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한 기도 (2015.2.15. 대학부 집회 설교)
눅 11장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저는 어릴적부터 호기심 대마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며 호기심을 충족시키며 다녔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는 비디오테이프를 빌려다가 보곤 했습니다. 어느날은 홍콩 영화를 빌려봤었는데 그 주인공이 롤러 스케이트 뒤에 로케트를 달고 빠른속도로 달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날부터 그게 정말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매일 같이 롤러 스케이트를 사달라고 졸라댔습니다. 몇주를 졸라서 롤러스케이트를 사고 분수 불꽃을 사서 붙이고는 똑같이 시연을 해보았습니다. 한번은 인디아나 존스를 보았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탐험에 꽂혀서 아버지께 망원경과 무전기를 사달라고 그렇게 졸라댔습니다. 몇주를 졸라서 결국 싸구려 쌍안경과 무전기를 얻어 동네 아이들과 뒷산으로 탐험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백투더 퓨처 영화를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날라다니는 스케이트 보드가 나오는데, 그것을 보고 꽂혀서 스케이트 보드를 사달라고 그렇게 졸라대기도 하였습니다. 이밖에도 탐정 놀이를 한다고 녹음기를 사달라고 하고, 외국인을 만나러 간다고 전자수첩을 사달라고 하고, 여튼 별의 별 잡동사니를 다 사달라고 졸라댔던 기억이 납니다. 제 기억으로는 졸라대는 것도 어찌나 지독하게 졸라 댔던지 아빠 옆에서 똥파리처럼 끊임없이 조잘조잘 대며 졸라댔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제가 어린시절 저의 집 형편은 정말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때때로 제가 졸라댔던 물건들을 사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지금 생각해보면 경이로운 것은 그것게 쓸데없어 보이는 것들을 사달라고 졸라댔음에도 불구하고, 제 아버지는 한번도 저에게 그런 것으로 화를 낸적이 없으셨습니다. 물론 다 사주시지는 않았지만 화를 내거나 나무라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신다는 마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고, 제가 조르는 것에 대해서도 조금도 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얼마나 철없는 것이었는지, 더불어 얼마나 부모님이 나를 아껴주셨는지가 깊이 느껴집니다. 이제는 부모님께 무엇인가를 사달라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려 노력합니다. 아쉬운 것은 조금 더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는 것, 부모님으로부터 조금 더 조언을 듣지 못하는 것, 부모님께 조금 더 나은 아들이 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아쉬움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며 이러한 어린 시절 기억이 참 많이 떠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좀 더 졸라라, 하나님께 좀 더 매달려라, 하나님께 좀 더 칭얼대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며 예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로 그 핵심에 ‘아버지’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아람어로 아바, 압바, 우리나라 말로 말그래도 아빠라는 단어입니다. 마음 놓고 달라고 칭얼댈 수 있는 존재, 서운하면 서운하다고 말할 수 있는 존재, 심지어 짜증나면 짜증도 마음껏 내는 존재, 너무나 뻔뻔하고 당당한 대상 바로 우리 엄마, 아빠입니다. 아기가 엄마한테 젖 달라고 할 때 너무 당당합니다. 어린이들이 어린이날에 선물을 달라고 할 때 보면 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습니다. 크리스마스나 어린이날 그냥 넘어가면 폭동이 일어날 듯합니다. 중고등학생들 기껏 키워놓으면 부모에게 한다는 말이 엄마아빠가 나한테 해준 게 뭐있어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집에서 좀만 배고프고, 좀만 아프고, 좀만 귀찮으면 엄마 아빠한테 짜증내는 거 다 압니다. 왜 자식들은 부모님한테 주는 것 없이 뻔뻔할까요? 바로 엄마, 아빠가 우리를 진짜 사랑한다는 것을 뼛속까지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막해도 우리 부모님은 절대 날 안 버릴거라는 것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에 집에서 살아보십시오. 밥 먹을 때 김치 더 달라고 하는 것도 눈치 보입니다. 우리는 우리 부모님이기 때문에 이렇게 당당하고, 뻔뻔하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이러한 존재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 무엇보다 친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는 창조주, 아버지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정말 친한 친구는 민폐인 줄 알면서도 새벽에 들어가서 먹을 것 내놓으라고 요구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우리의 정말 친한 분이라면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정말로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께 요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유치한 것을 요구해, 어떻게 이렇게 소소한 것을 요구해, 어떻게 이렇게 내 욕심을 요구해, 하며 이것저것 다 피하고 하나님께는 가장 고고해 보이는 것만을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라의 통일과 세계의 평화 같은 거창한 기도제목만 가지로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별히 주워들은 것 많은 모태 신앙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과 친밀한 신뢰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내 가장 낮은 곳, 내 가장 취약한 곳의 감정과 상태, 욕망과 고민을 올려드리는 기도가 가장 겸손한 기도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상사를 깊이 교제하기 원하십니다. 이러한 기도 속에서 솔직한 내가 나오고, 솔직한 자기를 하나님께 고백할 수 있으며, 솔직한 자기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일상을 교제 하지 않는 친구와 함께 대의를 도모하는 법은 없습니다. 다윗의 시편을 보십시오. 일상 속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원수들과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저 원수들 하나님이 다 잡아서 복수해주십시오. 하나님 하나님이 자 없애주세요. 라고 아주 적나라하게 고백합니다. 그것이 다윗의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을 다 들어주시고, 결국 다윗의 마음을 변화시켜주셔서, 결국 원수를 용서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결국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기도로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 하나님께 솔직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의 마음과 감정, 욕망을 솔직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구하기도 하고, 찾기도 하고, 두드리기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짖기도 해야 합니다. 기도의 은사를 구하기도 해야 합니다. 시간을 내서 기도해야 합니다. (많은 모태 신앙자들이 기도는 일상적으로 하는 거야 하며 착각합니다.) 수련회에 가서 하나님께 인생을 걸고 기도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노력들을 귀하게 여겨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 결국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결국 하나님을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인도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사건을 성령님을 통해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욕심과 자랑, 허세를 내려놓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죄인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첫 기도는 언제나 솔직한 우리 자신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그러한 기도를 요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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