속감, 명예, 자아성취 이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자신의 삶에서 이루어내고자 하는 사람의 방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도 우리의 삶에서도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방식과 하나님의 뜻은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깨닫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매번 실패한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방식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우리의 방식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매번 간구합니다. 조금 더 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살기 위해 기도합니다. 조금 더 경제적으로 나아지진 않을까 해서 열심히 헌금을 냅니다. 자신의 소속감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 열심히 교회 출석을 합니다. 교회의 개혁을 위해 열심히 활동을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잘 아십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주심을 통해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채우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은 결국 하나님을 끝까지 잘 모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 분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우리가 원하는 것들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무엇을 통해 알 수 있을 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그 나무는 그 열매를 통해 알 수 있다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집중되었을 때 우리는 타인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철저히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생존을 위한 하나님이든, 명예나 자아성취를 위한 하나님이든 결국 하나님은 나를 위해 이용당할 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였던 제자들을 보면 아주 잘 드러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예수님이 통과하길 거부하자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그들을 멸하자고 건의합니다. 예루살렘이 가까이 오자 누가 더 높은 가에 대해서 다투는 가 하면, 왕이 되시면 자기들을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건의합니다. 그들이 원하던 뜻과 예수님의 길이 다르자 과감하게 배신하고 버리는 일을 하고 맙니다. 그들의 열매는 철저히 그들이 자기를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리한 가룟유다도 열정적이었던 베드로도 예외에 있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실패한 열매를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만일 이웃을 참으로 사랑하지 아니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실패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실패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쫓아 스스로 낮은 자리에서 십자가를 지고 이름도 빛도 없이 죽는 것이 또한 은혜요 감격이라고 고백하지 못한다면 우린 여전히 실패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또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한 실패한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죄인 된 저를 포함한 우리라는 사실입니다. 앞서 제가 5가지 욕구를 이야기 할 때 이렇게 생각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이런 것들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인데 어쩌란 말이냐?. 그렇다면 아무런 노력도 하지 말라는 것이냐? 우리가 하려고 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에게 어떤 희망이 있냐?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 런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저 다섯 가지 욕구에서 빠져나와 하나님만을 받아드릴 수 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죄인 됨을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많이 씹는 자일리톨 껌이 있습니다. 이 자일리톨이 충치를 예방하는 원리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자일리톨은 설탕처럼 달지만 충치균이 소화시킬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충치균이 이 자일리톨을 열심히 먹는 데 양분이 되지 못하고 그냥 토해낸다고 합니다. 열심히 먹고 토해내고 먹고 토해내고 이러다보면 결국 세균이 굶어 죽어버린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자일리톨처럼 우리에게 생명이 되지 못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먹고 토해내고 먹고 토해내는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희망은 무엇일까요? 바로 오로지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총입니다. 잠언 5장 2절에 보면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다 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시도하는 모든 것들이 결국은 땅의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선, 궁극적인 희망, 궁극적인 생명과 사랑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있음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음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처음 우리를 창조하실 때 그 생기 곧 생명을 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조상 아담의 타락이후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어리석게 각기 제 길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가 하나님께 붙어 있을 때 비로소 살 수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분이 곧 완전한 생명이시며 구원이시며 지혜이시며 모든 문제의 해결됨임을 그 분만이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 큰 사랑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 이 모든 역사 속에서 애쓰셨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에게 집중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보게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당면 과제였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타락했던 그 순간부터 일하셨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시는 데 집중하셨습니다. 그것이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홍수를 통해 모든 만물과 생명의 통치자이시며 하나님을 떠난 모든 피조물들을 죽을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이삭과 야곱, 요셉을 통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들과 동행하시고 그들의 삶을 인도하셨으며 복을 주시고 지경을 넓혀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근원적인 복 곧 생명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또한 민족을 이루시고 그 민족을 억압과 압제에서 해방시켰습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모든 권세와 부보다 크신 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참 자유와 해방의 근원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주셔서 하나님 존재의 거룩함과 사랑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국을 세우시고 하나님의 통치가 무엇임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부국강병에 현혹되었을 때 그것이 아닌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보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국가의 힘 자체에 집착할 때 그 나라를 나누고 흩으심을 허락하셨습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그 자체로 생명이 없는 삶인 것을 깨닫기 원하셨습니다. 욕망과 탐욕과 다툼과 모략이 지배하는 삶, 그러한 삶은 결국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애굽,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와 같이 망하는 삶인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끌려간 포로들을 돌아오게 하시고 그들에게 새 희망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새 희망은 하나님 그 분이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희망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그 희망. 그 메시아는 곧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8절까지를 읽어보겠습니다.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가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죄와 사망의 길로 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와 주셨습니다.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생명되심을 목숨을 다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주기도문에서 주님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이 되시는 것을 땅에 있는 우리는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땅의 것에 집착하여 죽음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땅에 내려오심으로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전히 땅에 있는 문제들에 휩싸여 있음으로서 2000년 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잊고 살아갑니다. 앞서 질문했던 것처럼 가난과 고통, 아픔과 슬픔이 여전히 우리 속에 있지 않은 가 질문합니다. 그 답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문제의 근본을 해결하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그것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그것들을 볼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4장에서 오늘 본문을 읽으시고 담대하게 선포하십니다. 이 말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 바로 참 구주 우리 하나님이 오셨음을 의미합니다. 이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드리는 것이 곧 구원임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삶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방식으로는 철저히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대안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을 복음 그대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타나는 말씀을 읽으며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을 봐야합니다. 예배를 드리며 복음을 끊임없이 삶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기도를 하며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을 내 삶으로 받아드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그 풍성하신 생명과 사랑을 받아드리고 기뻐하며, 감사하며,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 안에서 매순간 생명력을 얻고 매 순간 꿈을 찾으며 매순간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예수님을 통해 완성하시며 성령님을 통해 이끌어가시는 그 나라가 우리안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