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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2013.4.28 오후예배 설교)

category 주일 설교 2013. 4. 29. 00:38

오만과 편견 (2013.4.28 오후예배설교)


사도행전 11장 1~10절


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3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4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5    이르되 내가 욥바 시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어 

     내 앞에까지 드리워지거늘 

6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7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8    내가 이르되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9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더라 

10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인생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바둑에 비유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등산이나 마라톤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저는 여행을 하면서 아~ 여행이 참 인생과 비슷한 것 같다 하는 생각을 많이 해보았습니다. 여행을 하다보면 매순간 새로운 경험을 차곡차곡 쌓아갈 수 있게 됩니다. 새로운 음식을 계속해서 맛보고, 새로운 나라, 새로운 도시, 새로운 경험들을 쌓아 갑니다. 이전에 내가 알고 있었던 세상이 전부가 아니구나, 아 이런 나라는 이런 특징이 있고, 저런 나라는 저런 특징이 있구나 하는 것들을 배우게 됩니다. 또 물건을 사고 팔기도 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깊은 대화도 나누어 보기도 하고, 낯선 잠자리에서 고생을 하기도 하면서 새로운 경험들을 쌓아가기도 합니다. 이런 경험의 조각조각들이 잘 쌓여가는 것이 바로 여행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도 이와 참 비슷한 것 같습니다. 태어나서 매순간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들을 하고 그러면서 점점 더 나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알아가기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삶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점점 우리 각자의 생각들을 갖게 됩니다. 좋았던 경험들, 행복했던 기억들을 우리에게 주었던 것들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거꾸로 힘들었던 경험, 실패한 경험들은 우리에게 피해야 할 것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제 친구 중에 통닭을 안 먹는 친구가 있습니다. 왜냐고 물어보았더니 어린 시절 자기 집에서 키우던 닭이 자기에게 달려들어서 얼굴을 쪼았다고 합니다. 그날 그 닭은 그대로 백숙 신세가 되었는데, 자기는 그 백숙을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답니다. 그 이후로 그 친구는 닭고기를 먹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에게 있어서 그 닭과의 쓰라린 경험은 그 친구의 음식습관을 결정짓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부모님이나 친구들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고 우리의 생각을 만들어 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라도 가까운 친구가 예수님에 대해서 매번 좋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다보면, 어느새 교회를 자연스럽게 여기고 쉽게 전도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자신이 믿고 있는 사람이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선입견을 가지고 싫어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경험과 관계의 벽돌들이 우리 안에 쌓여 거대한 나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나는 단단하고 견고한 성이 되어 좀처럼 바뀌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지혜, 신념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한 이것이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도 이러한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유대인으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시대에 오랜 세월 갈릴리 호숫가에서 어부로 살았습니다. 베드로는 그 시대에 그 장소에서 그 민족으로 태어난 사람이 누구나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을 자연스럽게 삶으로 배우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할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고, 수많은 정결 규례를 지키고, 율법을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그는 그것이 유대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이 곧 법도요 지혜라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베드로에게 있어서 안정감이었고, 자신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파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대에 유대인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 그리고 지켜왔던 것들을 과감하게 허물어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라면 당시에 누구나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율법들의 의미들을 질문하셨습니다. 안식일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앞에서 병을 고치셨습니다. 음식을 가려먹음으로서 정결한 생활을 추구했던 사람들에게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사회적으로 소외받던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사회에서 금기시하던 것을 다 깨뜨리고 참 사랑과 참 섬김, 참 해방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들을 모두 지켜 보았던 베드로는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들이 산산 조각나는 경험을 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존재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생각했지만, 그 메시아가 곧 하나님이시라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메시아를 단지 눈에 보이는 문제들을 해결할 힘을 가진 다윗의 자손, 곧 위대한 왕이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는 예언자라 생각했습니다. 베드로에게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은 그런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히 다른 방식을 보여주셨습니다. 스스로를 십자가에 거시고, 부활하심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 그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할 수 없었던 생각, 곧 하나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시고, 가장 낮은 곳에서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통념을 깨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이 다시 부활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기존의 생각을 산산 조각내는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쌓아왔던 모든 지혜와 지식이 편견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 여전히 많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나아가 우리가 붙잡고 있는 우리의 경험, 우리의 생각, 우리의 신념, 가치관, 우리의 믿음이 바로 우상일 수 있음을 말씀해주시고 계십니다.


