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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역할 (2011. 3. 4)

category 주일 설교 2011. 3. 5. 01:41

솔로몬의 재판

16    그 때에 창기 두 여자가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서며 
17    한 여자는 말하되 내 주여 나와 이 여자가 한집에서 사는데 내가 그와 함께 집에 있으며 해산하였더니 
18    내가 해산한 지 사흘 만에 이 여자도 해산하고 우리가 함께 있었고 우리 둘 외에는 집에 다른 사람이 없었나이다 
19    그런데 밤에 저 여자가 그의 아들 위에 누우므로 그의 아들이 죽으니 
20    그가 밤중에 일어나서 이 여종 내가 잠든 사이에 내 아들을 내 곁에서 가져다가 자기의 품에 누이고 자기의 죽은 아들을 내 품에 뉘었나이다
21    아침에 내가 내 아들을 젖 먹이려고 일어나 본즉 죽었기로 내가 아침에 자세히 보니 내가 낳은 아들이 아니더이다 하매 
22    다른 여자는 이르되 아니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이 여자는 이르되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며 왕 앞에서 그와 같이 쟁론하는지라 
23    왕이 이르되 이 여자는 말하기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저 여자는 말하기를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는도다 하고 
24    또 이르되 칼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칼을 왕 앞으로 가져온지라 
25    왕이 이르되 산 아이를 둘로 나누어 반은 이 여자에게 주고 반은 저 여자에게 주라 
26    그 산 아들의 어머니 되는 여자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청하건대 내 주여 산 아이를 그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다른 여자는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 
27    왕이 대답하여 이르되 산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의 어머니이니라 하매 
28    온 이스라엘이 왕이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오늘 본문은 참으로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녔다면 한번쯤 들어봤을 이야기이고, 또 비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지혜로운 솔로몬 하면 반드시 따라오는 재밌는 이야기 정도로 매우 유명합니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지혜로운 솔로몬이 재판을 합니다. 어느 두 창녀가 와서 한 아이를 두고 자기 아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솔로몬은 둘 중 한 사람에게 주기 어려우니 이 아이를 반으로 갈라 주어라라고 판결을 내립니다. 가짜 어머니는 흔쾌히 찬성을 하지만 진짜 어머니인 여자는 펑펑 울면서 차라리 저 여자에게 주십시오. 하며 아이를 포기 합니다. 물론 이 아이는 아이를 포기했던 진짜 어머니에게 돌아가게 되지요. 교회를 다니지 않더라도 거 참, 똑똑하구만 하면서 무릎을 탁 치게 됩니다. 매우 재밌는 일화이면서 탁월함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이야기의 깊은 뜻으로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성경에 왜 들어가 있을까요? 오늘의 설교는 이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이 이야기가 아, 솔로몬이 참으로 지혜로웠구나, 역시 모성애는 참으로 지극한 것이지, 정도의 이야기일까요? 성경에서 이 이야기를 통해 참으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요?

 

제가 이번에 새봄성경학교를 부임한지 한달 만에 처음으로 진행하였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새봄성경학교인데, 성경 내용을 잘 가르쳐주고 싶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첫 설교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강조한 말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고, 또 구원하셨는지 보여주기 위해 쓰여진 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 속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밝히 보기 위해서 그 말씀을 뚫고 들어가야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드는 생각이 아, 성경이 참으로 허투루 쓰여진 부분이 없구나. 내가 깨닫지 못할 뿐 성경은 각각 다 의미가 있구나. 왜 이 이야기가 여기에 쓰여 있는지 다 이유가 있는 데, 내가 알지 못하였구나 하는 점이었습니다. 그레스만이라는 사람이 오늘 이 솔로몬의 비유와 비슷한 이야기가 이 세상에 22가지나 있다고 밝혀냈습니다. 실제로 우리 삶은 생각보다 비슷하고, 생각하는 것도 비슷하고, 느끼는 것도 비슷해서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콩쥐팥쥐 이야기나 신데렐라 이야기나 비슷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 솔로몬의 지혜의 이야기가 열왕기상 3장 16절 이하에 ‘말씀’으로 나타나게 되면서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다른 비슷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교훈 정도를 드러내는 이야기라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어떤 이야기만 뚝 떼어내어 우리의 필요에 따라서 유용하고 유익하게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끝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욥기의 이야기가 친구들이 욥을 빈정대는 이야기, 반어법으로 사용된 줄도 모르고 식당에 붙여놓습니다. 우리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는 말이 복음 안에서 넉넉히 고난을 견녀낼 수 있다는 의미인 줄 모르고, 성취주의를 위한 말씀으로 사용합니다. 말씀은 그 자체로 하나의 유기체와 같아서 전체로 주님의 뜻을 나타내는 역동성이 있습니다. 물론 각각의 구절이 감동이 있지만, 반드시 전체를 고려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거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그 뜻 안에서 해석하고 이해할 때 하나님의 뜻이 더 확실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솔로몬의 이야기도 큰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6절의 첫 시작을 ‘때에’라고 시작합니다. 이 ‘때에’라는 말이 매우 중요합니다. 각 사건의 그 때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자, 크게 함박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달려가 안겼습니다. 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이 말이,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 청혼을 받았을 때에 크게 함박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달려가 안겼습니다. 라는 말이 되면 감격적인 말이 되지만, 장례식 때에 크게 함박 웃음을 지음 그에게 달려가 안겼습니다. 라고 하면 이상한 소리가 됩니다. 어떤 때가 매우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16절에 나오는 때에는 어떤 때에 입니까? 이 재판은 어떤 시기에 일어났습니까? 다같이 3장 1절 부터 15절까지 읽도록 하겠습니다.

