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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2019.11.17. 주일예배 설교)

데살로니가후서 3장
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7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8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11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12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지난 14일 장 목사님께서 한국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마지막 길을 배웅해주고 왔는데, 참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어린 시절 함께 꿈을 꾸고, 우정을 나누고, 복음을 나누었던 가장 소중한 친구와 다시 이별하려고 하니 마음이 참 슬펐습니다. 떠나는 날 제 차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데,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 중 누가 더 슬플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역시 남는 사람이 더 슬프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삶이 늘 이런 삶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함께 주님 붙잡고 살아가야겠다는 결심을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마침내 저도 여러분과 더불어 캐나다의 삶으로 정말 들어오게 된 것 같습니다.

장목사님을 보내드린 후에 차 가스가 다 떨어져서 근처에서 넣어야만 했습니다. 제가 여기와서 앱 하나를 깔았는데, 근처 가스 가격을 체크해주는 앱입니다. 목사님을 환송하고 확인해보니 리치몬드에 120불대 주유소가 있어서 주유를 하려고 그곳으로 갔습니다. 주유를 마친 뒤에 주변을 살펴보니 리치몬드 아래쪽에 스티브스턴 빌리지라고 작은 항구 마을이 있더군요. 그곳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을까해서 그곳으로 내려가보았습니다. 가보신 분들도 있겠지만, 그곳은 100여년 전에 갖잡은 생선으로 캔을 만들던 공장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흔적들을 박물관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곳에서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곳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이 살던 집들을 복원해논것입니다. 그곳에는 일본 사람들, 중국 사람들이 100여년 전에 들어와서 살던 집들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중국 사람들이 살던 합숙소를 보았는데, 비좁은 침대에서 배고픔과 추위 속에서 노예와 같은 삶들을 살았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이민자의 삶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치열하게 살아온 역사가 이곳의 역사라는 생각에 마음이 참 숙연했습니다. 더불어 우리 성도님들도 이러한 삶을 지금도 이어가고 있구나 하는 마음에 깊은 기도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곳에 온지 벌써 두 달이 되었습니다. 그 시간동안 이곳에서 챙겨주시고, 아껴주시고, 사랑해주신 것들이 한국에서와는 또 다른 무게의 깊은 마음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마음을 귀하게 여기며 하루하루 마음을 다해 섬길 수 있도록 계속 기도 부탁드립니다.

오늘 말씀은 데살로니가후서를 쓴 바울의 목적이 본격적으로 나오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여러 감사와 격려를 나눈 뒤, 이제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을 오늘 3장 말씀에서 나누고 있습니다.

다같이 6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데살로니가 교회 사람들은 어떤 문제가 있었을까요? 그들 중에 게으르게 행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도들에게서 받은 전통, 사도들이 가르쳐 준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사실 게으름을 피우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휴식과 게으름은 어찌보면 종이 한 장 차이가 되곤 하기도 합니다. 천성적으로 여유로운 사람도 있습니다. 게으름은 분명 좋지 않은 덕목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동체에서 쫓아낼 정도의 악이라고 보기엔 조금 비약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이렇게 게으름에 대해서 냉정하고 단호하게 비판할까요? 그것은 그들이 게으름을 피우는 이유가 단지 몸의 피곤함이나 천성적 나태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사실 데살로니가전서 말씀과 함께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미 한번 편지를 쓴 적이 있었습니다. 그 쓴 책이 데살로니가 전서였습니다. 그 책에서 바울은 이제 예수님의 재림이 속히 올 것이다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늘 깨어서 믿음을 굳건히 지켜라 강조한 것입니다. 다같이 데살로니가전서 5장 1절과 2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바울은 예수님이 오실 때와 시기를 알 수 없고, 다만 밤에 도둑같이 그날이 올것임을 기억하고 항상 깨어있어라 강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곧 오시니 늘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늘 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을 왜곡해서 받아들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이렇게 비틀었습니다. 바울 사도님께서 말씀하시길 예수님께서 곧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곧 오실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삶은 더 이상 큰 의미가 없습니다. 성공해서 무엇합니까? 가정을 이루어서 무엇합니까? 무엇보다 일해서 무엇합니까? 차라리 그 시간에 아무것도 하지 말고 예수님 기다리며 편히 지내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이제 쉬십시오. 평안히 지내십시다. 그것이 가장 나은 길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언뜻 듣기엔 굉장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곧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했습니다. 너도나도 일하지 않고, 게으름과 나태함, 방종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회의 모습을 크게 염려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점을 바로잡기 위해 편지를 쓴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모범으로 보이면서 이들의 어리석음과 악함을 책망하였습니다.

이들의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들은 자신의 욕심과 편안함을 위해 사도들의 가르침을 이용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 신앙과 교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이들은 사실 편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바울 사도의 가르침을 이용했습니다. 그것은 아주 교묘하게 그들의 마음속에 작동하고 있어서, 심지어 자기 자신들도 자기들이 악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들은 신앙을 잘 지키고 있다고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나무는 그 열매를 보고 그 좋고 나쁨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태도는 고스란히 다른사람들에게 피해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오늘 말씀 11절 말씀입니다.

