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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예수가 되는 길 (2020.09.27. 주일 예배 설교)

 

마태복음 10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점점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생기고, 말씀을 더욱 사모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에 관한 말씀을 더욱 알고 싶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알아보려고 애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을 막상 읽다보면, 성경 말씀이 때때로 이해가 되지 않아서, 또는 너무 지루해서, 또는 너무 부담스러워서 포기하게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알기 위해 시도하지만, 정작 성경을 깊이 이해하는 데에는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무엇보다 빠르고 좋은 방법은 목회자를 활용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시다가 언제든지 어려운 부분이나 질문이 있으시면 함께 나누고, 함께 그 뜻을 구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 구절도 말씀을 읽으면서 부딪히게 되는 가장 어려운 난해 구절 중 하나입니다. 오늘 말씀을 함께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34절부터 37절 말씀입니다.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예수님의 말씀은 충격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과 평화의 예수님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우리를 당혹케 하시는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을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다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세상 곳곳에서, 우리 인생 곳곳에서 불화와 다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더욱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그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서게 하고,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되면 사람의 원수가 가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한 것이 맞아? 의심할 정도로 놀라게 됩니다. 나아가 예수님을 믿어도 되는 것인가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됩니다. 예수님 믿고 따랐다가 계속 고난만 받고, 가족과 친구를 모두 읽고, 심지어 내 목숨까지도 내놓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혼란이 생기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단에 빠져서 모든 삶을 포기하고 종교를 추종하는데 온 인생을 걸어버린 사람들이나, 종교를 극단적으로 믿어서 테러나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아서, 이거 예수님 따르는 것이 괜찮은 건지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사실은 구약의 말씀을 인용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미가서 76절 말씀입니다.

 

6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죄악된 모습을 묘사하고 질타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했는지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고,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대적한다는 말씀으로 선포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이 저지르는 심각한 갈등과 다툼을 표현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타락한 모습을 설명한 말씀을 인용해서 오늘 말씀을 선포하신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제자가 걸어갈 길이라 선포하신 것입니다. 구약을 잘 알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더더욱 당혹했을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이러한 죄악의 길로 가는 길인가? 질문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말씀을 잘 아는 사람이 오히려 더 당혹해할만한 말씀이었습니다.

 

성경 말씀은 한구절, 한구절이 중요하지만, 또 동시에 성경 전체의 내용을 이해하고 그 흐름 안에서 한 구절 한 구절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지 않은채 구절에만 집착하면 그것이 오히려 그 뜻을 오해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의 맥락 안에서, 그 맥락과 어울리지 않는 구절이 있다면 그 구절은 좀 더 특별하고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의 진멸)

 