 

자 솔로몬은 왕에 즉위하여 기드온에서 1천번제를 드리고 하나님께 듣는 마음을 구하고 재판하여 선악을 구분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솔로몬에게 임하여 곧 하나님의 뜻이 솔로몬을 통하여 이스라엘에 이루어지기를 간청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는 나라로 통치할 수 있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기도 자체가 주의 마음에 든지라라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뜻을 이루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솔로몬을 통하여 이루어짐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더불어 번영도 허락하셨습니다. 당신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곳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함을 보여주셨습니다. 꿈에서 깨었습니다. 성경에서 꿈은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는 데 종종 사용되었습니다. 야곱도 그렇고 요셉도 그렇습니다. 베드로에게도 그랬습니다. 그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드러난 것입니다. 예배가 드려졌습니다. 잔치가 벌여졌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기쁨의 신앙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이 때입니다. 바로 이 때 이 재판 사건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재판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는 사건이 될 것입니다. 이 재판 속에는 하나님의 의가 그대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럼 이 재판을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재판장이라는 마음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6절부터 21절까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등장인물은 창녀 두 명 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아이를 낳는데 도와준 산파 한 명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도와서 낳았을 수도 있고, 홀로 낳았을 수도 있습니다.아무도 없이 두 명 밖에 없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들은 3일 간격으로 아이를 낳았습니다. 해산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아이가 죽은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1명의 창녀가 아마도 몸으로 눌러서 질식사해서 죽였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주장한 다른 여자도 그 아이가 젖을 먹이려고 했을 때 늦게 서야 아이가 죽은 것을 알아냈기 때문에 실제 아이가 죽은 장면은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정확한 사인도 알 수 없습니다. 당시에는 요즘 싸인이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법의학자도 없었습니다. 증인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증언만을 통해서 범인을 가려내야 합니다. 22절에 보면 더 가관입니다. 우리가 재판을 보면 주로 판사와 피고, 판사와 원고 이런식으로 대화를 합니다. 그런데 22절에서는 서로 목소리를 높여 니애니 내애니 하면서 싸우고 있습니다. 가장 신분이 낮은 창녀입니다. 가장 신분이 높은 왕입니다. 제가 중위로 근무하고 있을 때 지금 국방부장관인 김관진 장군이 합창의장으로 우리 막사에 온 적이 있습니다. 정말 숨소리도 안들리게 조용했습니다. 그 위세에 눌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아줌마들은 참으로 안하무인 같습니다. 이것은 이 사건이 얼마나 첨예하였는가를 보여줍니다.

