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아 물러가라 (2020.07.26. 주일예배 설교)
마태복음 8장
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29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30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하니
32 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33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34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오늘 말씀을 시작하기 전 지지난주 말씀과 지난 주 말씀을 잠시 기억해보겠습니다. 지지난주 말씀과 지난 주 말씀, 그리고 오늘 말씀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지지난주 말씀을 통해 우리는 무리가 아니라 제자가 되는 길에 관하여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보여주시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치유와 능력을 갈망하며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저 무리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그 길은 예수님께 모든 것을 내어드리고, 예수님과 더불어 함께 걸어가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안정적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길이 아니라, 예수님과 더불어 어디든 함께 가는 길이다. 내 힘과 내 능력으로 사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 의지하며 신뢰하며 사는 길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다른 이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너의 개인적인 삶을 포기해야 하는 길이다. 가장 소중한 사람을 위한 장례까지도 포기할 수 있는 길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나를 내어주는 것, 그것이 제자의 삶이다. 선포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더 이상 무리로 머물 것이 아니라 이 제자로의 부르심에 응답할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지난주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이 제자의 길이 쉽지 않는 길임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에게 떠나 제자들과 함께 항해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타고 가는 배가 폭풍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오랜 경력의 어부경력이 있었던 제자들도 감당할 수 없는 폭풍우였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주무시고 계시던 예수님을 깨워 이 상황을 해결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리고 바다를 꾸짖으셔서 아주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제자가 되는 길은 주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폭풍우가 치는 배 위에서 주무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원하시는 것도 바로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주님은 바다를 꾸짖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꾸짖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던 것처럼, 주님도 갈릴리 바다를 꾸짖으셔서 제자들을 폭풍우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책임지시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제자의 길은 이처럼 주님을 신뢰하는
지지난주 말씀과 지난 주 말씀을 종합해보면, 주님은 우리를 그저 주님께 무엇인가를 원하는 무리에서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제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 제자의 길은 사람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더불어 제자의 길을 걸어갈 때에 폭풍우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고, 우리의 모든 인생을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담대히 제자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어떠한 일을 하시는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바다, 곧 갈릴리 호수를 건너 가다라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귀신 들린자 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님을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매우 사나운 사람들이었고, 그 때문에 아무도 그 길을 지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소리를 지르며 외쳤습니다. “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그 주변에는 돼지떼들이 있었는데 귀신들이 그 돼지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로 가라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귀신들이 돼지떼 속으로 들어가자 온 돼지떼가 비탈로 내려가다가 바다에 들어가서 모두 죽어버렸습니다. 그때 그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달아났습니다. 그들은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은 사람들에게 이 일을 알렸습니다. 온 시내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려고 찾아와 예수님을 보고 그 지역을 떠나줄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사실 아주 짧은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 속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그 뜻과 교훈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다같이 28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주님께서 무리를 떠나 제자들과 더불어 도착한 곳은 호수 건너편 가다라 지방이었습니다. 가다라 지역은 주로 이방인들이 많이 살던 지역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나오는 데,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음식이라 여겨서 먹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유대 지방을 넘어 이방 지역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이방 땅으로 넘어가신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의 사역이 궁극적으로 내가 있는 삶의 터전을 넘어서 낯선 사람에게까지 이르게 되어야 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선을 넘고 경계를 넘어서 사랑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로 제자의 삶입니다.
이렇게 가다라 지역에 들어가자 그들이 마주친 사람은 놀랍게도 귀신들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말씀은 이들의 특징을 여러 모습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무덤 사이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들은 매우 사나웠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접근을 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이들은 놀랍게도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소리를 지르며 ‘당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외쳤습니다. 이 말은 ‘우리를 간섭하지 말아라’라는 뜻이었습니다.
성경에는 귀신들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몇차례 나옵니다. 이렇게 귀신 들렸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1차적으로 헷갈려서는 안되는 것은 귀신 들렸다는 것과 정신질환을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현병(정신분열)이나 조울증, 우울증, 이러한 것들은 귀신들린 것이 아니라 정신 질환입니다. 예전에는 이러한 것들을 다 귀신들렸다 치부하여 더 큰 문제를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적절한 치료와 돌봄이 필요한 질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술을 주셨기에 모든 병을 두고 우리가 기도하는 것과 동시에 병원을 가는 것처럼 정신질환도 마찬가지로 병의 일종이기에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잘못된 오해로 정신질환을 다 귀신들렸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귀신들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귀신 들렸다는 것은 자신의 온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이 아닌 사탄, 마귀, 귀신에 사로잡혀 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악한 영의 통치를 받고, 그 통치에 마음이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바로 귀신 들린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을 몇 차례에 걸쳐서 계속 하시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이루시고자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2장 28절 말씀입니다. 다같이 봉독하겠습니다.
