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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새롭게 (2020.12.20. 주일예배 설교, 마태복음 13:53~58)

마태복음 13

53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그 곳을 떠나서

54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56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58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오늘은 대림절 마지막주, 성탄절을 앞두고 드리는 예배를 드리는 주일입니다. 우리는 지난 4주간에 걸쳐 함께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 왔습니다. 2000년전 이땅에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또한 동시에 우리의 삶의 중심에 예수님이 함께하시길 기대하면서 이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작년 이 맘때 즈음을 생각해보면, 온 마트마다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산타 할아버지로 분장한 사람과 사진을 찍는 등 여러 행사들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올해는 코비드 19로 인해 성탄절을 기념할 만한 이러한 행사들이 거의 사라지고, 그 어느때보다 조용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더욱 예수님을 깊이 묵상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성탄절까지 닷새가 남았는데, 이 시간 더욱 우리 예수님을 기대하고 기억하는 시간들 보내시길 축복합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상은의 언젠가는이라는 노래입니다. 그 노래의 가사 중에 이러한 가사가 있습니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하지만 이제 뒤돌아 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이 가사를 들을 때마다, 우리가 정말 가까이에 있는 것은 그 소중함과 가치를 알기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그것을 잃게 되었을 때에야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매일 지지고 볶으며 사는 내 가족, 내 배우자, 내 일터, 그리고 내 교회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겐 너무 익숙한 것이기 때문에 그 소중함을 때때로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오히려 무시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잘 알고 있다는 생각, 내겐 너무 평범하고 흔한 것처럼 느껴진다는 생각이 그러한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날 아주 유명한 가수 아이유도 가수가 된다고 할 때, 그 친척들이 "어린애가 공부는 안 하고 노래 바람이 났다.", "쟤가 연예인 되기 전에 내가 백만장자 되겠다!"라며 빈정대었다고 합니다. 정작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그 진가와 소중함을 잘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예수님 또한 이러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모습은 똑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하나님 나라 비유 설교를 마치신 뒤에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들에게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모인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당시에는 회당에서는 말씀을 읽고 가르쳤기 때문에, 아마도 말씀을 새롭게 해석해주시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음을 선포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메시지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예수님에게 가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이전에 알고 있었던 기준과 잣대로 예수님을 판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54절에서 56절까지 말씀은 그들의 반응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제가 봉독하겠습니다.

 

54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56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저 사람이 저런 지혜와 능력을 어디서 받았을까? 저 사람은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리고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 동네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런 모든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생겼을까?” 그들은 그 가족들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의 형편과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기준으로 예수님을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엔 예수님은 결코 메시아가 될 수 없었고, 더더군다나 하나님은 더더욱 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저 동네 아는 사람 정도로 취급하였습니다. 이들의 귀에 예수님의 메시지는 조금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저 예수님의 깊은 지혜와 하나님께서 주신 듯한 능력에 놀라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의 이러한 반응에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57, 58절 말씀은 이러한 이들의 태도를 예수님께서 어떻게 받아들이셨는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제가 봉독하겠습니다.

 

