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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3

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34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35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하나님에 관하여 선포할 때,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핵심 개념이 있습니다. 바로 생명입니다. 말씀은 생명과 하나님을 연결시켜서 우리에게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에 생명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상실한 곳에 죽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창조하시지만, 죄는 생명을 잃게 만듭니다. 죽음에서 생명을 다시 회복시키는 역사, 그것이 바로 구원의 역사입니다.

 

여러 차례 나누었지만, 다시 한 번 창조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흙을 가지고 사람을 빚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코에 직접 생기를 불어 넣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사람에게 넣어주신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이제 선과 악을 내가 판단하겠다. 하나님 없이 내 좋을 대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을 한 것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을 거절한 인간의 운명이 죽음이 되었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마치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나뭇가지가 곧 시들게 된 것처럼, 우리는 잠시잠깐 생명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결국은 죽음이 우리 앞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죽음은 삽시간에 우리의 운명을 집어 삼켰습니다. ‘죽음을 본능적으로 아는 사람은 이제 불멸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찾아, ‘영원한 생명을 줄 것처럼 보이는 것을 찾아 헤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을 지식과 명성을 추구하였습니다. 제국을 만들고 거대한 기업을 만들고 눈에 보이는 화려한 건물을 짓고 위대한 업적들을 남기며 자기 존재를 영원히 남기고자 한 것입니다. 유명한 중국의 황제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하고서도 끊임없이 불로초를 찾아 해매였고, 그가 죽은 뒤에도 불멸의 사후세계를 꿈꾸며 거대한 무덤과 호위하는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도 사람의 죽음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이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고 아담이 들었던 그 심판의 목소리 창세기 317절의 말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말씀은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엄중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말씀은 더욱 심각한 현실을 우리에게 선포합니다. 하나님 없이 스스로 죽음을 벗어나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이 역설적으로 더 많은 죽음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존재를 드러내려는 인간의 시도는 더 큰 죄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겪게될 운명을 이와 같이 선포하셨습니다. 창세기 316절에서 19절 말씀입니다.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여자는 임신하는 일이 고통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남자는 땅이 저주를 받아서 경작하는 일이 고통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의 핵심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아이를 낳는 것은 생명을 낳는 소중하고 가치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고통스러운 일이 된 것입니다. 밭에서 식물을 키우는 일은 생명을 키우는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땅이 남자로 인해 저주를 받아서 키우는 생명은 자라지 않고, 엉뚱하게 생명을 죽이는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자라게 된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 모두 생명을 키우는 일이 고통스러운 일이 되었고, 생명을 살리려고 하는 일이 오히려 생명을 죽이는 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이 현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그들의 두 아들이었던 가인과 아벨에게서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둘 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그 제사가 오히려 이 둘을 갈라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관없이 그저 제사에만 마음을 기울였습니다. 그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자, 가인은 질투심에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원래 제사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경험하는 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이루어지자, 그 일은 생명을 파괴하는 일의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없이 하는 일, 하나님과 상관없이 하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그대로 반복되었습니다. 자기를 높이고, 자기가 속한 집단을 높이고, 자기가 원하는 욕망을 추구하고자 인간은 무수히 많은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이들을 죽이는 일이 곧 인간의 역사였습니다. 심지어 그 일은 교회에 의해 저질러지기도 하였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고, 그 전쟁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심지어 히틀러 마저도 유태인들을 없애는 것이 하나님이 자기 민족에게 부여해준 거룩한 사명이라고 사람들을 선동하였으며, 수많은 독일 교회의 지지를 받으며 유태인들을 대량으로 학살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거대한 역사까지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삶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내 스스로 내 삶의 길을 찾겠다고 하나님을 저버리는 수많은 결정들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생명의 삶을 누리지 못할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운명을 그저 두고 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찾아오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성경 말씀은 이처럼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이 역사는 우리의 생명을 회복하시는 역사였습니다.

 

그 역사의 뿌리에 아브라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복이 되게하고, 민족이 되게 하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지게 하겠다. 그것은 단지 자손의 숫자를 늘려주겠다는 뜻이 아니라 끊어졌던 생명을 회복시켜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셨습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사라를 변화시키셔서 다시 생명을 낳게 하시고, 그녀를 만국의 어머니로 세우신 것은 이러한 생명의 회복을 분명히 보여주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드러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곧 생명의 회복임을 말씀은 우리에게 선포합니다.

