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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필요한 것! (2020.08.16. 주일예배 설교)

마태복음 9장
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언젠가 한 자료에서 보았습니다. 사람이 강의로 듣는 공부의 5%만이 머리에 남는다고 합니다. 귀로 듣는 말씀이 사실 한주가 지나고 나면 머릿속에서 대부분 사라지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집중하지 않아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머리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있기에 이전 것들이 쉽게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들려온 이야기들이 우리안에 오래 남을 수 있을까요? 이 들려온 이야기를 실천하면 무려 75%가 머리에 남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들은 것을 누군가에게 가르친다면 무려 90%가 머리에 남는다고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씀을 내 것으로 삼고, 나아가 실천하고 고백할 때, 그 말씀이 우리 가운데 깊게 새겨지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제가 어떻게 하면 우리 성도님들께 하나님의 말씀이 잘 새겨질 수 있을지를 고민합니다. 우리의 기억에는 단기기억이 있고, 장기기억이 있다고 합니다. 한번 습득한 것은 단기기억으로 가는데 그 기억이 시간이 지나면서 금새 사라진다고 합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평균적으로 볼 때 1시간이 지나면 절반정도를 잊어버리고, 하루가 지나면 3분의 2를 잊어버리고, 일주일이 지나면 4분의 3을 잊어버린다고 합니다. 말씀을 듣고 난뒤에 일주일이 지나고나면 거의 생각이 안나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억력을 높이는 아주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복습입니다. 잊어버릴 때 즈음에 다시 공부하면, 이 기억은 단기기억에서 점점 장기기억으로 바뀌어 기억에 오래 남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함께 말씀을 들으며 매번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도 좋지만, 정말 중요한 것을 계속 듣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계속 말씀이 우리 가운데 뿌리내려지고, 말씀이 우리 가운데 마음의 중심이 되고, 말씀이 우리의 삶이 될 때, 우리는 말씀의 놀라운 은혜를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잠시 또 지난 주까지의 말씀을 복습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8장, 9장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계속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무리에서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무리는 그저 자신의 바람과 욕심에 따라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제자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걸어가기로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무리가 아니라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의 길이 어떠한 길인지를 행적을 통해, 말씀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는 먼저 폭풍속에서도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삶의 모든 순간 가운데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두려움과 불안을 이겨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나 주님을 향한 시선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제자는 예수님의 권세에 힘입어 귀신의 권세를 쫓아내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모든 세속적 가치관에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가치관 곧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통해 사랑으로 생명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셋째로 제자는 예수님의 치유하심을 경험하고, 이 땅을 치유하는 사람입니다. 이 땅 가운데에는 죄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 고난과 아픔 가운데 사는 사람들, 마음의 고통과 슬픔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제자는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사람을 살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넷째로 제자는 삶의 소망을 선포하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친구가 되어주고, 사랑과 말씀으로 그들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입니다. 그저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 신념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진정으로 가치있는 것인지를 전하고, 그 가치로 새 소망을 전하는 사람 그러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 다섯 번째 제자도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와 죄인들과 더불어 실컷 식사를 마치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불만섞인 말투로 예수님께 물어보았습니다. 14절 말씀입니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님,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오늘은 금식일입니다. 이 금식하는 날에 우리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또 저 바리새인들도 금식하는 데 왜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경건한 유대인들은 누구나 금식을 하는 데, 왜 이런날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있습니까? 이렇게 질문한 것입니다. 

레위기 16장 29절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대속죄일, 1년에 한번 금식을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하였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식사하신 날이 바로 이 월요일 또는 목요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보기에 이러한 모습은 경건하지 못한 모습이었습니다.   

