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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에서 제자로 (2020.07.12. 주일예배 설교)

 

마태복음 8

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을 고치시고, 귀신들린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을 본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위대한 능력에 경탄했던 사람, 실제로 병고침을 받고 싶었던 사람, 예수님과 함께 나라를 회복시키고자 한 사람, 진리를 배우고 싶었던 사람, 자신의 성공과 출세를 이루고자 했던 사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지만 각자의 생각과 속마음은 다 달랐습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예수님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매우 매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오자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피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무리가 자신을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강 건너편으로 이동하자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수많은 욕구와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추종하는 무리가 아니라 자신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갈 제자를 세우시고자 하셨습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제자보다는 무리를 선호합니다. 사람 수 자체가 돈이 되고, 힘이 되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인플루언서) 유투브의 조회수와 방송의 시청률이 돈이 됩니다. (청와대 청원 등)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목소리가 힘이 됩니다. 그저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정당화되고 힘이 되고 영광이 되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무리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저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고, 호감을 얻는 것에 온 힘을 다합니다. 그것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사람을 살리는 것인지, 죽이는 것인지 개의치 않습니다. 그거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는 것, 사람들이 열망하고 열광하는 것을 만들어내고 부추기고 찬양합니다.

 

이러한 사회의 모습은 사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 안에 스며들기 까지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이기만 한다면 교회가 어떤 일을 하든지 정당화됩니다. 교인들이 늘어가기만 한다면 어떠한 설교를 하든지 정당화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지지하기만 한다면 그 길을 기꺼이 걸어가기까지 합니다. 무리가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무리를 경계하셨습니다. 무리가 많이 모이는 것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선포될 때에 성령의 역사 가운데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고 교회가 크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은 아님을 오늘 예수님께서는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무리에 휩쓸릴 때,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눈빛과 찬사에 마음을 빼앗길 때, 무리의 힘과 능력에 무릎을 꿇을 때, 교회는 하나님이 아닌 무리를 섭기는 집단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자, 당신께서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할 사명에 다시 집중하시며 무리를 떠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각각 찾아왔습니다. 서기관 하나와 제자 중 한명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질문은 무리와 제자가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예수님께서 주목하고 집중하고 계시는 것이 무엇인지, 또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먼저, 19, 20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아와 아뢰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서기관은 소수의 교육받은 율법교사로서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고, 율법에 따라 살아가도록 지도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지방의 경우엔 보통 회당에서 일하는 관료의 역할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온전한 교사로 세워질 때까지 랍비라 불리는 선생님 밑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 서기관은 이러한 당대의 관습에 따라 예수님을 자신의 랍비로 모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호기롭게 아뢰었습니다. 선생님 어디로 가시든지저는 따르리이다. 이 장담은 훗날 베드로가 예수님께 했던 장담을 떠올리게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기 전에 다른 모든 제자들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절대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결코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호언장담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말을 하고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오늘 서기관도 이와 비슷한 모습으로 어디든지 주님 따르겠다 호언장담하였습니다.

 

무리의 특징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더 나아가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실 때 그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저 감정과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존재, 그것이 무리들의 모습입니다. 무리는 예수님의 이야기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지 않고, 그의 뜻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저 당장 자기에게 필요한 것, 자기가 원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그것을 우상숭배하며, 그것에만 반응합니다. 이러한 무리에 속해있는 사람은 자기를 과대평가 합니다.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자랑합니다. 자기의 능력을 과신합니다. 말 속에 허세와 장담이 가득합니다. 서기관의 장담에는 이러한 무리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러한 서기관의 장담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참으로 따른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그 현실을 정확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되 인자, 곧 예수님은 머리를 둘 곳 조차 없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 랍비라 불리는 율법 선생님들은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누리고, 훌륭한 시설에서 부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서기관은 이러한 삶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따르겠다 장담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까지의 종교지도자들과는 전혀 다른 삶의 길을 걸어가는 분이셨습니다. 그것은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는 삶, 어떤 소유도 기대할 수 없는 삶,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는 삶, 고난과 역경과 죽음마저도 받아들여야 하는 삶을 걸어가는 분이셨습니다. 자신이 품고 있었던 기대를 내려놓는 것 그것이 바로 무리에서 제자가 되는 길임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수많은 무리들은 자신을 위해 예수님을 찾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려놓은 길을 서기관에게 요청한 것입니다.

 

이 서기관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말씀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그는 크게 당혹했을 것입니다. 그가 만일 예수님의 이 음성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그 뜻에 따라 제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면, 그는 호언장담했던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내려놓게 될 것입니다. 열망에 가득 찼던 무리의 모습에서 자기의 한계를 발견하고 조금씩 예수님 닮아 성장하는 제자의 모습으로 바뀌어 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걸어가는 그 길은 고난의 길이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를 놀랍게 성장시켰을 것입니다.

 

더닝 크루거 효과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지식과 경력이 자신감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그래프입니다. 무엇이든 처음 시작할 때는 열정과 열망이 가득하기 때문에 이것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조금 더 열심히 해보면 깨닫게 됩니다. 이게 굉장히 어렵구나. 나는 정말 부족하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일종의 절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절망을 딛고 조금씩 애쓰다보면 조금씩 성장하게 되고, 그 성장이 오래도록 쌓이면 진짜 전문가가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신앙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 예수님 안에서 열망과 열정이 가득할 때는 이렇게 자신감도 높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주님을 따라가는 길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알지 못하는 무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치 제가 어디든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죽어도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장담하는 서기관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길인지, 그리고 우리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자기 자신의 모습에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진짜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무리에서 제자로 변화되는 과정을 겪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처럼 우리를 이러한 성장의 자리로 부르시고, 우리로 하여금 주님 닮아가는 긴 삶의 여정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신앙 생활을 시작하며,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와 바람이 어긋날 때가 있고, 오랜 기다림을 겪어내야만 했을 수도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은 더디고 심지어는 하나님에 대한 실망감과 절망감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 어렵게 느껴질 때도 있고, 변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주님과 함께 가는 그길이 구불구불하여도 가장 잘가고 있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가장 귀히 여기사, 우리를 제자 삼으시고, 예수님과 닮은 사람, 예수님 전하는 사람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신뢰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두려워하거나 불안해 하지말고 기꺼이 이 여정을 함께 걸어 갑시다.