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를 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 되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나라가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도록 내어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죄로 멀어진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헛된 것을 더 사랑하고, 우상을 하나님처럼 여기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회복시키기 위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회복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은 생명 가운데 살아가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합니다. 귀신 들린 사람은 악한 권세에게 온전히 마음과 생각이 사로잡혀, 귀신의 통치를 받고 살아가기에 하나님 나라와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귀신 들린 사람의 모습을 한번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특징을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무덤 사이에 살고 있었습니다. 죽음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매우 사나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무너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일에 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를 간섭하지 마십시오’ 외쳤습니다.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 없이 살아가는 삶, 그것이 바로 귀신 들린 삶이었습니다. 이들 속에 있던 귀신들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허락해달라고 외쳤습니다. 돼지는 전형적인 부정한 동물들이었습니다. 귀신들은 사람 속에 들어가 사람을 부정한 존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성경에서 부정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귀신들이 돼지로 들어가자 돼지들은 바다에 뛰어 들어가 몰살당합니다. 귀신들린 존재의 마지막 운명이 죽음임을 말씀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귀신들렸다 말할 때에 우리는 기괴하고 적대적인 행동, 변해버린 눈빛과 용모 이런것들을 먼저 생각합니다. 우리는 귀신 들린 사람들을 영화나 드라마 곡성, 검은 사제들, 엑소시스트 이런 것들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실제 귀신들린 사람들을 만나보면 이러한 모습과 유사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말씀에서 나오는 귀신들림의 의미는 좀 더 근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귀신들림의 핵심은 겉으로 보이는 이상한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닌 우상에 매여 있는 삶을 살고 있을 때, 그 삶이 결국 귀신들린 삶이 아닌지를 우리에게 진지하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무덤과 같이 헛된 것들을 곁에 두고 살면서 진정한 안식처이자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 없는 인격으로 다른 사람들을 적대하고, 비난하며 무너진 인간관계 속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 대하여, 예수님께 대하여 ‘당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나요? 우리를 간섭하지 마세요’라고 소리치고 있지 않은가? 주님을 떠나 부정한 삶으로 살면서 헛된 것을 추구하면서 죽음의 길로 달려가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귀신들린 자와 무엇이 다른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러한 귀신들린 자의 삶에서 예수를 따르는 삶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귀신들린 자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방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죽음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삶에서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무너진 관계 가운데 사랑을 회복시키고, 다투고 갈등하는 세상 속에서 평화와 기쁨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제자 된 삶입니다. 악한 권세가 사로잡고 있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하는 삶,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삶이 곧 제자의 삶임을 말씀은 우리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렸던 사람들을 귀신에서 해방시키고, 귀신들을 돼지떼에게 내몰아 바다 속으로 밀어내시자 돼지떼를 치던 사람들은 놀라서 시내로 달아나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간의 사정을 사람들에게 다 고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시내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떠나기를 요청한 것입니다. 이들의 눈에는 두 사람이 지금껏 그들을 괴롭혀 왔던 귀신에게서 해방되고 치유된 것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재산인 돼지 떼가 바다에 뛰어들어가 죽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기들의 이익을 유지하고, 자기가 살던 대로 편안하게 사는 것 그것이 중요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넌지시 보여줍니다. 누가 진짜 귀신들린 사람들이냐? 우리를 간섭하지 말라고 했던 귀신들의 말들을 누가 지금 하고 있느냐?
우리는 이처럼 교묘하고 간교하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사탄, 마귀, 귀신들의 모습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귀신은 때로는 죽음의 현실로 우리의 마음을 두렵게 하고, 때로운 달콤한 욕망으로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때로는 상처와 아픔들들로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때로는 성공과 자랑으로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고, 때로운 절망과 좌절로 우리를 무너뜨려버립니다. 악한 권세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단 하나의 목적 하나님을 우리의 시선에서 떨어뜨립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성공과 번영의 문화에 심취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화려함과 승리에 취해 자신들이 악한 권세의 통치에 영혼이 마비되어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갔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도 이와 같이 악한 권세의 통치에 우리의 영적 감각이 마비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이러한 마귀의 방법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반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인도하시는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붙들어야 합니다. 주님 모든 일이 주님과 상관있는 일이요, 내 모든 삶이 주님과 함께하는 삶임을 담대하게 선포해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와 더불어 온전한 사랑으로 함께 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미 모든 악한 권세를 물리치셨고, 귀신을 내어 쫓으셨고, 승리하셨음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의 것입니다. 그것을 믿고 나아가는 것, 그리고 우리가 가는 곳곳마다 이 놀라운 복음을 선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이 원하시는 제자의 길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주님은 우리는 우리를 예수님 닮은 모습으로 바꾸어가시고, 이 땅을 주님의 나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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