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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갈과 사라, 율법과 복음 (2021.04.09. 금요기도회 설교. 갈라디아서 4:21~31)

 

갈라디아서 4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여자들은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하갈이라

25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자녀들과 더불어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때에 육체를 따라 자가 성령을 따라 자를 박해한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우리가 갈라디아서 말씀을 함께 나누기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4 말씀의 끝자락에 이르렀습니다. 갈라디아서 말씀이 6장이니 이제 3분의 2 끝냈습니다.

 

제가 갈라디아서 말씀을 나눌때마다, 갈라디아서 말씀이 어떤 배경에서 쓰여진 말씀인지를 먼저 말씀드리고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 전체가 어떠한 내용인지를 크게 조감하는 것이, 말씀 구절구절을 이해하는 것에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훌륭한 예술 작품인 그림을 때를 생각해 봅시다. 처음에 그림 전체를 보고 이게 어떤 그림인지를 다음에, 다음에 부분부분을 살펴서 그림의 특징과 아름다움을 헤아리게 됩니다. 등산을 때를 생각해 봅시다. 처음에 산세를 보고, 등산로 전체를 파악한 다음에, 이제 산을 타면서 산의 디테일한 면을 살펴보게 됩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부분부분이 전체 맥락에서 어떤 의미가 되는 지를 놓치지 않으면서, 부분에 담긴 깊은 뜻을 이해할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말씀의 부분에서 갈라디아서 말씀 전체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 쓰인 말씀인지, 갈라디아서 말씀 전체가 어떠한 내용인지를 먼저 말씀드리고 계속해서 말씀의 부분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매주 말씀 전체 맥락을 들음으로서 그것을 충분히 숙지하셔서, 훗날 갈라디아서 말씀을 다시 읽으실 때에, 말씀을 쉽게 이해하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계속 설명을 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나누었듯이 갈라디아서 말씀은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당시에는 가정에 모이는 형태의 교회였기 때문에 갈라디아 지역에 여려 교회들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이들 전부를 통칭해 갈라디아 교회라 불렀습니다. 갈라디아 지역은 바울이 1 전도여행때에 전도하여 세운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마음과 정성을 다해 극진한 사랑으로 섬겼던 교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교회 성도들 역시 바울의 이러한 섬김과 복음에 온전히 자신들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없는 값진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울이 떠나고 뒤에 갈라디아 교회에 거짓 교사들이 잘못된 교리를 들고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잘못된 가르침을 전했을 아니라, 올바른 복음을 전했던 바울을 비방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참된 사도가 아니라고 이간질 하였습니다. 놀랍게도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넘어가 버렸습니다. 이들은 바울을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바울의 가르침도 거절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식을 들은 바울은 크게 낙심하였습니다. 이들과의 관계가 무너진 것도 바울에게는 충격이었지만, 이들이 복음에서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 더더욱 충격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돌이키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담아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를 통해 자신이 전한 복음이 어떻게 인정받는 옳은 복음인지, 자기 자신이 어떻게 사도가 되었고, 교회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는지, 그리고 거짓 교사들이 가르친 거짓 교리가 틀렸는지, 그리고 참된 복음이 무엇인지를 선포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를 통해 갈라디아 교회가 온전한 복음으로 돌아오길 원했습니다.

 

바울은 1장과 2장을 통해 먼저 자신과 자신을 의심하고 있던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자신이 사도가 있었던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며,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불러 주셨기 때문이라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와 베드로에게 사도로서 인정을 받았다는 것도 선포하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선포한 복음이 그저 자기 생각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도들과 지도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복음이라는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이 정통 복음임을 인증하였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3장과 4 말씀을 통해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선포하였습니다.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의 핵심이 율법주의였기 때문입니다. 거짓들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처럼 구약의 율법의 가르치는 정결례와 규례와 절기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도 할례를 받지 않으면, 유대의 전통을 따르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 구원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이라 선포하였습니다. 오히려 율법이야말로 잠정적인 것이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기 전까지 우리의 죄를 폭로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상 율법의 종이 되지 않아도 됨을 분명히 선포하였습니다. 구원은 율법을 지킴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가르침을 유대인들이 이미 가르치고 있는 사라와 하갈의 이야기에 비유하여 선포하였습니다.  복음은 사라에, 율법은 하갈에 비유하여 선포한 것입니다. 오늘 바울의 선포를 이해하기 위해 잠시 사라와 하갈의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사라와 하갈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을 이해해야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을 낳은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75세가 되던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약속을 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이제껏 살아왔던 너의 방식을 내려놓고, 나의 부르심에 따라 살아가라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이 것이다. 너를 통해 민족을 이루고, 너로 말미암아 많은 이들이 복을 누릴 것이다.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뿌리로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겐 자녀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의 나이는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75세였고, 그의 아내였던 사라 역시 65세였습니다. 둘다 생물학적으로는 아이를 갖기 어려운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의 자녀가 모래알 만큼, 하늘의 만큼 번성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였던 사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종이었던 하갈을 아브라함과 동침시켰습니다. 아브라함도 크게 생각에 반발하지 않았고, 결국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86세가 되던 해에 그렇게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 이스마엘이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자손은 이렇게 인위적인 방법으로 잉태한 자손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신체적 나이가 완전히 노쇠한 사라를 통해 일을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99, 사라가 89세일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할례를 명령하시고,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아이를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어이가 없어서 웃기까지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시한번 분명히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다음해 아브라함이 100, 사라가 90 되던 해에 사이에서 아들 이삭이 탄생하였습니다.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이스라엘의 뿌리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야기가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설명해 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이야기를 비유로 사용하여 선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어떻게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드러낼까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서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하갈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인간적인 노력을 상징하고,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과 약속을 이루어 주시는 은혜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였던 사라의 자손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이미 둘의 나이가 노년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갈림길에 섰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합리적인 판단과 사람의 노력을 믿을것인가, 결국 이들은 인간적인 판단을 믿었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보다는, 변칙을 써서 사람의 생각으로 생각할 때에 가능해 보이는 일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하갈이었습니다. 그러나 하갈을 통해 낳은 아들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아들이 아니었기에 그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없었습니다. 사람의 노력과 판단으로 가는 길이 빠른 지름길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 길은 결국 허망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바울은 율법이 이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할례를 하고 절기를 지키고 규례를 따르고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것이 당장은 사람을 구원하는 길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기 만족은 있을지언정,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을 통해 아들을 낳고 14년이 흐른 뒤에야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완전히 노인이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약속의 자손 이삭을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사건은 하나님의 약속이 온전히 이루어진 것이요, 사람의 능력과 노력을 넘어선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가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복음이 선포하는 구원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판단을 뛰어넘는 ,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이루어지는 ,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통한 구원입니다. 바울은 놀라운 은혜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속에 드러난 것처럼, 우리에게도 놀라운 구원의 은혜가 믿음으로 우리 가운데 선포되었다 선포하였습니다.

