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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정체

category 주일 설교 2011. 4. 9. 00:50

마태복음 17장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       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저에겐 어릴 적부터 항상 고민해오던 일종의 인생의 숙제 같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제 가족은 어릴 적부터 항상 가난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님께서 능력이 없으신 것도 아니었고, 불성실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 아버지는 신앙생활 열심히 하시면서 나름대로 능력을 가지고 참으로 성실하게 사업체를 운영해오셨습니다. 인격적으로도 굉장히 훌륭하시고, 참 지혜로우시며, 탁월한 능력도 있으십니다. 그런데 우리 집은 참으로 가난했습니다. 저로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항상 어머니의 기도제목은 가정 경제가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매년 새해가 되면 교회에 가시거나 기도원을 가셔서 금식기도도 하시고, 목사님들께 기도도 받고 하시면서 항상 희망적인 메시지들 가지고 오셨습니다. ‘올해부터는 정말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족을 참으로 사랑하신다.’ 와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매년 형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지금도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한 두해 정도는 아직 때가 아닌가 보다 라고 생각하고 이해하려 했지만, 결국은 그 축복의 레파토리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삼십년이 넘는 세월 하나님께서 이렇게 거짓말을 하실 수가 있는 지. 도무지 가시적인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 실망하였습니다. 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축복의 약속 따윈 하지 않으셨고, 그것을 간절히 원하는 제 어머니와 그것을 적당하게 채워주려는 목사님의 합작품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적어도 재정적인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에 어떤 신뢰도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음속에 큰 실망이 있을 뿐 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변화산 사건 이전에 유명한 사건이 하나 나타납니다. 바로 예수님의 수난 예고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변화산 사건과 곧 바로 이어지기 때문에 변화산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자기가 고난 받아야 할 것을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사건이었습니다. 내용을 보면 베드로와 예수님이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사실 대화라기 보다는 격한 논쟁에 가까웠습니다. 베드로는 그 때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대표선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저를 포함한 우리들의 생각도 그대로 담겨있지요. 비교하자면 제가 제 인생 속에서 하나님을 잘 믿고 축복을 받는 다는 것이 곧 생활의 안정이란 것이라 생각했던 것처럼, 베드로는 메시아가 나타난다는 것은 이 도탄에 빠진 나라를 로마로부터 구원하고 부국강병 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폭정 속에서 신음하고, 가난과 질병 속에서 고통받는 상황에서 아직도 그가 할일은 많아보였습니다. 여전히 영광은 멀어보였습니다. 사실 아직 제대로 무언가 보여주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가 십자가에서 죽는 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격렬히 저항합니다. 함께 말씀을 다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에서 23절입니다.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베드로는 당대의 유대인들의 메시아관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왕의 자손으로서 위대한 정치지도자이어야 하며 동시에 유대 법에 정통하고, 계명을 지키며, 카리스마가 넘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솔로몬과 같이 영감이 많고 지혜로워서 훌륭한 재판관의 역할을 수행하고 군사지도자로서도 훌륭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일을 마치기까지 절대로 죽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생각은 예수님의 생각과 완전히 엇갈려 버렸습니다. 제 마음에서 원했던 축복과 제 삶속에 나타난 결과가 달랐을 때 마음이 엇갈린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사탄에 내 뒤로 물러가라고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베드로처럼, 그리고 저처럼 우리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신앙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정면으로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왜 이렇게 부딪치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해주실 법도 하신데 어떤 부분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면하신다고 생각할 정도로 무관심하신 것 같습니다. 삶이 힘들고 어렵다면 우리는 그 문제가 더욱 더 크게 느껴집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았던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동네에 살았던 베드로경우나 항상 재정적인 어려움을 느꼈던 저의 경우를 봐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허탈감마저 들게 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한번 거꾸로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베드로도 저를 포함한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이었습니다. 제 담임선생님께서 장로님이셨습니다. 이 선생님께서 참으로 다정하셔서 기억에 많이 남는 데 그 중에 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우리가 딱지치기에 빠져서 수업이 끝나고도 집에 돌아가지 않고 학교에서 계속 딱지를 쳤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딱지를 다 딸 때까지 집에 돌아가지 않을 것 같으니, 딱지를 그만하라고 하시는 대신 당신 스스로 딱지를 만들어 우리와 함께 딱지치기를 하셨습니다. 결국 우리는 딱지를 다 잃고서야 그 딱지치기를 그만둘 수 있었습니다. 사실 딱지 그 자체가 가치 있기 보다는 딱지를 치는 놀이를 통해 맺어지는 관계가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놀다보면 딱지에 집착하게 되어서 친구랑 싸우기도 하고, 딱지를 따는 데 몰두하여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입장에선 이 딱지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법, 그리고 딱지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신앙도 저의 신앙도 딱지에 집착하는 아이들 수준의 신앙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궁극적인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 우리의 생각을 깨기에 예수님의 복음이 오히려 파괴적으로까지 보였습니다. 제자들이 신앙을 딱지에 집착하는 수준으로 생각할 때, 예수님은 자기가 죽어야 한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16장 24절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딱지를 버리고 집에 돌아가라. 딱지에 집착하지 말고 선생님과 친구들을 보라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게 사실 딱지면 그냥 버리겠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일정한 안정을 갖는 데 꼭 필요한 재산과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그 문제는 가볍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 속의 자기십자가라는 말에 고통과 아픔을 동반한 고행과 수행을 떠올리고 부담스러워하고 어려워하게 됩니다. 도대체 지금 문제도 어려운데, 우리더러 십자가까지 지라고 하시다니 너무하신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이 말씀의 참 의미가 무엇일까요? 딱지를 버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도대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25절을 이어서 읽어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그 답은 예수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 복음에 있습니다. 그 길이 생명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네 목숨을 내 놓아라 그럼 내가 생명을 주지. 하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걸만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이 귀하다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어라 라는 이야기는 자신을 스스로 고통 속에 빠뜨리고 수행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가치가 있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는 고통이 따르더라도 반드시 얻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그분의 생명을 얻는데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단순히 죽어서 천국가자. 정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생명의 역사, 구원의 역사는 성경 전체를 꿰뚫고 있는 하나님의 그분 자체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창세기에서 우리를 창조하셨던 모습에서부터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지금의 우리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선한 의도로 무언가를 창조하려고 해도 우리가 원하지 않는 문제를 일으키기 일쑤입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우리는 외롭고, 우리는 매순간 아파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는 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너지고 타락하고 죽어가는 우리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다시 그분의 생명 안에 거하게 함으로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이란 우리를 창조하실 때 나타나신 완전함 그 자체입니다. 그 생명가운데 거할 때 우리는 온전한 우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능력이 거침없이 분출되는 우리가 될 것입니다. 진정으로서 약동하는 우리가 될 것입니다.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참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우리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으로서 하나님의 생명이었습니다. 그 생명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장의 고난과 육신의 죽음이 있더라도 그 길을 가셔야 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가야만 하시는 길 이었습니다.