이 사건은 사실 솔로몬에게 무척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신명기 1장 15절에 보면 조장부터 십부장, 오십부장, 백부장, 천부장까지 다스리고 재판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1심, 2심, 대법원 이렇게 가듯이 아마 이 사건도 굉장히 해결이 어려워 각각의 사람들을 거쳐 솔로몬에게까지 왔을 것입니다. 더구나 가장 낮은 계급인 창녀들의 문제였습니다. 가장 어려운 사람들의 가장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권위가 하나님의 지혜로부터 온다고 믿었고, 지혜를 통해 권위를 인정하였습니다. 곧 왕으로서의 자격을 시험하는 일종의 테스트였을것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솔로몬의 판단에 귀를 귀울이고 있었습니다. 구약의 재판은 원칙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23장에선 다수에 의해 부당한 증거가 용납되지 않는다고 하였고, 가난한자들의 재판도 공정하게 해야한다고 하였습니다. 재판을 위한 뇌물은 금지되었습니다. 신명기 1장에 따르면 외적인 것으로만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신명기 17장에 따르면 철저히 사실을 확인하고 재판하도록 하였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도록 하였습니다. 증거에 기반해 공정하게 재판해야하는 것이 율법에서 말하는 재판의 방법이었습니다. 증거가 없을 경우 뽑기 등을 하여서 하나님께 맡기는 방법밖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재판의 경우도 실제 볼 수 있는 증인이나 증거가 없어서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솔로몬 왕이 선택한 방법은 조금 달랐습니다. 마음속의 내면을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사람은 마음 속 깊은 곳을 건드리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솔로몬이 실제로 아이를 죽이려고 했다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사랑, 즉 어머니의 그 사랑, 모성애를 이용하였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겉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속 깊이 있는 진심을 드러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허위나 가식, 거짓을 이겨내는 진실, 진심,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온전한 진실됨 속에서 드러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의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은 드러나게 됩니다. 돈으로 안정감을 얻는 사람은 돈이 사라지는 순간 그 실체가 드러납니다. 사람으로 안정감을 얻는 사람은 사람이 사라지는 순간 그 실체가 드러납니다. 지위나 권력이 안정감이 되고 자부심이 되는 사람은 그것이 사라지는 순간 그 실체가 드러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어야 합니다. ‘진정성’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서 나타난 뜻은 어떠한 모습이었을까요.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나타난 진심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창녀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을 마음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애절한 창녀의 마음은 어머니의 마음이었습니다. 이 창녀에게 이 자신이란 어떤 의미였을까요. 드브리스에 따르면 당시 창녀는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부모들에게 의해 팔린 딸들로 노예들이었습니다. 그런 경우가 아니면 결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전혀 갖지 못했거나, 남편들을 잃은 가난한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최하층민에 가족도 없는 극빈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철저히 외롭고 힘든 인생이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남편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마 사생아로 아이를 낳았을 것입니다. 애 아빠가 누구인지도 모를 것입니다. 이 아이는 이러한 여인들에게 유일한 가족이 될 것입니다. 물론 처절하게 가난하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갖는 피붙이 가족일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자신의 목숨보다 귀한 자식일 것입니다. 낳는 데 도와줄 산파하나 없는 상황에서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처절하게 낳은 아이일 것 입니다. 지금 이 창녀는 그 아이를 빼앗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곧 존재자체를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마음이 찢어지는 순간일 것입니다.

 

다른 창녀는 어떠합니까? 왜 그 창녀는 이 아이를 빼앗았을까요? 우리는 상식적으로 내 아이가 죽었다면, 내 아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데 더 큰 마음을 쓰지 다른 아이를 뺏을 정신이 없을 것입니다. 이 여자는 이기적이었습니다. 똑같이 처절한 상황에서 이 창녀는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쪽으로 삶의 방향을 이끌어왔나봅니다. 이 창녀는 가족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아이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가족이 없는 창녀에게 아이는 당장은 힘들지만 장기적으로는 부양을 해줄 사람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가 자기 아이를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과 수치심을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슬픔을 감당할 자신이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그 존재자체로 아들을 사랑 했다기 보단 일단 아들 역할을 할 아이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탄과 세상은 언제나 우리를 ‘역할’로서 몰아붙입니다. 상황이 처절할수록 더욱 역할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가족이 힘든 일을 함께 겪을 때 이 힘든 일을 함께 해줘서 고맙다고 말하기 보단 당신이 한 역할이 무엇이냐고 되묻습니다. 회사에서 상황이 안 좋아지면 서로가 서로를 존재로 귀히 여기기보단 서로에게 책임전가를 하고 쫓아내려고 애씁니다. 정치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습니다. 이 악한 창녀와 같습니다.

