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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로 (2013.3.10 오후예배 설교)

category 주일 설교 2013. 3. 10. 16:05

아버지께로 (2013.3.10 오후예배 설교)


누가복음 15장 11~32절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2)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오늘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두 아들 중 둘째가 어느 날 자기가 받을 유산을 아버지에게 미리 좀 가불해달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둘째의 지분을 그 둘째에게 나누어주자 이 둘째 아들은 그 돈을 가지고 먼 지역으로 떠나 버립니다. 그 곳에서 방탕하게 돈을 써버린 둘째는 얼마 안가 재산을 모두 탕진하였고, 결국 부랑자 신세가 되어 버립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돼지들이 먹던 쥐엄 열매를 찾아먹고, 그 마저도 없어 굶어 죽게 되자 그때에서야 비로소 아버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굶어 죽을 바에게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서 염치없을망정 거기에 비비는 것이 낫겠다 싶어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 둘째가 돌아오자 혼내기는커녕 큰 사랑으로 그 둘째를 품어주고, 크게 반겨 주었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착실해 보이던 첫째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입니다. 나가서 집안재산 홀라당 날리고 돌아온 둘째를 아버지가 저렇게 환대해주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첫째는 아버지께 대들며 불만을 터뜨렸고, 이에 아버지는 첫째에게 왜 둘째를 반기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줌으로써 이 이야기는 끝을 맺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무한한 사랑을 가진 아버지와 무한 이기주의를 가진 두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 무한 이기주의 두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말씀해주시고자 합니다.


여기 계신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은 대부분 자녀가 있으실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자녀가 어떤 타입일 때 더 속상하시겠습니까? 첫째는 아주 제멋대로인 아들입니다. 일명 청개구리형입니다. 앞으로 가라고 하면 뒤로 가고, 오른쪽으로 가라고 하면 왼쪽으로 가는 아들입니다. 도무지 말을 듣지 않고 떼쓰고, 울고, 자기 것만 챙기는 타입입니다. 마트 같은 곳에 갔을 때 맘에 드는 것이 있으면 드러누워 우는 스타일입니다. 뭐든지 자기 맘대로 해야 직성이 풀려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스타일입니다. 말대꾸를 잘하고, 따지기를 좋아하며 자기 인생 자기가 알아서 살겠다며 툭하면 가출하는 스타일입니다. 감정적이고, 격정적이며 마음이 왔다갔다 하는 아들입니다. 항상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아들입니다. 둘째는 아주 말을 잘 듣는 타입입니다. 일명 로봇형입니다. 앞으로가라 하면 앞으로가고, 뒤로 가라고 하면 뒤로 갑니다. 웃으라고 하면 웃고, 울라고 하면 우는 타입입니다. 때되면 알아서 밥챙겨 먹고, 생일이 되면 선물을 가져다 주고, 한번도 부모의 말을 거역하지 않는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감정이 없고, 의견이 없습니다. 부모에게 한번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고, 다만 부모이기 때문에 말을 듣습니다. 나를 부양하는 것이 나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내가 가진 재산 때문입니다. 딱 해야 할 것만 하는 아들입니다. 내가 죽어도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는 아들, 아니 슬퍼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우는 모습을 보여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만 곡하는 아들입니다. 어느 아들이 더 우리의 마음을 속상하게 할까요?


오늘 말씀에 나오는 두 아들은 모두 이기적인 아들입니다. 집나간 둘째 아들은 자신의 뜻대로 살기 위해 아버지를 떠나 자기 멋대로 살고자 하는 모습에서 이기적입니다. 집에 있는 큰 아들은 아버지를 이용하여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모습에서 이기적입니다. 이 둘 모두는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자기 자신을 사랑했습니다. 이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 이방인의 모습, 창녀와 세리, 죄인들의 모습, 바리새인의 모습,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느 편에 서든지 모든 인간은 이 두 모습 중 한편에서 있는 것입니다.