수많은 경험은 우리에게 지혜를 주지만 동시에 편견을 줍니다. 여행가가 여행 중에 베트남에서 국수 한 그릇을 먹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국수가 소금 간을 잘못해서 매우 짠 국수였습니다. 그런데 이 여행가가 그 국수만 먹고 아 베트남 국수는 매우 짜구나 하고 다시는 먹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베트남 국수 하면 짜고 맛없는 국수라는 생각이 결정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람이 베트남 여행을 갔다 왔으니 당연히 베트남 국수 맛이 어때? 물어보게 되고, 그 사람은 여기저기 베트남 국수는 너무 짜다는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여행을 직접 갔다 온 그 사람의 경험을 믿고, 베트남 국수는 짠 음식이라는 생각을 믿게 되어버렸습니다. 베트남을 갔다 온 사람은 경험을 하였지만 그 경험이 온전한 경험이 되지 못해 오히려 편견을 쌓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편견을 가진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예는 우리 곁에 너무 많습니다. 동남아 사람들, 흑인들은 냄새나고 게을러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시지 않았습니까? 혹은 중국사람이나 인도사람들은 다 사기꾼들이야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슬람 사람들은 너무 무섭고 위험하다는 이야기도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이런 편견은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기만 하면 모두 축복을 받는 데, 그런데 저 사람은 가난한 걸 보니 신앙생활을 똑바로 하지 않은 것 같아. 저 목사는 저런 사고를 당하다니 무엇인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이 틀림없어. 교회의 숫자가 많아지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고, 교회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은 교회가 무언가 문제가 있기 때문이야. 우리가 성공하는 것 만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 어디 있어 라는 말들을 우리는 쉽게 합니다. 많은 것을 듣고,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많은 것들을 체험하지만 그것들이 우리에게 들어와 우리의 편견이 되고 아집이 되고 독선이 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편견을 부수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이 편견들을 부수어라 요청하십니다. 이러한 편견들을 없애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도 없고, 이웃을 온전히 사랑할 수 도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편견을 없애고자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앞서 말씀드렸듯 예수님의 놀라운 사역들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똑똑히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여전히 마음속에 편견이 남아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편견이 얼마나 없애기 힘든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마리아인들과 이방인들을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마저도 품으셨지만 베드로는 그것을 목격하고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여전히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 더러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일까? 그들에게도 성령님이 임재하실까? 버림받은 그들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실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과연 그들을 위한 것일까? 하는 생각들이 들었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흉악한 범죄자들이나 북한 공산당들, 동성애자들을 볼 때 그들이 과연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철저히 유대인으로 살아왔고, 율법을 통해 이방인에 대한 뿌리 깊은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 편견을 깨뜨리기로 결심하셨습니다. 환상을 통해 새로운 생각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큰 보자기 같은 그릇에 정결하지 않은 음식들을 내려 보내주셨습니다. 네발달린 짐승들, 파충류들, 날짐승들이 담겨져 있었는데 유대인들이 그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 먹지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 분명히 먹지 말라고 적혀있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거룩함을 지키고자 했던 베드로는 이것을 세 번이나 거부하였습니다. 환상속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먹으라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 번이나 거부하였습니다. 뿌리깊은 생각, 가치관이 새로운 생각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분명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전의 율법을 극복하였음을 분명히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사람들을 덮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전에 한계가 있던 율법, 한계가 있던 예언들을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모든 것을 이루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더 이상 한계가 없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베드로의 환상을 보기 원합니다. 우리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편견과 오해를 끊기 원합니다. 판단과 정죄의 사슬을 내려놓기를 원합니다. 지평을 넓히고 마음을 열어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일들을 해낼 수 있을까요? 정조 때 문장가 유한준은 당대의 수장가 김광국의 화첩 <석농화원>의 부친발문에서 이러한 글을 가져와 서술했습니다.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유홍준은 나의 문화 답사기를 통해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우리의 열쇠는 바로 깊은 사랑과 깊은 이해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편견은 부족한 우리의 지혜, 죄인으로서의 부족함, 교만함과 우상에서 비롯됩니다. 사랑을 하고자 하여도 알지 못하고, 알고 있어도 사랑하지 못하는 모습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러한 모습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만 넘어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참 지혜이시며, 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삶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보여주셨습니다. 곧 낮아짐, 십자가의 방법이었습니다. 내가 높은 자리에 올라, 힘을 가지고, 돈을 가지고 사랑하고자 하면 그 속에서 우리의 편견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낮은 자리에서 남을 나보다 귀하게 여기면 그 자리에서 사랑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나의 부족함, 나의 죄인됨, 나의 연약함을 발견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용서받은 자로서의 감사함과 감격이 있을 때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이 나에게 없다고 느끼게 될 때 우리는 편견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모든 사람들에게 향하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특별히 가난한자, 아픈자, 소외된자들에게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그들에게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높은 의자 위에 올라가서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작아보이지만, 무릎을 꿇고 사람들을 보면 모두 커 보입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무릎의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넘어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그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걸음을 내딛어봅시다. 우리 안에 담긴 편견과 오해들을 하나씩 찾아봅시다. 누군가를 향해 흘기던 눈빛, 비난의 손가락을 거두어 봅시다. 우리 안에 담긴 아집, 정죄, 자기의를 내려놓읍시다. 내 생각이 최고라는 교만과 오만을 내려놓읍시다. 우리의 단단한 껍질이 깨질 때 우리는 복음 안에서 훌쩍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넓게 넓게 퍼져나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