 

결정의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긴박감과 긴장이 궁궐 안을 둘러쌓습니다. 솔로몬이 명령한 서슬 퍼런 칼날이 아이의 몸통에 겨누어 졌을 것입니다. 이제는 돌이킬 수 도 없습니다. 이제 아이를 포기하는 것은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이를 도둑질 한 것은 신명기 8계명을 어기는 일입니다. 아이를 유괴하는 것은 신명기 24:7절에 따르면 사형입니다. 위증하는 것은 신명기 19:16-19절에 따르면 그 행위대로 보복하라고 했습니다. 사실상 살아날 길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습니다. 아이가 죽던지, 내가 죽고 아이를 포기하던지 결정하는 막다른 골목이 되었습니다. 만약 재판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아이가 죽을 일이 없다는 가정이라면 끝까지 싸워서 저 자기 아이를 죽이고도 아직까지 방치한 채, 내 아이를 빼앗아 가려는 저 여인에게서 내 아이를 지켜내겠지만, 아이가 당장 죽게 생긴 긴박한 상황이 돼버린 이상 누가 내 아이인가를 밝히는 것보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밝히는 것보다 내 아이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설령 내가 죽더라도 아이를 살려야 합니다. 본능적으로 마음속 깊은 곳, 이 마음이란 단어는 창자, 더 나아가 자궁을 의미합니다. 창자 깊은 곳, 자궁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사랑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아이를 구합니다. 이것은 판단이라기보다 본능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나라는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을 목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목도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의로움을 목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한일서 4:16) 죽어가는 우리들 앞에 그 분은 이 창녀처럼 조건 없이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로부터 무언가를 받기 위하여, 우리가 필요해서 조건적으로 우리를 가지려하는, 우리를 수단화하려 하는 저 악한 창녀의 마음이 아니라 이 어머니의 마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누구누구는 회장 되서 헌금을 많이 내서 내가 사랑하노라, 누구누구는 봉사를 많이 해서 내가 사랑하노라, 누구누구는 아무것도 안하면서 무슨 면목으로 나한테 예배드리러 왔어? 이런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마치 무슨 세속적으로 볼 때 큰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들을 우리보다 더 하나님이 더 사랑하시겠지 하는 생각을 갖게 될 때가 많습니다. 많은 신앙서적들이 은근히 그것을 또 부추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식으로서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심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궁으로부터 불붙는 마음으로 본능적으로 목숨을 내던져 외치며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반응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이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니인 창녀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 했다면, 이제는 이 창녀가 나다, 하고 생각해봅시다. 열왕기상하의 여러 가지 주제가 있는데 그 중 핵심주제 중 하나는 왜 이스라엘이 망했는가..입니다. 그 잘나가고 번영하고 영화로웠던 솔로몬의 왕국이 왜 망했을까? 이것에 대한 답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우상숭배입니다. 그 이름도 유명한 바알과 아세라. 아스다롯, 그모스. 밀곰 신앙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왜 포기하지 못했을까요?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전쟁의 신’, ‘산의 신’ 정도로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발전된 농경문화를 가지고 있던 가나안의 농경신, 각각에 필요에 따른 농경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비슷한 전통이 있습니다. 대청에 성주신, 안방에 삼신, 부엌에 조왕신, 뒤뜰에 지신, 화장실에 측간신, 장독대에 천룡신, 마당에 터주신, 우물에 용왕신, 광에 업신 이렇게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단군신화에도 풍백, 운사, 우사 이런 신들이 있습니다. 다 농사에 필요한 신들입니다. 왜 이렇게 신들이 많을까요? 각각에 역할에 필요한 신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신에 대해서 생각할 때 신을 역할로 받아드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는 어떻습니까? 내가 아프면 갑자기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만 제일 중요해집니다. 내가 배고프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갖다주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만 제일 중요해집니다. 내가 어려움에 봉착했거나 내가 어떤 시험과 같은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가 있으면 출애굽의 승리와 함께하신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만 제일 중요해집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하신분이시고 실제로 여전히 역사하시며 또 우리의 삶의 신음까지 듣고 다 함께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전히 역할로서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만 사랑하고, 여호와 이레와 닛시의 하나님만 찾을 때에도 기다려주시고 끝까지 사랑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우리가 필요로하는 것만 해결해주시고, 우리의 도구로만 하나님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님께서 요즘 철드는 것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 하십니다. 입이 철드는 것이 곧 짜장면이 맛없어 지는 것이다. 귀에 철드는 것이 하나님께 말하기 보단 듣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 철든다는 것이 저에겐 항상 화두입니다. 아직 어려서, 철이 안들기도 하였고, 평소 철이 없는 게 콤플렉스이기도 해서, 어떻게 하면 철이 들수 있을 까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친구 아버지를 한 번 만났는 데 그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예전엔 아버지가 해주신것도 없고, 학교도 제대로 안보내주시고 해서 불만이 많았는데, 나이가 올해 90이 넘어가시니, 아 이제 아버지께서 제발 살아만 계셨으면 하는 마음이 많이 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어떤 역할을 해서 좋은 것이 아니라 살아계시고 존재하신다는 그것 하나만으로 참 좋다는 것을 알게되었다는 것입니다. 아.. 싶었습니다. 제 아버지도 이제 올해 환갑이신데 항상 건강하셨으면 하는 마음이 듭니다.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이 점점 많이 듭니다. 쪼금 철이 드는 것 같기도 합니다.