우리 예수님께서는 왜 이러한 말씀을 선포하셨을까요? 이 말씀은 우리 예수님의 충격 요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주는 혼란과 당혹감 속에서 우리가 믿음에 관해 고민하고 생각해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 그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해 볼 것을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무리에서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제자로 파송받아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우리는 지난 8, 9장 말씀을 통해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배웠습니다. 그 길은 예수님과 더불어 예수님의 일을 감당하는 일이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에서 하신 일, 곧 사람을 치유하고, 생명을 살리며, 세상의 악한 권세를 물리치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을 감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소외된 사람들의 벗이 되고, 애통하는 자들에게 위로가 되어주며,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 가운데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일을 위해 우리를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 제자로 살아가기 위해, 주님의 뜻을 감당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을 위해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 드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이 전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와 복음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종교는 사람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사람이 만들어 낸 신은 자연스럽게 사람이 추구하는 것을 더욱 강화합니다. 종교심이 깊어질수록 욕망도 커지고, 교만해지고, 자기의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종교가 그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그 사람에게 이용당합니다. 인류 역사의 많은 악과 불의, 탐욕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숱하게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와 다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복음은 우리가 변화하길 요구합니다. 지금껏 추구해왔던 욕망, 자기 자랑, 교만을 포기하기를 원하십니다. 특별히 그저 조금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포기하길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거듭남, 곧 다시 태어나야 한다 말씀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고, 우리의 삶의 가치를 완전히 뒤바꾸고자 할 때,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지금껏 우리의 삶에서 가장 익숙하게 자리잡아왔던 것들입니다. 이제껏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말들, 생각들, 행동들, 심지어 이제껏 맺어 왔던 관계들과 삶의 방향들 모두가 이제는 불편한 것들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시어머니로 대표되는 세상적 삶의 관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네 삶을 주님께 드리고, 제자가 된다는 것은 너의 부모 형제와 싸우고, 네 친구들과 싸우고, 네 주변 사람과 원수가 되는 일이다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은 네가 진실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고 결단한다면, 너는 네 삶의 가치관 전체를 뒤바꾸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너의 아버지로부터, 너의 어머니로부터, 너의 집안으로부터, 너의 사회와 너의 세상으로부터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너무도 익숙하게 따랐던 것들을 모두 새롭게 뒤바꾸어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나의 뿌리가 나의 원수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앞선 말씀들을 잠시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 혈루병 걸린 여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이제까지의 사람들은 사람을 거룩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부정한 사람의 삶에는 철저히 무관심한채 자기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들을 친구가 되기는커녕 대화하는 것도 만지는 것도 피했습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자기들을 거룩한 사람으로 인정해주는 통로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새로운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들을 만지시고, 그들을 고쳐주시고, 그들을 치료해주셨습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과 함께 하셨으며, 새로운 공동체를 여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삶이란 이제껏 사회가 통념적으로 가르쳐왔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는 삶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 사랑대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이제까지의 사람들은 죄인들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요, 어울려서는 안되는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들을 피함으로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종교 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자기는 선택받은 사람이라 생각했고, 자기는 의로운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통념을 깨셨습니다. 오히려 세리와 죄인을 적극적으로 찾아다니시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들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초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회의 통념을 허무는 일이었고, 종교 지도자들을 불편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꺼이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 길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렇게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껏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것을 새롭게 뒤집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와 성령님의 도우심 아래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 사랑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 지금껏 살아왔던 가치관과 충돌될 수 있고, 심지어 자기를 잃을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알을 깨고, 주님의 은혜 안에서 새롭게 된 사람만이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진정한 제자의 길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나를 위한 삶, 내 가족만을 위한 삶에서 하나님을 위한 삶, 내 이웃을 위한 삶으로 삶의 정체성을 뒤바꾼 사람들입니다. 더 나아가 나만을 위한 신앙, 내 가족만을 위한 신앙에서 하나님을 위한 신앙, 내 이웃을 위한 신앙으로 뒤집은 사람입니다. 놀라운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 기꺼이 사랑의 길로 나아가기로 결단한 사람입니다. 제자가 되는 것은 이러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렇기에 38, 39절 말씀에서 이와같이 선포합니다.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우리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자기 목숨만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은 그 목숨까지 잃을 것이요, 자기 목숨을 내놓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십자가에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형식적으로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굳게 붙들고 목숨의 위협이 있다 하더라고 신앙을 포기하지 말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죽으신 십자가의 은혜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6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령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2000년전 그분의 죽음이 그저 역사적 사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은혜와 신비 안에서 오늘 우리의 죽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나의 죄의 죽음, 나의 교만한 자아의 죽음, 나의 탐욕과 우상숭배의 죽음, 나의 미워하는 마음과 폭력적인 마음의 죽음, 이제껏 내가 살아온 모든 삶의 죄악된 방식과 우상숭배의 가치관이 죽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죽는 것, 우리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우리에게 먼저 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니다.

 

그렇게 우리가 죽고 새롭게 다시 태어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랑의 삶, 제자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을 주님의 대리자로 불러주셨습니다. 작은 예수로 이 땅 가운데 살아갈 권세를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모든 인생은 이제 우리 주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40절에서 42절 말씀입니다.

 

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사실 우리가 옛 가치관, 나 중심의 가치관으로 내 욕망과 자랑을 위한 삶을 살아갈 때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줄 것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던 모든 목소리가 그러한 생각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이 광고 문구가 이 세상의 가치관을 그대로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치관을 포기하고 완전히 새로운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에게 가족과 갈라지는 것처럼, 내 생명을 포기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수많은 불안과 두려움을 마주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길에 진정한 생명이 있고,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선포합니다. 나아가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이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이라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작은 예수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주실 뿐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돌보는 이들까지 모두 상을 얻게 되리라는 놀라운 선포를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사람을 영접하는 사람을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나아가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라 선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봅시다. 오늘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가치관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가장 두렵고 무엇이 가장 불안하십니까? 무엇 때문에 화가 나시고, 무엇에 가장 집중하십니까? 삶의 판단 속에서 그 판단을 결정하는 가장 중심이 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우리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33절에서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의 기준을 온전히 뒤집기를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아는 것, 성도의 길의 목적) 우리 모두가 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역사에 동참하는 모든 성도가 되길 진심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