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58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도무지 믿지 않으려는 이들, 배척하려는 이들을 보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선지자도 자기 고향과 자기 집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이 당신의 말씀을 믿지 않자, 그들에게는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은 떠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바라보며,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 나사렛 사람들 참 어리석구나. 예수님과 저렇게 가까운 곳에서 함께 지냈으면서 어떻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 수 있지? 어떻게 저렇게 무심하게 예수님을 배척하고, 어떻게 예수님을 떠나보낼 수 있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나사렛 사람들이 특별히 더 어리석고, 특별히 더 악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만약 이 시기에 나사렛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면, 이들과 똑같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제 아내에게 보낸 작은 엽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엽서에는 이런 문구가 하나 적혀 있었습니다. 한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우리는 누군가를 살펴볼 때에 그 사람을 깊이, 자세히 살피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의 뿌리는 어떠한지, 그 사람이 어떤 귀한 장점들이 있는지,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살피지 않습니다. 또한 그 사람을 오래 보는 것은 더더욱 어려워합니다. 그러면서 너무 쉽게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단정지어 버립니다. 사실 누군가가 우리를 그렇게 판단하면 우리는 아주 기분 나빠집니다. ‘네가 나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그래?’ 이런 마음이 솟아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뒤돌아서서 다른 사람은 똑같이 그렇게 판단해버리곤 하는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목회를 하면서 깨달은 것 하나가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아는 것은 정말 어렵다는 것입니다. 제가 잘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순간들이 생각보다 참 많았습니다. 누군가를 알아가기 위해서는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일입니다. 한평생을 같이 사는 가족도 우리가 모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사람 앞에서, 시간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그렇게 자세히 볼 때, 오래 두고 볼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잘 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알아가는 속에서 예쁨을 발견하고,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을 놓치게 되면 알아도 알지 못하게 되고, 보아도 보지 못하게 되며, 들어도 듣지 못하게 됩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실수는 이처럼 예수님을 알고 있었다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집안과 가족을 알고 있었고,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었고, 예수님의 상황과 형편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깊이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정작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또한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을 조금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러한 일들은 사실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 속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 익숙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온 세계가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며 축하하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이 유명함과 익숙함이 오히려 우리가 예수님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데에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고향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이야기 합니다. 나는 기독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 문화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성경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교리와 신앙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매주 설교를 듣고 성경공부를 하면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성경도 몇 번이나 읽었습니다. 나는 교회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교회에 다녀왔고, 심지어 내 가족 중에도 목사님 장로님이 많기 때문입니다. 나는 믿음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어느 정도 신앙체험도 해봤고, 신앙 생활 역시 오랫동안 해왔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지금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도, 신앙 생활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하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익숙해지는 것과 아는 것을 착각합니다. 자세히 보는 법, 오랜 시간을 들여서 보는 법을 배우지 않고, 너무 쉽게 안다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일의 한 분야나 문화의 한 분야를 아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사람을 아는 것은 훨씬 더 오랜 시간 마음을 써야 가능한 일입니다. 하물며 우리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알아가는 데에는 얼마나 오랜 시간, 마음을 다해 애써야 할까요? 우리는 그분의 아주 작은 부분 하나도 다 알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매일 매일 주님을 더 알아가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아는 데에 가장 크게 실패하는 이유는 그것을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생각하는 문화와 환경 속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생각하는 교만 속에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가장 심각하게 소외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내려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은 하나님이십니다. 히브리서 415절 말씀을 보면 우리 예수님은 우리 사람의 모든 연약함과 한계를 똑같이 경험하신 완전한 사람으로 이 땅에서 사셨습니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우리의 눈높이와 우리의 수준을 맞춰주신 우리 하나님의 섬세하신 사랑과 배려와 섬김이 우리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하나님됨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그저 예수님의 사람됨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것은 당대 유대지도자들이었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그리고 율법에 능통했던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제자들마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 같은 사람이 메시아일리 없다고 생각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동참하거나 실망하여 도망갔습니다. 하나님도 잘 알고, 사람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겸손함을 요청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의 대한 겸손함, 말씀에 대한 겸손함, 은혜에 대한 겸손함입니다. 나아가서는 이웃에 대한 겸손함, 삶에 대한 겸손함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주님을 찾으며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매일 매일 새로운 믿음과 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더욱 깊이, 더욱 자세히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얼굴을 가리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더욱 알고자 한다면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한 아름다움과 사랑과 은혜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실 때에 매일 매일 새로운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시면서 하루 먹을 양식을 위해 간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루의 만나와 하루의 양식을 기도하라는 것은, 매일 기도하라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더욱 새롭게 주님을 만나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놀라우신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늘 더욱 더 새롭게 당신을 보이시는 분이십니다. 어린 시절부터 저는 부모님이 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이를 낳아보니, 부모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완전히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목회는 기도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담임 목회를 하다보니, 목회를 기도로 해야 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완전히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주님을 알아가는 것이 이와 비슷하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으나,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이야기로 들리게 되는 것, 주님은 그렇게 우리의 모든 신앙과 삶을 당신의 새로움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움으로 우리는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주님의 사랑과 아름다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놀라운 영광의 자리로 날마다 함께 걸어가는 우리 새벽교회 모든 성도님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