먼저 작은 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작은 아들은 스스로 삶을 선택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삶의 주권을 아버지에게서 자기 자신에게로 가져왔습니다. 아버지와의 단절을 통해 스스로 삶을 살기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많이 들어본 결정 아닙니까? 네, 그렇습니다. 작은 아들은 아담과 같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선악의 판단을 더 이상 하나님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이제 내가 홀로 독립하여 아버지와 같이 주인이 되어 살겠다는 선언을 한 것입니다. 아들은 이를 위해서 아버지를 멀리 멀리 떠났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이것을 거부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직 살아있었고, 재산을 주지 않을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작은 아들에게 재산을 순순히 나누어주고, 그가 떠날 때에도 그것을 허락하여 줍니다. 그 길이 죽음의 길, 절망의 길임을 아버지는 알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떠나게 허락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이상해보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지 않아서였을까요? 돌아온 아들을 반겨주는 모습을 볼 때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버지가 무조건 아들을 사랑하여 아들이 하자는 데로 어쩔 수 없이 아들의 뜻을 따른 것일까요? 뒤에 나오는 큰아들에게 보여주는 단호함을 볼 때 그 것 또한 아닐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 아들의 선택을 수용함에 있어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먼저 둘째 아들의 선택을 존중해는 주는 것이었습니다. 자녀가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사랑하고, 스스로 선택하는 것을 존중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둘째를 강제적으로 못가게 하고, 두들겨 때려서 잡아논다면, 이 둘째는 절대 아버지와 친밀하게 관계를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일단 그의 선택을 존중하고 받아줌으로서 스스로 자신의 삶을 찾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버지는 둘째가 비록 지금은 떠나나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올 것을 믿고 기다려준 것입니다. 둘째는 멀리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혼자 살아갈 지혜도 능력도 힘도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죽을 고생을 할 것입니다. 아마 재산도 다 탕진할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자신을 떠올려줄 것 또한 믿었습니다. 삶의 밑바닥을 쳤을 때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를 외쳤을 때 그 때 아버지를 떠올려줄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참으로 아버지를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참 사랑을 나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눈물을 머금고 그 아픔의 길, 고통의 길을 자녀에게 허락해준 것입니다. 그 마음을 위해서, 그 시간을 위해서 기다려준 것입니다. 다같이 20절을 읽겠습니다.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말씀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이 아직도 먼데 아버지가 거기까지 달려갔다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길이 잘못된 길이라는 것을 깨닫기만 한다면 아직도 우리가 의인이 될 길이 먼데 우리에게까지 와서 껴안아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까지 갈길이 아직도 먼데, 우리가 우리 뜻대로 살아갈 수 없다고 고백만 한다면 그래서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고백만한다면 하나님이신 우리 예수님이 우리에게까지 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어준다고 말씀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뜻대로 살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겠습니다. 십자가에 내 모든 것을 걸겠습니다. 나를 내려놓겠습니다. 고백한다면 이 땅에 오신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다시 구원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금가락지를 끼워주고 좋은 옷을 입혀주고 좋은 노래와 춤을 추며 천국잔치를 열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이 이 안에 담겨 있습니다.


