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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2021.01.24. 주일예배 설교, 마태복음 15:21~28)

 

마태복음 15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 땅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란 우리 하나님께서 왕이 되시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자가 되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삶의 주인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돈이나 명예, 권세가 아니라, 헛된 욕망이나 자기애가 아니라, 오직 우리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다시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사랑의 은혜 진정한 삶을 살 수 있음을 우리에게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절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는 너무 낯선 것이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사랑하고, 욕망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있어 하나님 나라는 낮선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내려놓을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곧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자기가 가진 것을 포기하고, 십자가의 길을 따르라는 회개의 선포는 불편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이들을 핍박하고, 조롱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이러한 악한 이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공격을 당한다는 말씀으로 이러한 상황을 표현하시기까지 하였습니다.

 

또한 기존의 종교 질서, 기존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점에 익숙해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가 이상하게 들렸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던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께서 선포하던 하나님의 뜻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신앙생활의 핵심은 율법, 곧 규칙을 잘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정결례를 지키고, 안식일을 지키고, 유대 민족의 정체성을 잘 지키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누구보다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이 틀렸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나아가 그들이 금과옥조처럼 지키던 규례들을 어기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선포가 불편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발하였고, 무시하였으며, 심지어 공격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 앞에서 꿋꿋이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선포하셨습니다. 세상의 부귀와 세상의 권세로 하나님 나라를 핍박하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대의 최고 권력자였던 이집트의 파라오로부터 탈출할 때에 나타났던 기적들을 다시 한 번 보여주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만나의 기적을 떠올리게 하셨고, 물위를 걷는 기적을 통해 홍해의 기적을 떠올리게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무엇도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것처럼 보이는 권력이라 할지라도, 우리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잠시잠깐 공격당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하나님의 도도한 역사하심 앞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주님은 기적을 통해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권세를 무너뜨린다는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또한 율법에 사로잡혀서 규례와 예식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율법이 얼마나 기만적일 수 있는지를 폭로하셨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가르쳐주기 위한 통로로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깨닫지 못한 채, 그저 규례와 예식에만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가리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심지어 본질을 살피지 않으면, 오히려 규례와 예식이 자신의 죄악된 내면을 가리고, 나아가 죄악을 위해 활용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음을 폭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고르반이라는 당시의 풍조를 지적하시면서, 자신의 욕망과 죄악을 위해 규례와 율법을 이용하고 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경직화된 종교는 하나님께서 심으신 것이 아님을 선포하셨습니다. 오히려 마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듯, 잘못된 열정과 가르침이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한다는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정리하면,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종교를 사랑하는 것 모두 하나님의 나라와는 반대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핍박하는 세상 권력도, 하나님 나라를 왜곡하는 종교 체제도 모두 거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무엇으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셨을까요? 그 놀라운 역사가 오늘의 말씀입니다. 21절과 22절 말씀입니다.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님께서는 게네라셋, 곧 갈릴리 지역을 떠나 두로와 시돈 지역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두로와 시돈 지역은 오랜 역사를 지닌 항구도시였습니다. 이곳은 자색염료, 금속세공, 유리공예 등이 발달하였는데, 지중해의 많은 도시들과 무역을 하면서 막대한 부를 벌어들인 도시였습니다. 이러한 가치 때문에, 숱한 침략과 점령을 당해야 했던 슬픈 역사도 있었습니다. 앗수르, 바벨론, 그리스, 로마 모두 이곳을 점령하고 조공을 빼앗아 갔습니다. 이곳은 화려함과 아픔을 모두 가지고 있었던 이방도시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을 하셨는데, 갑자기 이 이방지역으로 들어가신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두로와 시돈으로 들어가신 데에는 이유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 말씀에 나타난 가나안 여자를 만나기 위함이셨습니다. 실제로 더 많은 기적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말씀 속에서는 단 한명, 이 여자를 만나기 위해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 지역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역에 들어가자 이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께 와서 소리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이 여인은 이방 여인이었고, 이스라엘 왕이었던 다윗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더더욱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연관성도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마치 자신이 유대인것처럼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이라 외치며 간절히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쳤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했던 이유는 그녀의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귀신들린 사람의 모습은 하나님의 통치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심으로서 하나님의 통치의 회복을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의 딸을 고쳐주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드러나는 지를 분명히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러한 여인의 간절한 부르짖음에 너무도 당혹스러운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23절부터 2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그녀가 간절히 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인터넷 상에서 떠돌던 말이 하나 있습니다. 악플보다 무서운 것은 무플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어떤 요청을 했는데, 그 요청을 거절하는 것보다 더 속상하게 하는 것은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가타부타 말을 해줘야 하는데, 아예 대답 자체를 안하는 것, 그것은 상대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답이 없을 때, 우리는 큰 상심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사랑의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이 상황을 지켜보다 못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말씀을 건넸습니다. 저 여자가 저렇게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 저여인을 어떻게든 해주셔서 돌려보내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돌려 말하면서 여인을 고쳐주어 달라 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놀랍도록 냉정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한마디로 난 유대인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저 여인은 이방여인이 아니냐, 난 이방사람들은 안고쳐준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참 이상한 말씀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차례 이방인을 고쳐주신 일이 있으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이방인 백부장에게 이와같은 믿음을 본적이 없다 칭찬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방 여인을 고쳐주지 않을 것이면 아예 이방 지역을 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 만나셔서는 냉대하시고, 또 굳이 그녀 앞에서 나는 이방인들에게 부름을 받지 않았다 말씀하실 필요까지는 없었습니다. 이것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이것은 주님의 분명한 의도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에 여자가 와서 절까지 하면서 다시 요청하였습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주님 저를 좀 도와주셔서, 제 딸 좀 고쳐주십시오. 그때에 우리 예수님은 더욱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사실은 귀를 의심할 만한 말씀이요, 많은 성경학자들이 왜 이런말을 하셨지 하며 고민하게 만든 말씀이셨습니다. 주님은 간절히 원하는 여인에게 이와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이 말씀에서 자녀들은 누구이며, 개들은 누구입니까? 자녀들은 유대인들이요, 개들은 이방인입니다. 이 말씀을 맥락을 떼어놓고 이해하면, 우리 주님은 명백한 인종차별주의자이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개처럼 여긴다, 나는 너희를 고쳐줄 수 없다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도대체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때에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여인이 놀랍게도 화를 내거나 욕을 하면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26절 말씀입니다.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주님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저에게도 그러한 부스러기를 주십시오. 제가 개로 취급받아도 괜찮습니다. 제발, 제 딸을 고쳐주십시오. 그녀는 진실로 자신의 딸이 고침을 받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 때 그 순간을 포착하셨습니다. 그리고 선포하셨습니다. 28절 말씀입니다.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이 믿음을 온 세상에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 있는 줄 아느냐? 바로 이 여인의 이 사랑에 있다. 자신을 기꺼이 포기하는 사랑의 마음, 자식이 고쳐지기만 한다면 내가 개로 취급받아도 괜찮다는 이 사랑, 선을 넘고, 경계를 넘어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이 마음, 이 가난한 마음에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여인이야 말로 내가 이스라엘에서 찾지 못한 놀라운 믿음을 가진 여인이다.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여인의 이 믿음을 온 세상에 드러내시기 위해 짐짓 그러한 모습을 보이신 것입니다.