 

이제 이러한 생명의 회복은 구약 성경 말씀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자기가 이집트에 팔려 온 것이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이라 고백합니다. 출애굽 사건을 살펴보면, 이집트의 죽음의 문화 속에서 노예로 살면서 고통 받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며 하나님께서 생명이 되심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룻기를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남자가 죽어 더 이상 대를 이을 수 없었던 룻에게 보아스를 보내주셔서 생명을 이어갈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어 괴로워하던 하나님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녀에게 새로운 생명을 허락하셨는데, 이 아이를 통해 사사시대 죽음의 문화 속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조를 통해, 예언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생명되심을 끊임없이 선포하셨고, 그 생명으로 돌아올 것을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 213절은 이와같이 선포합니다.

 

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생명이 되시고, 우리가 추구하는 헛된 것들은 생명이 되지 못함을 분명히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사람은 이러한 생명되신 하나님을 끝까지 거절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을 위해 직접 찾아오시기로 결단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25, 26절 말씀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또 요한 1512절 말씀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이 땅에 오신 생명, 이땅에 오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면,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고, 우리 안에 생명이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의 권세에도 사로잡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그것을 영생을 얻었다라고 선포합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31, 32절 말씀입니다.

 

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아주 작은 겨자씨 한알이 큰 나무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씨앗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생명에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생명은 그저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라나고, 풍성하게 생명을 확장해 나가며, 많은 생명을 돌보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이 마치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우리는 앞서 천국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며, 천국은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고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 가운데 임하였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분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임하시면, 또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시면, 또 우리 성령님이 우리의 주관자가 되어주시면, 우리 안에 생명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제껏 죽음 가운데 살아가던 삶에서 생명을 누리는 삶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을 누리는 삶,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은 무엇일까요? 그 삶은 생명력 있는 삶,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 안에 거하는 삶, 생명을 누리고, 열매를 맺는 삶은 한마디로 사랑을 알고, 사랑하는 삶입니다.

 

요한복음 155절 말씀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리고 이어지는 12절 말씀은 이와 같이 선포합니다.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사람, 생명이 없는 사람은 홀로 자기 목숨을 살리고자 합니다. 그것을 위해 헛된 것들을 추구하며, 죄를 짓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사람, 그분의 생명을 얻은 사람은 더 이상 자기 목숨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이미 주님이 주신 생명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 생명 안에 담겨있는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드러내며 나누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비밀을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924절에서 이와같이 선포하신 것입니다.

 

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이처럼 하나님을 마음에 품고 그 생명력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은 점점 큰 나무가 되어갑니다. 그리고 결국 아주 큰 나무가 되어 많은 새들이 그 나무 아래에서 머물 수 있는 귀한 주님의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각각 개인도 마찬가지요, 우리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생명력이 얼마나 큰지, 그것을 씨앗으로도 비유하시고, 누룩으로도 비유하셨습니다. 33절 말씀입니다.

 

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누룩은 이스트인데, 아주 작은 양으로도 반죽을 크게 부풀리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맛있는 빵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오셨을 때,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생명을 경험하고, 그 사랑을 경험할 때, 우리는 이와 같이 풍성한 존재가 되고, 다른 사람을 사랑과 생명으로 먹이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생명을 회복하는 것, 그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35절 말씀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창세부터 감추어진 비밀, 이제는 드러난 비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귀한 새벽교회 성도 여러분, 이번주부터 이제 대림절 기간입니다. 대림절이란 우리 주님이 오신 성탄절까지 총 4주에 걸쳐서 그 오심을 기대하며 기리는 시간입니다. 또한 우리 성도에게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억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이 시간들을 보내며,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떠한 존재이신지를 기억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 가운데 하신 일은 생명을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병으로 고통 받는 생명을 고치시고, 가난에 굶주린 생명을 먹이셨습니다. 잘못된 율법에 억압받는 생명을 해방시키고, 하나님을 모르는 생명들에게 참 생명되신 하나님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생명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그들을 용서하여 주셨고, 모든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성도에게 부활의 소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주님의 사역은 생명의 사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 속에 주님의 깊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아는 것, 이 생명을 얻어 이 생명력으로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가 함께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삶, 우리의 관계, 우리의 신앙 모두를 되돌아보길 소망합니다.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내가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생명력은 무엇으로부터 오는 가?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 우리 주님은 그 자리에 당신이 오시길 원하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으로, 그리고 그 사랑으로 우리가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주님이 지극히 사랑하시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진짜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부르심에 깊이 응답하고, 다시 주님의 생명과 사랑을 찾고 기다리는 우리 모든 성도님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