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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 주일 설교 2011. 4. 9. 00:53
에베소서 5장
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1)진실함에 있느니라 
10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오래전 선지자 이사야의 선포입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남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는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이사야 9장 1절에서 2절 말씀입니다.

 

이제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는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에베소서 5장 8절

 

신앙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음생활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제가 삼각교회를 와서 사역을 시작한지 두 달 정도 되었습니다. 우리교회를 보니 제가 어린 시절 다녔던 고향 교회와 꼭 닮았습니다. 제 고향교회는 올해로 80년 정도가 된 교회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가족들이고, 대부분의 신자들이 모태신앙입니다. 어릴 적부터 함께 지내던 동무들이 평생을 같이 다니고 있고, 가정사부터 숟가락 숫자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새로운 교인들이 들어오기는 쉽지 않지만, 막상 오래된 교인들로서는 참으로 편하고,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교회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추억도 많고, 재미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기 계신 분들도 가족이 함께 다니신 분들이 대부분이고, 신앙생활도 몇 십 년씩 하셔서 이제, 교회생활이 삶의 일부가 되신 분들이 대부분이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태신앙으로부터 내려온 오랜 신앙생활의 맹점이 있습니다. 신앙이란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신앙에 대한 간절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간절함이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어떤 발등에 떨어진 문제에 대한 간절함과는 조금 다릅니다. 우리는 시험을 보기 전에 느끼는 간절함, 아픈가족이 있을 때 느끼는 간절함, 취업을 앞두고 있을 때 간절함 같은 간절함이 하나님에 대한 간절함이라 착각하는 데, 이런 종류의 간절함은 그 문제가 해결됐을 때는 자연스럽게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존재에 대한 간절함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 그 자체에 대한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나 그 간절함이 무엇인지조차 잘 모릅니다. 왜 그 간절함이 필요하고, 그 간절함은 어떻게 생기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하나님께 대한 간절함이 없다는 것은 신앙이 궁극적으로 무슨 의미인지를 모른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시긴 하셨지만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복음을 통해 구원 받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 구원이 내 삶에 어떤 사건이었는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저 가볍게 신앙생활을 신적인 힘에 기대어 어떤 어려움을 해결 받고, 나아가 일종의 마음을 수련하고, 어떤 정의를 도모하고, 교훈을 받아 바르게 살고, 죽어서 천국가기 위한 수단 정도로 생각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으나 도무지 깨닫지 못한 제자들과 같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빛이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빛이 되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전에는 어둠이었다.’라는 말씀을 깊이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은 이 어둠과 빛 사이의 간극만큼 그 깊이가 성장하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어둠속에 있었는지 또한 그 생명의 빛이 밝은 것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밤하늘이 어두워야 별이 영롱한 것처럼,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눈이 없이는 그 빛의 실체도 알 수 없습니다.

 

알베르 까뮈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쓴 책 중에 ‘시지프스의 신화’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시지프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시지프스라는 사람은 신들을 거역하고 능멸한 죄로 영원한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돌이 항상 산꼭대기에 있도록 하는 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돌이 산꼭대기에 올려놓기만 하면 다시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시지프스는 다시 밑으로 내려가 끙끙대면서 산꼭대기에 돌을 올려놓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돌은 다시 굴러내려 갔고, 결국 시지프스는 그 형벌을 영원히 받아야할 운명에 처해져 버렸습니다. 이 시지프스를 보면서 까뮈는 인간의 삶이 이것과 같다고 이야기 합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고통의 강도는 다르지만 우리의 문제는 끊임없이 운명처럼 우리를 따라 옵니다. 돌을 올리면 다시 굴러 떨어지듯이 한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또 다른 문제들이 다가옵니다. 어떤 사람에게 삶은 지긋지긋 합니다. 이 지긋지긋한 삶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이런 사람이 아니더라도 어떤 사람에겐 ‘가난’이, 어떤 사람에게는 ‘분쟁과 다툼’이, 어떤 사람에게는 ‘마음의 상처’가, 누군가에는 ‘이별’이, 어떤 사람에게는 ‘분노’가, 어떤 사람에게는 ‘건강하지 못한 몸’이, 어떤 사람에게는 ‘열등감’이 삶을 힘겹게 합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문제를 지고, 바위를 끌어올리는 시지프스처럼 계속 올라가야만 합니다. 죽기까지 끝도 없는 문제들입니다.