 

두 창녀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두 창녀의 본심이 드러난 때는 솔로몬의 재판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찢어지는 순간, 우리의 본심은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역할로만 생각했다면, 우리가 원하는 그것이 찢어지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떠날 수 있습니다.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자 악한 창녀니깐 우리는 간단하게 딱 이 여자가 나쁜 사람이야라고 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도 언제든 이렇게 열악하고 처참한 순간이 찾아올 수 있고, 우리에게 이런 순간이 찾아올 때 우리도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말했듯이 그녀는 가난하고, 외로운 불쌍한 여인이었습니다. 아이를 갖게 되었을 때 무척 행복했을 것입니다. 비록 함께 기뻐해줄 남편도 없고, 가족도 없지만 그 생명의 경이로움 앞에서 기뻐했을 것입니다. 발로 찰 때, 하루하루 배가 불러올 때 그녀만의 행복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아이가 죽었습니다. 나로 인해 죽었습니다. 절망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녀는 그래서 그 절망을 이기지 못해 다른 여인의 아기를 빼앗았던 것입니다. 그녀는 그 슬픔 앞에서 존재로 슬퍼하기보다 그것을 대체할 무언가를 찾았습니다. 대체할 역할을 하는 그것은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결정적인 순간 그녀는 분노합니다. 그 자식역할을 하려고 했던 그 아이를 죽이는 데 기꺼이 동참합니다. 그녀는 그것이 공평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이 차가워졌습니다. 죽음에 둔감해졌습니다. 하나님도 없고, 사랑하는 아들도 없습니다. 자기의 슬픔과 분노만 있습니다.

 

베트남에서 한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그분은 젊은 시절 참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가난하지만, 교회에 봉사하고 싶은 마음에 유일한 재산인 일에 사용하던 승합차로 교회 차량 봉사까지 하셨습니다. 문제는 거기에서부터 터졌습니다. 주일에 교회에서 승합차로 봉사하던 중 차가 큰 사고가 나서 완전히 망가진 것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도움을 줄까 기대했지만 교회는 이 아저씨를 외면하였습니다. 너무도 낙담해서, 등산을 하던 중 우연히 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절의 종소리가 웅~ 울리자 눈물이 펑펑 나고 그곳에서 통곡을 하였답니다. 그날로 그 분은 불교로 개종하였답니다. 그런데, 불교로 개종하자마자 갑자기 사업이 잘되기 시작하였고, 절에 헌금을 내면 낼수록 더욱 번창하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이렇게 돈써가면서 여행도 할 수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이 아저씨는 낙담하였습니다. 교회가 사랑으로 감싸주지 못했습니다. 배려가 부족했습니다. 삶을 들여다보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교회 공동체의 무관심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가장 낙심한 순간 그 아저씨는 혼자였습니다. 이 악한 창녀도 혼자였습니다. 그 절망의 순간을 버텨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존재로서 사랑받고 있음을 알지 못하였고, 또한 존재로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사랑이 아니면 큰 파도 앞에서 버텨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존재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이런 것을 해주시지.. 이렇게 역할로서 사랑하게 되면 그 역할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쓰러집니다. 그 분이 우리를 우리의 존재 자체로 김동희면 김동희 이렇게 사랑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분을 존재로서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모든 무너짐과 쓰러짐 앞에서 끝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시고 부활로써 희망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바라봐야하고 부활을 소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존재론적 사랑에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무너질수록 더 그래야 합니다. 절망적일수록 더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일도 안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 그때가 하나님 자체로 우리가 사랑하고 소망하고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가장 큰 처절함으로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알고 사랑할 때 그곳에 다시 하나님의 생명의 희망이 선포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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