둘째로 큰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작은 아들 만큼, 오히려 작은 아들보다 훨씬 더 이기적이었습니다. 작은 아들은 스스로 판단하여 살아보겠다하며 아버지를 떠났지만, 큰아들은 아버지를 이용해서 내 뜻을 이루어보겠다 생각하였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아버지처럼 되고 싶었지만, 큰아들은 아버지를 이용하여 아버지의 것을 가지려 하였습니다. 작은 아들이 어리석었다면, 큰 아들은 악하였습니다. 큰아들은 처음부터 아버지와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마음과 아버지의 뜻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큰아들은 철저히 자기만을 생각하는 선악과를 먹은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선악과를 먹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와 관계가 철저히 끊어지고, 오로지 내 뜻, 내 이익, 내 존재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으면서 그는 아버지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아버지를 계약 관계로 생각하여 내가 이만큼 했으니 당신도 이만큼 하시오 하며 계산하였습니다. 동생이 돌아왔을 때 그래서 그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습니다. 무감했습니다. 자신의 이익에 하등의 도움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감동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계산할 필요가 없는 무가치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의 생각 밖에 있었습니다. 오히려 철저히 합리적인 계산속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어리석음이라 비난했습니다. 모든 반응이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뿌리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아버지는 이러한 큰 아들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였습니다. 다같이 31절, 32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한지, 큰 아들을 향한 평소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동생에게 어떤 마음을 가져주기를 원하는지 직접 설명해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을 재산을 주는 수단으로만 보는 큰아들에게 재산 너머의 자신을 바라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는 말 너머에 있는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다는 선언에 주목해줄 것을 말하였습니다. 염소새끼, 송아지 한 마리에 관심을 두지 말고 나와 함께 있는 것에 네 마음을 주지 않겠니?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니, 동생이 죽었다가 살아났다, 그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냐, 그것은 네가 나와 함께 있는 것이 기쁜 것 만큼 기쁜일이다. 네가 나와 함께 있는 것도 이처럼 기쁘단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호세아 6장 6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은 이와 같은 마음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이처럼 만나고 있을 때가 허다합니다. 이마트에서 장을 보면 적립금이 쌓이고, 그 적립금을 모으면 좋은 물건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생각합니다. 예배를 많이 드리면 포인트가 쌓이고, 새벽기도를 하고 금요기도회를 하고, 수요예배를 드리면 포인트가 쌓입니다. 주방봉사를 하고 중보기도회를 나오면 또 포인트가 쌓입니다. 심지어 교역자들에게 맛있는 것, 좋은 것을 갔다 줘도 포인트가 쌓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포인트가 우리 집에 물질의 축복, 학업의 축복, 건강의 축복으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못 받으면 내 아들, 딸들이 그렇게 받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직도 어려운 일이 많으면 내가 그 포인트를 다 못 쌓아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 너의 수고를 다 안다. 너의 애씀과 헌신을 다 안다. 그래 참 고맙다. 그런데 이미 나의 것이 다 너의 것이다. 네가 가난해도 이미 나의 것이 다 너의 것이다. 네가 지식이 없고, 미천해 보여도 이미 다 나의 것이 너의 것이다. 네가 높은 자리에 오르지 않아도 이미 나의 것이 다 너의 것이다. 내가 이미 너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 얻으려 애쓰기보다 나를 바라보기 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에 앞서서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관계 맺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을 돌이켜보면 하나님께서는 작은 아들 같은 우리들, 큰 아들 같은 우리들을 위해 참 애쓰셨습니다. 말씀에 보면 작은 아들 같이 떠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아브라함도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먼 여행을 떠납니다. 이삭도 우물을 찾아 떠납니다. 야곱도 형 에서에게 쫓겨 먼 길을 떠납니다. 요셉도 애굽을 팔려갑니다. 모세도 애굽사람을 죽이고 미디안 광야로 쫓겨갑니다. 이스라엘 민족 모두가 가나안 길로 가는 과정에서 광야생활을 합니다. 다윗도 사울에게 쫓겨 떠돌아 다닙니다. 북이스라엘, 남유다 모두 멸망하고,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70년이 지난 뒤에나 돌아옵니다. 무엇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길로 모든 인류의 죄를 지고 올라가셨습니다. 이 모든 떠나는 자리는 자신을 비워내는 자리입니다. 우리 안에게 있는 선악과를 토해내는 자리입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을 떠난 죄인임을 자각하고, 내가 하나님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음을 발견하는 자리입니다. 나를 온전히 비워내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떠남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셨습니다.


또한 말씀에는 큰 아들 같은 위선적인 사람,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이 주신 돈, 힘, 부를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나안을 정복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승리에 도취에 하나님을 찬양했지만, 가나안에 정착하자 비의 신 바알을 숭배했습니다. 사울은 아말렉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을 위해 좋은 것들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거짓말 하였습니다. 예레미야에 나오는 거짓 선지자들은 국가의 번영과 부유함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알지 못하였으나 그들이 드리는 제물과 성전의 번영이 하나님의 복을 가져올 것이라 믿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 굳게 믿었습니다. 율법에 집중하는 사이 사람을 억압하고,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자들이 되어갔지만 그들은 오히려 교만하였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진 우상숭배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우상숭배를 거절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사이를 가로막고 있으며, 우리가 하나님을 모른다는 사실도 모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선포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사흘만에 다시 일으키리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워가는 모든 것을 거부하시고,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이러한 자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매주 예배를 드릴 때마다 내가 내 힘을 살지 않겠습니다. 내 삶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모시겠습니다.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 내가 받고 싶은 것을 받기 위한 포인트를 쌓는 것이 아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것, 그것을 하나씩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겠습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내 생각, 내 가치, 내 주장을 내려놓겠습니다. 예수님만을 따르겠습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 아닌 것을 우상을 삼지 않겠습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모든 것을 통해 십자가를 경험하고, 그것들을 통해 나를 비워내는 것입니다. 돈이 내 삶을 결정하지 않는 구나, 아들이 내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구나, 나의 성공과 성취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구나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붙잡고 있던 것들을 내려 놓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부둥켜 않고 기뻐해주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미 내 모든 것에 하나님께서 함께하고 계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이 이미 내 삶속에 가득하구나 깨닫는 것입니다. 이미 이곳이 하나님의 나라이구나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20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우리가 작은 아들과 큰아들과 같은 삶을 떠나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