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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6:14~25 (2017.03.31. 아침묵상 QT)

category 묵상/마태복음 2017. 4. 8. 17:47

<말씀>

마태복음 26장

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17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8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19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20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나눔>

1.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가룟 유다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은 삼십에 팔아버린 가룟 유다는 기독교 역사 속에서 가장 큰 비난을 받았습니다.


2. 그러나 우리는 가룟 유다를 비난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보다는, 되려 가룟 유다를 통해 우리의 죄 됨을 직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룟 유다는 아담과 하와와 마찬가지로 죄인 된 우리의 모습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가룟 유다의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입니다. 거울처럼 가룟 유다의 악행은 우리가 저지르는 악행을 비추어 줍니다. 


3. 가룟 유다가 탐욕스러운 부분이 있었지만, 예수님을 판 것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돈만을 위해 팔았더라면 은 30보다 훨씬 더 큰 돈을 요구했을 것입니다. 은 30은 당대 노예 1명의 가격에 불과했습니다. 성경에서 그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있기에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여러 정황을 통해 그의 생각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4. 그가 예수를 판 것은 아마도 그가 예수님을 통해 품은 이상과 실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이 달랐기 때문으로 추측됩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회계를 맡을 정도로 매우 계산적이고, 현실적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인이 예수님께 기름을 붓자 그 기름 부음을 돈 낭비라며 비판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가룟 유다의 태도에 비쳐 볼 때 그는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면 실제적인 정치, 경제적 변혁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길을 가시지 않고 고난과 희생의 길을 가실 것임을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러한 예수님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궁지로 몰면 예수님께서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가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고난과 희생,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의 재판에서도, 빌라도의 재판에서도, 심지어 십자가의 처형 속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을 쓰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침묵 속에서 순종하며 자신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셨습니다. 가룟 유다의 계산을 틀렸고, 가룟 유다는 결국 예수님의 죽음에 가장 직접 관여한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말았습니다. 말씀은 이후 가룟유다가 크게 후회하며 자신이 받은 돈을 성전에 집어 던지고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말았음을 알려줍니다. 제사장들은 그 돈을 핏값으로 보고, 땅을 사서 나그네들의 무덤으로 삼았습니다.


6. 가룟 유다의 실수는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로 현실 너머 하나님의 일하심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합리적 판단과 이성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매우 중요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그것을 뛰어넘는 믿음을 요청합니다. 가룟유다는 자기 신념과 판단을 과도하게 믿은 나머지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 희생의 길은 이성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길, 구원의 길,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때때로 우리의 생각과 계획, 나아가 판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십자가의 길 안에서 희생과 침묵, 섬김의 길을 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가룟유다는 그 길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7. 둘째로 가룟 유다는 사랑으로 권면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몇 차례에 걸쳐 돌이킬 기회를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 21-25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직접 가룟 유다에게 네가 나를 팔 것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몇 번에 걸쳐 가룟 유다에게 돌이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이 계획한 길이지만, 그 길에서 배반으로 참여한 자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게 나았을 정도의 저주의 길이라고 말씀하시며 그 길을 멈출 것을 권고하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위해 태어난 운명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길을 멈출 수 있었습니다. 누구나 실수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수를 깨달았을 때 우리는 그 길을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8. 셋째로 가룟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언급되지 않지만, 가룟 유다는 후회했을 뿐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행위입니다. 돌아온 탕자처럼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시고 용서하시는 분임을 알 때 우리는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했지만,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그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완벽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를 용납해주신 그 사랑을 신뢰하며,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9. 참된 의(義)는 관계 안에 있습니다. 관계가 빠진 의(義)는 쉽게 자기 의로 전락합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하면서도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를 이루어가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사랑했지만, 유다는 그 사랑을 깨닫지도, 신뢰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지도 못했고, 예수님의 말씀에 반응하지도 못했으며, 최후의 순간까지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가룟 유다의 모습에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의 죄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서 이러한 점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예수님을 신뢰하고 따르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곧 관계입니다. 이 친밀한 관계는 오직 주님의 은혜로 가능함을 깨닫고 늘 우리는 이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놀라운 믿음과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10. https://www.youtube.com/watch?v=sFRgf6rrsl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