 

우리 교회가 이러한 길을 함께 걸어가는 교회 되길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피하셨던 것처럼, 무리를 많이 모으는 교회가 아니라, 함께 제자가 되어가는 교회가 되어가길 바랍니다. 집이 없었던 예수님은 수많은 제자들의 집에 거하시며 그 사역을 이어가셨습니다. 우리도 서로에게 집이 되어주며 힘이 되어주며 주님의 길을 함께 걸어가길 원합니다. 그것을 통해 예수님의 놀라운 열매가 우리 가운데 드러나며,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어지길 소망합니다.

 

다음으로 21~22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서기관이 지나간 뒤에 이제 제자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요청하였습니다.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제자 중 한 사람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의 말씀에 따라 임종하신 부친을 장사지내는 것, 부친의 임종 후 6 일간 추모 예식을 거행하는 것, 병들거나 임종이 가까운 부모님을 정성껏 보살펴 드리는 것, 나이 드신 부모님을 봉양하는 것은 꼭 지켜야 할 규례였습니다. 특히 부모의 장례를 치르는 것은 매우 중요하여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꼭 해야 할 하루 3차례의 기도와 모세 오경에서 명령하는 일들까지도 면제를 받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장사하는 것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유대인의 관습과 유대 율법을 예수님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역시 어머니를 극진히 생각하는 등, 부모를 공경하는 것에 마음을 쓰시는 분이셨습니다. 이 말씀의 본문을 부모님을 소홀히 여겨라, 또는 가족보다 사역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러 가겠다는 제자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 제자에게 맡겨진 사명이 무엇인지를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가장 소중한 일, 가장 긴박한 일, 다름 아닌 사람을 살리는 일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 이 길의 의미를 진실로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무리들은 자기들의 삶을 유지하면서 자기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이 없나 예수님을 찾은 사람입니다. 자기를 위해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는 그와 반대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내 곁에 있는 이웃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이 소중하고, 자기의 가족이 소중합니다. 그것을 잊는 것은 기본이 안된 인격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사람을 치유하기 위해, 소외된 이웃을 감싸안기 위해,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삶 그것이 바로 예수 따라가는 삶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치유 사건 이후에 나타난 사건입니다. 치유 사건 후 사람들은 둘로 나뉩니다. 무리는 그 치유를 받고 싶어 따르는 사람이라면, 제자는 그 치유를 함께 이루어갈 사람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선포하신 것입니다.

 

NBA 선수 줄리어스 어빙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프로가 된다는 것은, 당신이 하고 싶은 모든 일을 당신이 하고 싶지 않은 날에 하는 것을 말한다."

 

얼마전 어느 한 글을 보았습니다. 심장을 전공하는 레지던트 의사의 이야기였습니다. 변함없이 수술을 앞두고 있는데 자기 아버지가 심장 마비로 쓰러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의사는 아버지를 빨리 가서 뵙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들어가야 하는 수술이 있어 망설였습니다. 그 수술을 주관하여 집도하는 교수님께 가서 잠시 아버지에게 다녀와도 되는지 여쭈어 보았습니다. 교수님은 가는 것은 허락하지만, 앞으로 받을 장학금과 진로는 보장해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장학금과 진로 보장을 받지 못하면 심장 전문의로서의 길은 끝이었기 때문에 그 의사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수술 도중 아버지의 운명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의사는 마음에 분노가 치밀었고, 냉정한 교수님이 죽이고 싶은 만큼 미웠습니다. 그러나 사실 교수님의 뜻은 다른데 있었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심장 전공 의사의 길이 이처럼 자신을 내어주는 길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냉정했던 그 교수는 이 의사가 훌륭한 의사가 될 때까지 묵묵히 그 삶을 지원해주었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길은 그 일의 가치에 자신의 온 삶을 걸어야 할 것을 요구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묵묵히 이루어가는 것을 우리에게 바라는 것입니다. 그 일 속에서 감당해야 하는 외로움, 아픔, 상처, 고뇌, 답답함, 절망 이 모든 것을 끌어안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삶의 진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에게 우리가 가야할 길이 이러한 길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수많은 죽음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길을 걸어가야 하기에, 너의 삶에 다가온 죽음을 애도할 시간을 잠시 멈추어야 한다. 우리의 길이 다시 생명을 살리는 길이기에, 이 길 위해서 수 많은 사람들이 살아날 것이요, 네가 경험하는 죽음도 결국 생명으로 다시 부활할 것이다. 그러니 잠시만 참자. 나와 함께 걸어가자. 나는 네가 필요하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다시 주님의 길을 생각하길 소망합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를 무리의 삶에서 제자의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무리는 주님을 필요로 하지만, 주님은 제자를 필요로 하십니다. 무리는 자기에게 집중하지만, 제자는 예수님의 길에 집중합니다. 우리가 제자의 길을 가기로 결단한다면 그 길은 고난의 길이요, 섬김의 길이요, 자기 비움의 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결국 예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요, 하나님 나라의 길입니다.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 속에서 이러한 제자의 길로 나아갑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길로 나아갑시다. 섬김으로 사람들을 치유하고, 복음으로 생명을 살립시다. 내가 속한 가정에서, 일터에서, 학교에서 더욱 사랑합시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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