그 길을 가려고 하실 때 나타난 사건이 변화산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길이 옳다고 인증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를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 말씀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마침내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뜻. 그 하나님의 생명 사건으로 가는 그 길을 하나님께서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 이후로 수난을 당하시고, 죽음의 골고다로 올라가셔서 죽으셨습니다. 베드로의 눈으로 볼 때는 철저한 실패사건이었습니다. 제가 여전히 가난한 우리 집을 보면서 실패했다고 생각했던 것과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수난의 예고가 정점에 다다랐을 때 이 변화산 사건을 통해 그 영광을 드러내심으로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십자가 사건으로 죽음이 그를 집어삼킨 것처럼 보였을 때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과 영광이 온전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묵묵히 십자가로 가셨고 부활하심으로 그가 옳았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베드로는 틀렸고, 저도 틀렸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예수님을 믿었다면 그것은 틀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생명의 구원사건을 받아 드림으써 절대적인 구원을 얻으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저는 30살이 다 되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에서 끊임없이 주신 축복과 우리 기도에 대한 응답은 생명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보여주셨던 그 하나님의 생명이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절대적인 사건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내가 조금 더 잘살고 조금 더 좋은 대학에 가고 내가 조금 더 성공하고 하는 차원의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을 뿐 그것을 넘어서는 절대적인 생명의 구원사건을 아는 것이 곧 축복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물론 삶이 녹록치 않고, 처절하게 힘든 순간에는 그것만큼 내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없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생명사건을 마주친다는 것은 그것을 완전히 압도할 만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지언정, 내가 굶어 죽을 지언정, 내가 외로워 죽을 지언정 붙잡아야할 사건.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셨던 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욥이 지독한 고통 속에 있을 때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욥을 만나주셨고 욥은 그 순간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기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뵈옵나이다.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 그에겐 모든 것을 넘어선 절대적인 사건이 된 것입니다.


로마 감옥에서 극심한 고통 속에 있을 때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빌 4:12~13)


나는 비천에 처할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이해한 순간 모든 삶의 한계에도 그 생명을 붙잡고 나아간 것입니다. 가장 귀한 소중한 것은 그것과 아무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가장 소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통해 드러난 생명의 사건을 굳건히 붙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우리는 그 사건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변화를 보고선 초막을 지어 눌러 살자고 이야기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표적에 현혹되는 우리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환상 속에 빠져있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그들에게 손을 대시고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시며 그들을 이끄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먼저가신 그 길을 따라서 걸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속에 매순간 나타나는 십자가의 길들을 걸을 수 있게 될 것이고, 십자가의 고난도 죽음도 결코 죽일 수 없는 그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를 그의 영광 안에서 부활하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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