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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관계 (2021.07.09. 금요기도회 설교. 골로새서 3:18~4:1)

 

골로새서 3

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안에서 마땅하니라

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아나니 너희는 3)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25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4

1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골로새서 말씀은 골로새 지역의 교회들을 향한 바울의 편지였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전도한 에바브라가 골로새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골로새 교회 역시 자기가 섬겨야 교회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골로새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이들의 신앙을 독려하였습니다.

 

이러한 골로새 교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거짓 가르침이 골로새 교회에 들어오게 것입니다. 골로새 지역은 내륙지역으로 통하는 관문과 같은 지역이었고, 직물산업이 발달한 지역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이 오가게 되는 도시였고, 다양한 생각들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지내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다양한 종교와 철학이 발달하였고, 이러한 여러 생각들이 교회에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각종 이단 사상과 복음을 왜곡하는 생각들이 골로새 교회를 흔들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을 보며, 일에 책임을 느끼고, 골로새 교회를 온전히 세우기 위해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가 바로 골로새서 말씀인 것입니다. 바울을 골로새 교회에 복음을 온전히 세우고, 교회가 올바른 길로 걸어갈 있도록 마음을 다해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은 흔들리는 골로새 교회에게 교회를 온전히 세우는 신앙의 핵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였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천사 숭배를 가르치거나, 유대 율법주의를 바탕으로 헛된 금욕이나 헛된 규칙들을 가르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서는 신앙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신앙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은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은 주님과 더불어 거룩해지는 것이고,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며, 주님 안에서 참된 소망을 가는 것입니다. 거룩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지킴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고, 주님께서 의롭게 하심을 받아들임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목표는 엄격한 윤리과 금욕적인 고행을 통해 종교적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살아감으로 주님의 인격과 사랑을 닮아가는 , 주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참된 소망은 당장 눈에 보이는 성취나 성공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놀라운 부활 소망을 바라보고, 지금도 우리의 모든 인생을 주관하시는 예수님을 신뢰하는 데에서 오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이 누리는 은혜요,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하는 길임을 바울은 선포하였습니다.

 

이러한 맥락안에서 그리스도인인들은 구체적인 역시 예수님과 연합함 안에서 길을 찾아갑니다. 예수님과의 연합이 예수님의 거룩함을 입는 것이요,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요, 예수님을 소망으로 삼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방식들도 그러한 연합된 방식으로 열매맺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 말씀을 통해 그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주님과 연합한 존재가 된다는 , 안에서 거룩해진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잘못된 성적인 욕망을 내려놓는 것이요, 재물을 향한 우리의 헛된 탐욕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이웃을 미워하는 악한 생각과 악한 말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중심의 , 우상을 숭배하는 삶을 내려놓는 그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 죽는 삶입니다. 주님이 주신 거룩함에 힘입어 우리는 주님의 , 주님의 사랑과 정의를 이루며 사는 삶을 살게 것입니다. 계속해서 우리가 주님과 연합한 존재가 된다는 , 그리하여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내면이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어렵고 아픈이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이웃을 친절하게 대하고 사랑하려는 마음, 다른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겸손한 마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온유한 마음, 사랑을 하되 인내하고 참아주고 기다려주는 마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납과 사랑으로 우리를 빚어가는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가 주님과 연합한 존재가 된다는 , 그리하여 주님을 우리의 소망으로 여기고 살아간다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과 감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주님께 달려있음을 믿고,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주님께서 주신 선물로 생각하고, 내게 맡기신 일을 주님이 주신 소명으로 생각하고, 모든 일을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 모든 삶이 주님께 예배가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소망으로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처럼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우리가 만나는 이들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우리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을 때에 앞서 나누었던 신앙의 핵심원리, 우리는 주님과 연합한 존재입니다. 주님이 나를 거룩하게 하셨고, 주님이 나를 주님 닮아가게 하시며, 주님이 나의 소망이 되십니다는 믿음 위에서 말씀을 함께 살펴보아야 것입니다.

 

바울은 먼저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를 선포합니다.

 

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안에서 마땅하니라

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말씀은 선포합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마땅하니라. ‘ 주인이 세상에서는 복종 치욕과 부끄러움의 단어입니다. 그래서 전쟁이 치열할 때에는 복종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이야기 명예로운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의 삶이 치열하고, 세상이 약육강식의 원리로 돌아가다 보니 복종은 부끄러운 단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는 세상의 원리로 선포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말씀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종처럼 우리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지극한 사랑을 보고, 길을 따라오라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복종은 그리스도적 복종입니다. 복종은 섬김의 복종이요 사랑의 복종이요 겸손의 복종입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 속에 먼저 그리스도의 마음이 바탕이 되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에 우리는 기꺼이 누군가를 위해 복종해 있습니다. 그리고 복종은 오히려 우리를 예수님 닮게 하는, 예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복종이 것입니다.

 

남편들도 아내를 사랑하여야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대에 세상의 원리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내를 자신의 소유물처럼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자기의 권한과 힘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아내를 괴롭힌 것입니다. 그렇게 가정을 세상의 원리로 적용하게 되면, 아내가 복종할 느끼는 감정은 치욕과 부끄러움, 괴로움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한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할 때에 그리스도의 원리로 사랑한 것처럼 남편도 아내를 사랑할 때에 그리스도의 원리로 사랑해야 합니다.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내어주고, 용납과 관용과 오래참음과 지극한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듯 아내를 사랑하라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서로 그리스도처럼 사랑할 가정은 작은 교회 공동체가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를 선포하였습니다.

