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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4:9-22 (2015.12.19. 아침묵상)

category 묵상/디모데후서 2015. 12. 19. 08:00

<말씀>

디모데후서 4장

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12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13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14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15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19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20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노니 

21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22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나눔>

얼마전 정성훈 목사님과 말씀 나눔을 하면서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주님을 위해 죽는다.’는 것과 동의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며 저는 새삼스레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주님을 위해 산다고 이 일을 하고 있는데, 난 과연 죽을 수 있을까? 정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지금 당장 다 내려놓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 질문 앞에서 저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죽음’이라는 것이 개념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죽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아내와 오랜 헤어짐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껏 함께 했던 수많은 추억들이 빛바랜 슬픔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있을 수많은 삶의 여정의 기쁨과 슬픔, 행복과 위로를 모두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우리 아버지와 어머지가 한평생 자녀 잃은 슬픔(저는 누나를 잃은 아픔이 있습니다.)을 더욱 지고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매 어버이날마다, 매 명절마다, 매 제 생일마다 사무치는 그리움과 슬픔으로 잠 못 이루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내 아들이 평생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는 것이요, 내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배울 수 있는 수많은 삶의 지혜와 용기를 잃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는 모든 것, 목욕, 달리기, 캐치볼, 여행, 공부, 결혼 등과 같은 것을 그리움 속에서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친구들, 교회의 동역자들, 학교의 선후배들 모두 깊은 아픔과 슬픔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죽음 앞에서 나는 초연할 수 있을까? 기꺼이 나는 죽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저는 죽음앞에 망설이는 사람, 두려워하는 사람, 거절하는 사람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오늘 바울의 심정은 어떠한 심정이었을까요? 그가 오늘 말씀을 적는 이 순간 그는 죽음을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가장 사랑하는 동역자이자 제자인 디모데에게 이러한 심경 속에서 담담하게 그의 삶을 정리하고, 나아가 그 삶을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죽음의 현실을 생생하게 직면하면서도, 그 죽음을 뚫고 들어오신 예수님의 부활을 안다는 것, 그것을 기뻐하고 감사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알고 고백하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알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주님을 아는 은총을 갈망하는 것이지요.


터키 선교를 준비하면서 ‘죽음’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어제 이러한 고민들을 기도하면서 아뢰니, 주님께서는 그 고민의 초점을 저에게서 제가 만날 터키의 난민들로 옮겨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두려워하고 고민하는 죽음의 현실’을 살고 있는 이들이 바로 네가 만날 난민들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현실의 깊은 슬픔과 아픔에 네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가주길 원한다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함께 울어주고, 함께 아파해주는 것, 그리고 기도하고 섬겨주는 것 그것이 저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합니다.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은총을 함께 누리는 것, 곧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함께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저’와 ‘우리’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고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