 

앞서 헤롯왕과 그 주변의 권력자들은 철저히 자신의 욕망과 쾌락을 위해 사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것에 파묻혀 하나님 나라를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그저 쓸데없는 선포에 불과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불편하게 하자,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또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규례와 예식만을 위해 사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내면을 살피지 않았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구하는 모습도 없었고,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규례를 가지고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였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감추어진 죄악과 욕망을 위해 율법과 규례를 이용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세상의 권력자들과 권세자들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선망하기도 했지만, 예수님은 이들에게서 믿음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개들이라 지칭하고 비난하고 조롱하던 이들은 사실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갈릴리를 떠나 두로와 시돈까지 가신 것입니다. 그러고 이 가나안 여자를 찾아가신 것입니다. 주님이 찾는 사람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바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요, 애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온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바로 여기에 있다라고 그 아름다운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귀신 들린 자녀를 즉시 고쳐주셨습니다. 악한 권세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역사가 이러한 사랑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나라가 어디에 있을까요? 화려한 궁전이나 거대한 성전에 있을까요? 아니면, 종교적인 율법을 잘지키고, 엄숙하고 엄격한 종교적인 삶 속에 있을까요? 우리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에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마음에 있다. 사랑을 위해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그 간절한 가난한 마음에 있다. 그것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아팠을 때,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 내 부모 형제의 건강을 위해 마음을 쓰며 간구하는 마음, 우리교회 성도들이 모두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어렵고 힘든 이웃들을 위해 우리의 것을 나누며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 세상의 고통받는 이웃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 사랑을 위해 주님을 찾고, 사랑을 나누며 주님을 의지하고, 사랑의 한계에서 주님을 붙드는 마음, 그것이 바로 주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놀랍게도 오늘 이 여인의 모습은 우리 예수님과 참 닮았습니다. 죄와 사망권세에 사로잡혀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모든 수치와 모욕을 당하시고, 버림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지극한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 땅에 참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자 초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 모두가 주님의 백성의 귀한 사랑의 삶을 살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