더더군다나 당시 상황은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갖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권력자의 잘못을 비판하다가 세례 요한이 감옥에 들어가 있고, 또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데, 권력의 앞잡이인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매우 못마땅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모습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부적절해보였고, 경건해보이지도, 거룩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질문의 형식으로 예수님께 항의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15절 말씀입니다. 다같이 봉독하겠습니다.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한 그 자리를 혼인 잔치로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신랑이라 비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에 기뻐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시면서, 나와 함께 있는 이 자리는 기쁨의 자리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경건을 바라보는 관점을 뒤바꾸셨습니다. 경건을 형식의 문제에서 관계의 문제로 바꾸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식 자체를 비판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40일간 금식을 하셨고, 앞선 6장의 말씀을 통해서도 올바른 금식에 관하여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금식도 때로는 꼭 필요한 경건의 방법이라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나 금식을 포함하여 모든 신앙생활은 형식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나 자신과의 관계 안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구원하심을 기뻐하는 자리, 예수님과 더불어 함께 사랑을 나누는 자리, 성령님의 은혜 가운데에서 하나되는 자리에 필요한 것은 함께 그 기쁨을 나누고 즐거워하고 축하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죄를 용서하신 주님을 기뻐하고, 내 이웃과 화해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을 즐거워하며,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게 된 것에 감사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경건이요 참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식이 필요할 때가 있는데, 그 때는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게 될 때, 나의 죄를 참회하고 고백하게 될 때, 이웃의 고난을 함께 아파해야 할 때 그 때가 바로 금식해야 될 때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관점의 변화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됨의 핵심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은 어떤 형식에 얽매이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나와 내 자신이 화해하는 것이요, 나와 내 이웃이 화해하는 것이요, 나와 우리 하나님이 화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때로는 금식이 필요할 때가 있고, 때로는 기쁨의 잔치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나와 세상의 죄를 통회하고 자복할 때가 있고, 사랑과 나눔의 교제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놀라운 관계 안에서 풍성한 사랑을 나누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임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제껏 이것과 상관없이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신앙생활을 해왔던 것입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상태인지 진지하게 살피지 않고, 내 이웃이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그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이 사회가 어떤 모습인지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은 채 그저 자기에게 주어진 종교적 형식과 의식만을 지키는 데에만 마음을 썼던 것입니다. 사랑의 관계가 없는 딱딱한 종교 생활을 옳은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딱딱한 신앙 생활이 아닌, 실제 관계와 마음이 있는 신앙생활을 원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새 옷, 새 부대로 설명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선포하신 새로운 신앙생활은 단지 형식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진실된 관계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금식’에 대한 거부로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의 형식이 다 필요없다고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가 지금껏 주님께 나아가기 위해 드리는 신앙 생활의 형식들이 진정으로 마음을 담고 있는 것이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에 우리가 단지 몸만 교회에 나오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예배 가운데에서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 나와 내 이웃과의 관계,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달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또한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의 깊은 죄를 깨달아 회개하며,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그러한 예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에 유창한 언변과 화려한 말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기도를 통해 우리의 정직한 마음을 주님께 고백하고, 그 고백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만지심과 위로하심과 말씀하심을 경험하며, 내 곁에 있는 이웃을 위해 기도함으로서 참된 사랑의 공동체를 경험하길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찬양할 때에 우리의 마음과 뜻을 하나님께 집중하길 원하십니다. 찬송가 한 소절 한 소절 속에 우리의 진실된 마음을 담아서 부르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찬양을 통해 매였던 우리의 마음이 해방되고, 미웠던 이웃을 용서하게 되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진실로 경험하기를 원하십니다. 찬양이 그저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만지심의 통로가 되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신앙 행위들이 그저 형식이 아니라 그 안에 진실된 관계가 담겨져 있어야 하는 것, 그것이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앙 생활이 우리에게 있어 그저 형식이나 의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진실된 관계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를 포함한 세리들과의 식사 자리가 축제의 자리가 될 수 있었던 이유, 금식을 하며 애통하는 자리가 진실된 참회의 자리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볼 수 있고,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죄 용서를 경험할 수 있으며,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그 곳이 진정한 관계의 회복이 일어나는 자리입니다. 아무리 그럴싸해 보이는 종교생활을 한다할지라도, 금식을 하고, 예배를 열심히 드리고, 헌금을 많이 하고, 기도를 수 시간을 해도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 다면, 그 모든 일은 종교생활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을 기억하고, 바라보고, 찾을 때, 그분의 십자가를 붙잡고, 부활을 기억할 때 이 모든 일들은 생명이 되고 기쁨이 되고 용서가 되고 치유가 되고 회복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선포하신 것입니다. 나를 따르는 사람들의 신앙 생활은 그저 형식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 아니다. 모든 형식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할 때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에 주목할 때, 예수님의 부활에 주목할 때, 예수님의 다시오심을 주목할 때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모든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 찬양의 자리,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붙잡아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기도회 말씀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경건의 비밀이라 고백하였습니다. 

사실 이 말씀을 당장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집중해야 한다는 그 사실 하나를 붙잡고, 묵상하며, 제자된 삶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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