 

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용서하심과 은혜를 기억하고,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 애쓰며, 주님을 온전한 소망으로 붙들고 살아갑니다. 과정을 통해서 날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예수님 믿는 것들의 영광과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놀라운 은혜를 누리게 때에, 그리스도인들이 자연스럽게 가장 먼저 은혜를 알려주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자녀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더욱 깊이 다가갈수록 가장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은혜를 나누어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는 은혜의 깊이와 너비와 높이와 길이를 알아가는 데에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인생을 통해 서서히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녀의 입장에선 부모가 아무리 이것을 설명한다 하더라도 뜻을 헤아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너도 자식 낳아봐라, 냉면)

 

그렇기에 자녀에게 필요한 지혜가 하나 있는데 순종하는 것입니다. 알지 못해도 순종하는 , 부모를 믿고 따르는 , 그것은 인생에서 필요한 , 가장 중요한 것을 얻는 데에 너무나도 중요한 지혜입니다. 그렇기에 말씀은 자녀에게 순종하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물론 순종은 부모가 온전한 길로 걸어가는 , 부모가 자녀를 지극히 사랑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부모에게 가르치는 말씀은 더욱 놀랍습니다. 말씀은 자녀에게는 순종을 가르치면서 부모에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한끼에 먹을 있는 양이 정해져 있는 법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무엇이 좋은 것인지, 무엇이 귀한 것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좋은 부모라면 이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그런데, 마음이 너무 커져서 자녀들에게 압박이 되고, 무리가 되면, 자녀들은 자체를 아예 거부하게 됩니다. 자녀들이 소외감을 느끼고, 낙심하게 되고, 심지어 분노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세자) 말씀은 귀한 , 무엇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삶을 전하되 그것을 지혜롭게 전하고, 사랑으로 전할 것을 우리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끝으로 종과 상전과의 관계를 선포하였습니다.

 

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아나니 너희는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25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1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먼저 말씀은 노예제도를 찬성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또한 말씀은 가혹한 노예주인들을 옹호하는 말씀도 아닙니다. 사실 말씀은 미국의 노예제도가 한창일 , 많은 목사들에 의해, 많은 노예주인들에 의해 노예들에게 선포되던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의를 말씀을 통해 덮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말씀을 자기의 욕심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통해 깊은 지혜를 통찰할 있습니다. 좁게는 고융주와 종업원 사이의 관계에서 넓게는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할 있는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누군가를 대할 , 또는 어떤 일을 때에 일이 직접적으로 나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지를 계산하며 살아갑니다. 그리하여 일이 나에게 이익이 때에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누가 이기적인지, 누가 자기 것만 추구하는 , 누가 자기 성공을 위해 나를 이용하려 하는지 알게 됩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기가 힘들고, 그것을 꼬집기가 힘들어서, 아니면 아예 이야기하기가 귀찮아서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태도로 자신의 유익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며 살아갑니다. 매사에 성실하게 일을 수행하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 덕이 되도록 살아갑니다. 보이는 부분부터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꼼꼼하게 최선을 다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시간이 갈수록 진가가 드러납니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사람을 좋아하게 되고, 이러한 사람은 그릇으로 성장할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는 시야의 차이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눈앞의 것만을 생각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미래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앞의 사람만을 상대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이를 염두에 두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주어진 일만 생각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일이 돌아가는 모든 원리를 이해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실로 지혜로운 사람은 시야가 하나님에게까지 닿은 사람입니다. 인생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하나님께서 인생을 인도하고 계시며,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고 계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심지어 평가받지 못하는 자리에서도 동일하게 변하지 않고 일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통해 당신의 일을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죄악을 내려놓고, 모든 삶에서 주님 닮기에 애쓰며, 주님을 신뢰하고 담대하게 한걸음 한걸음 나아갑니다.

 

이러한 모습은 비단 종의 모습 아니라 상전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자기의 욕심이나 탐욕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의와 공평을 베풀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실하게 구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논어 헌문편에 보면 견리사의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이익을 보면, 이익이 의로운 일인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익과 의로움을 때때로 충돌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넘어서 하나님의 앞에서 의로움과 공평, 참된 가치를 구할 주님은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일의 주권은 하늘의 상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느 자리에서 어느 역할을 하던지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은혜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은혜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삶을 삽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 닮아가는 사람이 되었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모든 자리에서 주님의 겸손함과 성실함, 그리고 사랑과 희생을 기억하고, 모든 삶의 자리에서 주님께 순종하여 사랑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입니다. 또한 그것은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주시고, 소망이 되어주셨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으며, 담대하게 주님을 신뢰하고 모든 자리에서 주님의 뜻을 먼저 선택하는 용기를 갖고 살아갑니다. 지금 여기가 예배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주님께 드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에, 우리의 삶에서는 예수의 향기가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통해 일하실 것입니다. 이를 굳게 믿고 주님과 동행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