 

더욱이 결정적인 문제는 우리에게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도 생명을 창조하지 못합니다. 생명을 태우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루하루 우리는 생명을 지우고 살아갑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던 어제, 그제, 일년, 지난 수십년은 먼지와 같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누구도 시간을 되돌릴 수 없고, 시간을 창조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져 갑니다.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조금도 자유로울 수 없는 삶입니다. 성경은 어둠은 곧 죽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사야 59장 9절에서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정의가 우리에게서 멀고 공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둠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에 행하므로 우리가 맹인 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 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은지라 우리가 곰 같이 부르짖으며 비둘기같이 슬피 울며 정의를 바라나 없고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서 멀도다.

 

인생이 이와 같습니다. 인생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풀리지 않는 숙제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어둠이었음을 깊게 인식할수록 빛이 무엇인지를 깨닫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3절에서 세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멀리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내가 곧 어둠이었구나, 내 삶이 곧 어둠이구나, 이 땅이 어둠이구나 라고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시작은 여기서부터 입니다.

 

세상은 이 어둠을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구원을 추구합니다. 어둠속에서 아우성을 칩니다. 그러나 빛이 없는 곳에서의 방식은 어둠일 뿐입니다. 빛을 볼 수 없는 곳에서는 희망이 없습니다. 삶의 의미가 없습니다. 나름대로의 방식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게 만듭니다. 자기 삶의 허무함과 고통, 무의미함을 넘어서는 방식을 자기 스스로에게 찾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합니까? 성경은 그러한 방식에서부터 오는 모든 결과를 죄라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이 곧 이 어둠 가운데 저지르는 죄악을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오늘의 본문 에베소서 3~5절을 보면,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어둠속에서 구원을 향한 인간의 방법인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난 적어도 탐욕스럽지는 않아. 난 적어도 간음하진 않았어. 난 순결하고 난 거룩해. 나는 그들과 달라 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그들과 선을 그으려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어둠속에 거하는 한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결국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과 같은 우상숭배일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우리에게서 찾는 모든 행위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고대시대 종교제의에서의 음란한 행위는 풍요로움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들은 관계를 맺고 다산을 하는 것을 풍요와 연관 지었습니다. 생명이 그곳에서 나온다고 착각하였던 것입니다. 남유다 아사랴 왕은 부유한 것이 곧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다 예언자들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바벨론, 페르시아, 이집트 모두 자신의 능력을 구원이라 생각하다가 멸망당하였습니다. 성경은 분명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이자 생명은 오로지 하나님밖에 없으며, 나머지는 어둠 곧 죽음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제가 여행을 하면서 한 가지 느낀 점이 있습니다. 외지에서 한국 사람끼리 처음 만나면, 자신을 소개하고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이 인사를 할 때 이 사람이 자신의 토대를 무엇으로 두고 사는 지 분명히 드러납니다. 자기 자신 그 자체로 자신을 소개하고 자신을 보여주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정말 자신을 설명하기에 꼭 필요하지 않은 무엇인가를 첨부해야만 직성이 풀립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삶의 토대가 학벌인 사람은 굳이 다른 사람의 학교를 물어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학교를 말해줘야만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자신을 드러내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를 물어보는 사람의 거의 대부분은 자기가 좋은 학교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좋은 집에 살고 돈이 자기를 드러내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꼭 자기가 사는 지역을 말하고 싶습니다. 안양에는 동안구와 만안구가 있는 데 동안구는 평촌, 범계지구가 있는 잘사는 지역이고, 만안구는 서민들이 사는 지역입니다. 거의 대부분은 평촌 산다, 범계 산다고 이야기하지 안양 산다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자시는 사는 곳이 자기를 설명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토대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삶의 토대가 하나님 아닌 어둠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고백하지만, 여전히 어둠속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해매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다 어둠속에 있는 것들입니다. 어둠속에 있는 것으로는 어둠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절망적인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선포합니다.

 

이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이제는 빛이라라고 선포합니다.

 

성도여러분,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빛입니다. 빛이 될 것이다가 아닙니다. 빛이라 입니다.

 

비슷한 구절이 이사야에 있습니다.