 

둘째로 하갈은 임시적인 것을 상징하고, 사라는 영원한 것을 상징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녀가 생기지 않자, 하갈을 통해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브라함의 적장자가 아니었기에 결국 유산을 상속할 아들이 되지 못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아브라함과 사라의 아들인 이삭이 태어나자 이스마엘은 모든 권리를 이삭에게 내어 주어야만 했습니다. 바울은 둘의 운명을  율법과 복음에 비유하였습니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일시적으로 유효한 것이었습니다. 구원의 적장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이전에는 할례를 하고 규례와 정결례를 지키고 절기는 것이 중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이 오시고 뒤에는 모든 것을 넘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예수님께 구원의 권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임시적인 구원의 수단이었던 율법을 넘어서 영원한 구원의 통로가 되시는 예수님을 믿을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셋째로, 하갈은 노예와 같은 삶을 상징하고, 사라는 자유로운 삶을 상징합니다. 하갈은 사라의 여종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아무런 사랑도 없이 아브라함과 동침하여야 했고, 이후에 아들을 낳았어도 계속해서 종의 신분을 유지하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은 하갈이 사라를 무시하기 시작하였는데, 결국 이것으로 사라의 눈밖에 나서 결국 아들과 함께 광야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라의 신분은 달랐습니다. 사라는 처음부터 아브라함의 아내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유인이었고, 아내로서의 권리를 모두 가졌습니다. 그녀는 자유를 가지고 남편과 사랑을 나누었고, 사랑으로 태어난 아들 역시 자유와 더불어 적장자의 권리를 가질 있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은 우리를 종으로 만들고, 복음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만일 율법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두려움과 불안속에 살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선행을 하여야 구원을 얻을 있는지, 내가 얼마나 규례와 정결례와 절기를 철저히 지켜야 구원을 얻을 있는지, 행여나 내가 씻을 없는 죄가 있는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노심초사하며 율법을 지키는 삶은 노예와 같은 삶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의 어떠함으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을 염려하며 구원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 떨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를 가지고 기쁨으로 사랑하고 헌신하는 , 열매맺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차이를 설명하고자 하갈과 사라를 인용하였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비유를 마치며, 하갈과 사라 사이에 있었던 사건 하나를 인용하며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바로 앞서 말씀드렸던 아이를 낳은 하갈이 사라를 무시하고 모욕했던 사건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율법을 따르는 자들이 복음을 따르는 자들을 박해하고 있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바울을 핍박하고,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상황을 비유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거짓 가르침을 몰아내고 온전히 자유의 가르침, 복음안에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를 영원히 누리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바라보며,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믿음을 바라봅시다. 우리의 신앙은 하갈과 같은 신앙입니까, 아니면 사라와 같은 믿음입니까?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라와 같은 믿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신앙입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믿음을 가져야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구원이 모두 우리 하나님의 은혜에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허락하신 것처럼 때가 되면 당신의 뜻을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은혜의 방식으로 온전히 이루실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은혜가 영원하다는 것을 믿는 신앙입니다. 율법은 임시적인 구원의 방법이었다면, 우리 주님의 복음은 영원한 구원의 방법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며 우리의 모든 삶과 죽음 이후까지 반드시 책임지실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야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은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우리 신앙은 결코 행위 신앙, 율법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우리가 못하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는 신앙을 그러한 인과응보의 신앙을 넘어섭니다. 물론 우리의 삶에 관여하시고 때때로 혼을 내시기도 하시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치유하시고, 변화시키고,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깨달을 우리는 궁극적으로 변화합니다. 그리고 사랑에 힘입어 자기 자유 의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바울은 기쁨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우리가 깊이 깨닫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모든 성도님이 놀라운 은혜의 복음을 충만하게 누리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바울이 고백했던 구원의 기쁨이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삶에 가득하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