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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우심의 근거 (2014.1.3 금요기도회 설교)


히브리서 2장 10-18절 

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4)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제가 참 좋아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청춘’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대로 뜻을 살펴보면 푸른 봄이라는 뜻이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쓸때에는 젊은 시절을 뜻합니다. 청춘이라는 말은 실제로 나이가 젊은 친구들에게 사용하는 말이지만, 저는 마음이 건강하고 생각이 건강하다면 그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청춘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성도 여러분은 청춘이십니까? 마음만은 아직도 푸른 봄과 같으십니까? 우리 성도님들의 밝은 미소를 보니 아 우리교회는 청춘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청춘을 생각하면서, 아 우리가 청춘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하나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일까요? 저는 ‘여전히 질문을 하고 사는가?’가 청춘인지 아닌지를 구분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질문이 많은 사람, 여전히 궁금한 것이 많은 사람, 다시 말하면 아직도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많은 사람이 청춘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을 보내는 우리 아이들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아주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하늘은 왜 파래? 저녁이 되면 왜 빨개져? 왜 겨울에는 눈이와? 여름에 소나기는 어디에서 오는 거야? 아빠랑 엄마랑은 왜 다르게 생겼어? 나는 언제 어른이 돼? 등등 수도 없이 많은 질문들을 합니다. 그리고 점점 더 성장하면서 우리는 더욱 더 깊은 질문들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나는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내 정체성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가장 소중한 가치는 무엇일까? 인생의 의미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우리는 성장할수록 더욱 더 깊고, 심오하고, 어려운 질문들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질문할 수 있는 마음, 궁금증, 호기심, 고민 등은 모두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 활력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질문한다는 것은 더욱 다른 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겸손하게 자신을 고칠 자세를 가지고 세상과 이웃에게 열려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아직 질문이 남아 있는 사람이 곧 청춘입니다. 그러나 청춘을 떠난 사람은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져가는 사람입니다. 더 이상 질문이 남아있지 않고 답만 남아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듣기보다는 가르치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질문하기보다는 자신의 답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며 비판하기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더 이상 어떠한 것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 않고,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단정 짓는 사람입니다. 어떤 일이든 매듭짓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미 청춘이 아닌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기위해서는 ‘질문’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끊임없이 질문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질문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들이 어떤 뜻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명동이나 서울역에 나가보면 흔히 볼 수 있는 전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열정은 참 뜨겁지만 그들이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그들로 인해 감격하는 사람은 참 적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이 사람들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지 않을까요? 그것은 질문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억지로 답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답을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소리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그들의 태도를 무례하다고 여기고, 오만하다고 여길 수 밖에 없습니다. 앞서 말한 더 이상 ‘푸른 봄’과 같은 마음이 없는 사람들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들을 만나실 때 ‘질문’의 자리에서 만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에 대해, 세상에 대해 질문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사람들이 고통을 통해서, 혹은 새로운 경험이나 만남을 통해서, 혹은 외로움을 통해서 그 질문의 자리까지 나아왔을 때 하나님은 그곳에 계셨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브라함을 만나셨을 때 그는 벌써 75세의 늙은 나이였습니다. 고향에서 그는 히브리인으로 살아왔습니다. 히브리의 어원은 하비루인데, 그 뜻은 지금으로 따지면 도시빈민이었습니다. 그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아버지를 잃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내 역시 아이를 낳지 못하는 비참한 상태였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속이고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도망가던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황량한 사막에서 돌베게를 베고 자며 하나님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비참하게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오해를 받아 감옥에서 미래를 기약하지 못하고 철저히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그 곳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모세는 왕자로 살아왔으나 동족의 문제로 인해 살인자가 되었고 광야 쫓겨나 인생의 막바지인 80살이 되어서야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한나는 아이가 없어 비참하게 울다가 하나님을 만났고, 나오미는 두 아들을 잃고 스스로를 고통받는 사람이라 부르며,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야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밖에 얼마나 많은 성경의 인물들이 가장 어려운 그때에 하나님을 부르며 질문하였는지 모릅니다. 삶 속에서 가장 처절한 질문을 하는 그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은 참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아이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받은 가장 큰 충격 중 하나는 누구나 마음 속에 한가지 무거운 추가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나만 힘든게 아니구나, 우리 모두의 삶은 각자의 고통이 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 말할 수 없어도, 다 표현할 수 없어도 우리는 모두 눈물의 길 하나씩을 마음 속에 두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길들에게 대해서 우리는 오늘도 질문을 하며 살아갑니다. 다같이 시편 22편 1-2절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어찌하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돕지 아니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 기도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오늘 우리는 구경자 권사님의 슬픔에 함께 하였습니다. 그 슬픔 속에서 우리는 또한 우리 담임목사님의 슬픔도 함께 보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슬픔 속에서 제 어머니의 눈물도 함께 보았습니다. 저의 어머니도 딸을 하나 잃으신 기억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누나인데, 어린 시절 집 앞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때 저의 어머니께서 이 차가워진 아이를 들고 거의 정신이 없으신 채로 서른 군데가 넘는 병원을 뛰어다니셨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떠난 것을 머리로는 아는 데 그 간절함이 그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평생 고생하시며 사신 어머니,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시는 삶 뒤에 그런 아픔이 있는 것을 알고,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오늘 이 말씀에 나오는 탄식,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외치는 탄식은 눈물과 아픔 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답하시는 응답은 우리의 이 탄식에 대한 답입니다. 우리가 쉽게 이야기하는 구원, 생명, 영광, 형제, 자매가 되었다 하는 모든 단어들은 바로 이 탄식에 대한 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들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이러한 질문의 무거움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러한 단어들을 오늘 내가 조금 더 잘 살고, 더 성공하는 데, 더 편한데 활용할 뿐입니다. 우리에게 그 깊은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가 온몸으로 울며 절규한 그 외침에 대한 응답입니다. 아니 우리가 고통 속에 있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한 그 마음으로 다가오신 응답입니다. 그 아이를 들고 뛰던 여인의 마음으로 다가오신 그 응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무엇일까요?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말씀 10절을 공동번역으로 봉독하겠습니다. 