11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 사람들은 자기가 일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일을 대신하도록 떠넘겼습니다. 자기 신앙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되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교묘한 이기심과 게으름을 신앙이란 포장지로 잘 덮고서, 다른 사람들이 그러한 일들을 대신 감당하도록 밀어 넣는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회 일부 교인들의 잘못을 우리도 범하지 않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늘 덕이 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의 동기 뿐 아니라 결과가 다른 이들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는지를 항상 고려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다같이 일해야 할 때 저는 잠시 교회 모임에 다녀오겠습니다 하면서 바쁘고 중요한 일에 매번 빠지는 직원, 식당이나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폐를 끼치며 하는 기도들, 교회에서 사역을 할 때 함께 일하는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하는 무례한 태도들, 심지어 전도마저도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서 강제로 하는 사람들, 때때로 신앙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명분으로 우리는 잘못을 쉽게 잘못을 저지를 때가 있음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느 한 성도분의 일화입니다. 이 분은 늘 온화한 미소를 지으시고, 말씀도 늘 선하게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분 자제분에 따르면 한평생 집에서도 큰소리낸 적이 없으신 분이시라고 하십니다. 항상 성실하고 선하게 일을 감당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교회 성도들과 그 안수집사님께서 식당에 가서 국밥을 먹게 되었다고 합니다. 국밥을 다 먹은 후에 그릇 바닥을 보니, 손가락 마디만한 파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함께 간 그 자제분은 사업하시고 성격도 있으신 분이었는데, 바로 손을 들고 사장에게 따지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때 그 집사님께서 매우 엄한 목소리로 가만히 있어라 하셨답니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무도 일부러 파리를 음식에 넣는 사람이 없다. 감사히 먹었으면 되었다. 이러시답니다. 그리고 계산을 다 한 뒤에 넌지시 음식에 이물질이 있었다고 전하고 식당에서 나오셨다고 합니다. 교회 성도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자기 권리를 찾기보다는 덕이 되는 모습을 보이시려 한 것 같습니다.

저는 이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일상에서 다른 이들을 배려하는 삶이 무엇일까? 오늘날에는 자신의 권리를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삶의 지혜라는 불문율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신앙생활마저도 자기 권리를 찾기 위해 활용되곤 합니다. 교회 일을 할 때도 당연한 권리 추구를 제 1 원칙으로 세울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연하게 우리 자신의 권리, 나의 유익을 붙잡는 것을 생각하다보면, 많은 것을 놓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딱 그러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편안한 삶을 위해 바울의 교리를 이용했고,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이웃들에게 피해를 끼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바로 자신의 삶이었습니다. 다같이 7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7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8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다른 이들을 배려하며 살았습니다. 앞선 사람들은 자기 유익을 위하여 교리를 이용했지만, 바울은 성도들과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자기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그것이 교회에 덕이되고, 성도들을 사랑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과 함께 있을 때 늘 주야로 일하며 지냈습니다. 힘들고 어렵게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는 얻어먹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5장에서도 목회자의 사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이야기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로부터 어떤 사례로 받지 않았습니다. 고난받는 교회, 연약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애쓰고 수고하여 스스로 자기 먹을 것을 치루며 사역하였습니다. 그것이 바울이 가진 사랑이요, 헌신이었습니다.

바울의 모습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를 이끄는 삶의 원칙은 덕이 되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결정할 때에 이것이 덕이 되는 일인가, 이것이 사랑을 베푸는 일인가, 이것이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게 하는 일인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제 1원칙입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러 올라가는 길에 쓰러진 강도만난 사람이 있다면 그를 먼저 치료하고 올라가는 것이 옳다라고 우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 역시 십계명의 중요한 계명입니다. 안식일에는 아무것도 하지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내 앞에 아픈 사람이 있다면 그를 치료해주는 것이 맞다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원칙을 지키겠다고 주장하면서 어려운 이웃, 소외받는 이웃,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을 외면한 바리새인들을 예수님께서는 질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통로로 사용될 때 살아있는 율법이 됩니다. 오히려 우리의 이익을 구하고, 다른 이들을 배려하거나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율법은 잘못된 법이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서 14절 말씀입니다.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우리 자신의 권리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고 덕을 세우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의 유익을 구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사랑하고 섬겨주고 도와주는데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 율법은 이웃 사랑하기를 내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한 말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과 우리의 삶이 다른 이들에게 덕을 끼치고, 사랑을 나누어주는 일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들을 통해 예수님의 향기가 드러나고, 복음이 전해지는 일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를 보면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지, 아님 하나님을 무시하게 될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설령 신앙생활이라 할지라도, 교회 생활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어떠한 열매를 가져다줄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태도도 중요합니다. 늘 겸손하게 섬기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섬기는 일에 있어서도 늘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 섬겨야 합니다. 이것은 가장 앞서 말씀을 전하는 저에게 가장 먼저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슨일을 하느냐보다 그 일을 왜 하느냐에 더 관심이 많으시며, 어떻게 하느냐에 관심이 많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새벽교회에 와서 한분 한분을 뵈며 정말 귀하다는 생각을 많이했습니다. 늘 겸손함으로 섬기고, 늘 사랑과 헌신으로 섬기며, 늘 하나님 먼저 생각하는 여러분들을 뵈면서 참 아름다운 교회에 왔구나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감사와 더불어 이곳에서 제가 잘 감당할 수 있을지 두려움과 떨림이 제 마음에 크게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의 주인이시자 머리이시자 인도자이신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그 분 붙잡고 나아가려고 합니다. 우리 성도여러분들도 이 믿음의 여정에 끝까지 함께 걸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늘 덕이되도록, 늘 사랑을 하는 마음으로, 늘 겸손히 성실히 주님의 일을 감당하길 소망합니다. 끝으로 오늘 마지막 말씀을 다같이 봉독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