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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마음으로 (2020.08.30. 주일예배 설교)

마태복음 9장
32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33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34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시의 일부분입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저는 이 시를 보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한지를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뜻과 생각을 이해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겠구나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의 수십년의 인생이 쌓여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독특한 기질과 성격이 더해져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순간의 대화를 통해, 행동을 통해, 표현이나 감정을 통해 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에 가까운 것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우리 모두는 각자가 자기 생각과 뜻이 있기에 상대방을 내가 보고자 하는 방식대로 이해하려고 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만남과 교제 속에서 오해가 생기고, 소통에 실패하고, 때로는 상처를 받거나 미움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오해를 줄이고자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이야기, 서로 다른 생각과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는 충고를 담은 강의나 책들이 넘쳐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소통의 불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겸손한 태도를 지녀야 하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깊게 들으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의 신념이 지나치게 강한 나머지, 자기 신념을 우상화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 말씀에 나온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과 해방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율법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정결규정, 십일조 규정, 안식일 규정, 금식 규정과 같은 것들을 아주 엄격하게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러한 규정을 지키는 데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시에 이러한 것들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정죄하였습니다. 사실상 자기의 신념과 생각을 우상처럼 강하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떠한 신념이 ‘우상’이 되었는지, 아닌지를 살피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신념 때문에 다른 사람을 도구처럼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상숭배는 곧 하나님 사랑을 무너뜨리는 동시에 이웃 사랑을 무너뜨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신념과 생각을 우상처럼 여기고, 이를 통해 마음이 교만해지고 강퍅해진 사람은 하나님보다 자기 생각을 더 귀하게 여길 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 대하여도 정죄하고 비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자기 신념이 우상이 된 사람들은 모든 상황을 자기 식대로 판단하고 자기 식대로 바라봅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을 바라보지 않고, 실제로 상대방의 뜻을 파악하지도 않고, 오직 자기 기준과 자기 판단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판단 위에서 심판자가 되어버리는 것, 그것이 자기 신념을 우상처럼 여기는 모습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먹었던 선악과의 죄, 곧 선과 악의 판단의 기준을 자기에게 두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람은 소통을 멈추고 스스로에게 갇힌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오늘 말씀에 나타난 바리새인들은 자기 신념을 우상처럼 여긴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바라보면서도 그 사역 가운데 일어난 일들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했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미 우상이 되어버린 자기 신념과 자기 생각이 이 모든 것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폭풍우를 잠재우고,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시고,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혈루병 걸린 여인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통해 이사야 61장에서 선포된 메시아의 사역을 이루어가셨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가 눈앞에 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러한 놀라운 예수님의 사역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신 것과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 금식을 하지 않는 것, 정결예법을 지키시지 않는 것과 같은 일들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자신의 기준이 하나님의 기준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전혀 바라보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 주관이 너무 강하여 객관적인 현실을 왜곡하여 바라본 것입니다.

오늘 말씀 32절에서 34절 말씀을 보면 이러한 모습이 잘 나타납니다.

32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33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34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예수님께서는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이제껏 악한 권세에 사로잡혀 자기를 잃고 살아가던 사람을 주님의 자녀로 회복시켜주신 것입니다. 그저 병이 고쳐친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통치가 드러난 사건이었습니다. 메시아만이 하실 수 있는 하나님 나라를 회복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를 바라본 많은 무리가 이를 놀랍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가운데 이러한 일을 본적이 없다는 경탄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을 바라보는 바리새인의 반응은 차갑다 못해 경악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한 사건을 보고 이렇게 반응을 내놓을 수 있는 지 놀라울 정도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보며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그들은 차마 예수님의 기적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해석하기 위해 예수님을 귀신의 아들이라 비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귀신으로 왜곡한 그들의 반응은 예수님에 대한 최악의 반응이었습니다. 스스로를 가장 경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이 가장 죄인의 모습을 보인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독선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특별한 죄인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에게도 나타날 수 있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정현종 시인의 시처럼, 우리는 오랜 시간 인생이 차곡차곡 쌓여져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렇게 쌓이다보면 우리는 각자가 자기 관점과 자기 생각을 가질 수 밖에 없고, 그것을 스스로 옳다고 여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이것을 과도하게 옳다고 여길 때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자기 생각이 없는 것이 꼭 옳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무골호인이라 부르며 경계합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열심히 배우며, 많은 경험과 지혜를 가진 사람은 강한 자기 생각과 관점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기 생각과 관점을 가지면서도 그것이 우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열쇠는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우상이 될 때에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길과 멀어진다고 하였습니다. 거꾸로, 우리의 생각이 되지 않는 길은 바로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율법이 완성되는 길은 율법의 형식을 지키는 것 뿐 아니라 율법 안에 담겨있는 정신, 곧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앞선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신념과 생각을 굳게 세우면서도 동시에 그 신념과 생각이 우상이 되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내 생각이 옳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의 생각에 귀를 기울입니다. 내가 원하는 길이 있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길을 바꾸기도 합니다. 사랑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를 새롭게 하고, 우리를 갇히지 않게 합니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바꾸는 것이 거꾸로 우리 자신을 스스로에게 가두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우리를 자기 자신을 우상숭배하는 길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사랑이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십자가의 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핵심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랑의 길에 집중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귀신의 왕이라 비난하고, 사람들의 오해와 정죄가 있었어도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선포하는 그 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요, 하나님을 따르는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35절, 36절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예수님께서는 모든 비난을 뒤로 한 채 당신께서 걸어가야 할 사랑의 길로 계속해서 걸어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치시고, 이 땅 가운데 임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들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담겨 있으니, 그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으로 말씀을 따를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통치가 우리 임하였음을 전파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일 것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아파하는 사람들과 연약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만져주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백성들을 고치시고 회복시키시고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온전한 이유는 그 모든 사역이 사랑 위에서 세워진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36절 말씀에는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이 가득차 있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여 기진함이라.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고난과 아픔을 그대로 보시며 그것을 함께 아파하시며, 지극한 사랑으로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결국 십자가의 길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앞서 함께 읽은 시를 통해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라는 것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 고백은 우리에게 소통의 불가능성과 가능성을 함께 알려줍니다. 다른 사람이 삶 속에 켜켜히 쌓여있는 여정과 관점을 무시하고 내 생각만을 붙잡고 살아가면 우리는 바리새인과 같이 계속해서 소통에 실패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가셨던 길처럼, 다른 사람의 삶을 깊이 살피고,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살피며, 불쌍히 여기고 귀히 여기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우리는 새로운 차원의 소통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그처럼 사랑하며 살아갈 때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갈 것입니다.

37절 38절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은 무리에서 제자로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마무리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제 제자가 필요하다, 나를 따를 사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추수할 사람이 필요하다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제자가 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고, 사랑으로 믿음을 드러내며, 사랑으로 복음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온전한 소통을 하며, 사랑으로 주님의 치유하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