10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만물은 그분을 위해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많은 자녀들이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로 하여금 고난을 겪게 해서 완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다시 말해 더 이상 그러한 모든 아픔과 슬픔, 절망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고난을 겪게 하시는 것, 그것을 통해 우리는 완전하게 하시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만드시 분께서, 우리를 위하시는 분께서 우리를 위해 죽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기에 대신 죽겠다 외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겠다 결정하신 것이 당연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우리가 죽음 가운데 있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죽음의 권세 아래서 고통받고, 탄식하고, 눈물흘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직접 사람이 되시고, 자신이 직접 죽으셨습니다. 다같이 14절에서 16절을 봉독하겠습니다.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5절을 공동번역으로 읽으면, ‘한평생 죽음의 공포에 싸여 살던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셨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절절한 고통과 아픔을 그냥 두시지 않고, 자신의 죽음으로 해방시켜주신 사건이 바로 ‘구원’인 것입니다. 17절 말씀에는 그가 우리 형제들과 같이 되셨고, 우리의 죄를 속량하셨다 라고 하셨습니다. 18절 말씀에는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그 슬픔과 눈물과 함께 하신 예수님, 그리고 그 죽음의 자리까지 가신 예수님, 그리고 죽음으로써 우리와 형제가 되신 예수님 그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응답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절망 중에서 희망을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 중에서도 영생을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슬픔 중에서도 위로를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래서 교회 내에서 형제님, 자매님 하는 호칭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님 자매님 하는 이 소리가 너무 어색하고,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여기 삼각교회에 사역에 와서도 한동안 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준비하여 이 형제 자매 되었다라는 말은 단순히 가족처럼 여긴다라는 뜻만 가진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절망 가운데에서 예수님으로 인해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다라는 뜻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형제님, 자매님 안에 우리는 하나님과 다시 연합하였다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자주 사용해야겠습니다. 


오늘 말씀 12절, 13절의 말씀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다같이 봉독하겠습니다.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12절의 말씀은 시편 22편의 말씀을 인용하였고, 13절의 말씀은 이사야 8장을 인용하였습니다. 특별히 시편 22편의 말씀은 앞서 우리가 함께 봉독하였던 탄식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통 속에서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탄식을 외쳤습니다. 그때 그 탄식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친히 자신이 육체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질문을 자신의 질문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고통당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십니다. 이르되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내가 이제 그를 의지하리라, 볼지어다 나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우리는 예수님과 형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죽음의 권세에 매여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임한 이 하나님 나라를 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