60장 1절에서 3절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이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포로기에서 돌아온 이후였습니다. 완전히 황폐해진 땅, 아무것도 없는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이제 하나님께서 이루실 새 예루살렘을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첫해, 두해는 기대가 있었겠지만 수십 년이 지나도 예전 다윗 시절과 같은 영화는 돌아올 것 같지 않아보였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부강하고 발전된 나라가 생겨야 이 어둠 같은 세상에서 빛이 임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은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였습니다. 그들을 황당했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데 빛을 발하라니, 저 바벨론, 저 페르시아, 저 이집트 같이 영광스런 나라가 되어야 빛을 발할 터인데, 그것은 고사하고 제대로 나라꼴을 갖춘 나라 하나도 만들지 못한 우리가 여전히 독립은 멀어 보이는 이 황폐하고 망한 도시 예루살렘에서 빛을 발하라니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여기에 있습니다. 빛은 우리가 어둠속에서 본 어둠의 방식이 아닌 전혀 다른 하나님의 방식 곧 빛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하시면 그것이 곧 빛이라는 것이라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면 그곳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곳에 어둠이 사라지고 구원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빛은 무엇입니까? 생명입니다. 빛은 무엇입니까? 구원입니다. 빛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은 1장 4-5절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같은 장 9절~14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적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8장 12절입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어 그 빛을 예수를 통해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빛이 되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더 이상 시지프스가 겪는 죽음과 어둠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구원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부자이든지 가난하든지, 노인이든지 어린이든지, 선하든지 악하든지, 건강하든지 병이 걸려있든지, 혹은 장애인이든지, 성직자이든지 창녀이든지, 대통령이든지 노숙자이든지, 사장이든지 용역하청업체 비정규직 시다이든지, 서울대를 나왔던지 학교를 못나왔던지, 찬양을 잘하든지 음치이든지, 십일조를 백만 원씩 내든지 천원을 내든지, 온갖 천사의 말로 방언을 잘하든지 나는 혀가 굳은자입니다 하며 기도를 어리숙하게 못하든지, 수백만원짜리 가방을 들고 다니든지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든지, 잘생긴 외모이든지 초라한 모습이든지, 백인이든지 흑인이든지 어떠한 사람이든지 전혀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빛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 어둠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는 빛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깨달아 아는 것이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우리는 빛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어둠이 끝이 없이 깊고 깜깜했던 것처럼 우리의 빛은 끝이 없이 밝고 빛이 납니다. 그 빛은 시지프스의 돌을 집어 던져버렸습니다. 그 빛은 죽음이 더 이상 우리를 묶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쳐해있든 우리는 궁극적으로 살아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로서 모든 것을 실제로 보여주셨습니다.

 

시편 50편 1-2절입니다.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부터 해지는 데 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빛의 자녀로서 살 것을 권면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빛의 자녀로 사는 것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어둠의 속성이 음란과 더러움과 탐욕이라면, 빛의 속성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빌립보서에서 말하는 의의 열매와도 연결되어 있고, 갈라디아서에서 나오는 성령의 열매에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방식대로 구원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함으로서 빛이 됨으로 구원을 받았을 때 나타나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분의 빛이 된다는 것은 곧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의 빛은 끊임없이 우리의 성품을 비추어 변화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그 빛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해 보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매순간 그분의 빛에 합당한 삶에 살도록 고민하고 부딪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윤리는 정답이 없습니다. 항상 그분의 빛에 우리를 비추어야만 그 뜻대로 살 수 있습니다.

 

나아가 어두운 일에 참여하지 말고 책망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잘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넌 이것을 잘못했어 하며 정죄하라는 이야기라기 보단, 우리가 빛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 구원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빛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 자신의 방법으로 구원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우리가 생각하는 죄인 것입니다. 죄를 지적한다고 해서 빛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빛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구원의 방법이 다른 데에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들의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음을 증언해야 합니다. 아이 손에 있는 위험한 물건을 빼앗기 위해서 아이에게 아무리 설득해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더 좋은 물건을 주면 위험한 물건을 내려놓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등경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우리는 빛을 선한행실로 드러내야 합니다. 진실된 삶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나눔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생명을 얻고, 어둠을 이겨내었음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그 충만함이 드러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고 우리가 이러한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고백했던 말씀이 우리에게 똑같이 실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어두움에 빛이 될 것입니다.

 

빛이 없는 삶은 허무합니다. 구원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에 있는 사람은 그것을 더 잘 압니다. 나름대로 성공한 제 친구들, 이제 30밖에 되지 않은 친구들이 벌써부터 그 허무함과 무의미함을 고백합니다. 그것은 절망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세상에 빛으로 서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 어둠의 세상에 생명의 빛이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드러난 예수님의 생명으로 세상에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시리라 하셨느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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