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초등학문을 넘어서 복음으로 (2021.03.26. 금요기도회 설교. 갈라디아서 4:1~11)

 

갈라디아서 4

1   내가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8   그러나 너희가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노릇 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갈라디아서를 시작한 벌써 두달여가 지났고, 말씀은 절반을 넘어 4장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나누었듯 갈라디아서 말씀은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첫번째 전도여행시에 전도하여 세운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마음을 다해 복음을 전하였고, 개척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나고 뒤에 바울을 반대하고 적대하던 거짓 선교사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왔고, 그들은 거짓 가르침으로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이 틀렸을 아니라, 바울이 진정한 사도가 아니라고 비방하였습니다. 놀랍게도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이러한 가르침에 넘어가 버렸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거짓 가르침을 믿기 시작하였고, 바울과도 관계를 끊어버렸습니다. 바울은 이에 충격을 받았고, 이들을 되돌이키기 위해 직접 편지를 쓰게 것입니다.

 

거짓 선교사들은 이방인이었던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유대인의 율법과 규례와 절기를 지킬 것을 가르쳤습니다. 구약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할 율법과 규례와 절기를 명령하셨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기에 이제껏 유대인들이 지켜왔던 율법과 규례와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특별히 유대인의 징표인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제껏 이러한 것들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 했던 바울은 말씀을 왜곡한 것이며, 사실 바울은 진정한 복음을 모르는 거짓 사도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들면서 그가 사도가 없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차근 차근 반박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만나주셨기 때문이며, 예수님으로부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설명하였습니다. 또한 자기 홀로 사도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지도자들로부터 사도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전하는 복음도 역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설명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정통성 있는 복음이요, 모든 사도들이 함께 고백하는 복음이라는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율법과 믿음을 비교하면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틀렸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하였습니다. 바울은 처음 믿음을 가졌을 때를 생각해보라 물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것이 율법을 지켰기 때문인지, 성령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인지를 생각해보라 물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것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이상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뿐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제 의무적이고 형식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삶을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은혜 안에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율법을 초등교사에 비유해서 설명하였습니다. 설명은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함께 말씀을 봉독하고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 1절과 2 말씀입니다.

 

1   내가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오늘 말씀은 당대의 상황을 이해해야 해석할 있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사람의 권리를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모든 유산을 이어받을 상속자라 할지라도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권리가 없었습니다. 아직 온전한 사람이라 보지 않은 것입니다. 그저 부모님의 소유물에 불과하였습니다.  로마 귀족은 자신의 자녀를 교육하기 위해 훌륭한 지혜를 가진 노예를 교사로 삼고 엄격하게 교육하게 시켰습니다. 규칙과 법도를 따르는 삶을 가르친 것입니다. 후견인과 청지기란 보호자와 관리자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아이는 성인이 때까지 보호와 관리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아이가 12, 13세가 되면 비로소 성인이 되었습니다. 성인들만 입을 있는 옷을 입고, 엄격한 규칙과 규율을 벗어나서 자유를 얻게 되었고, 성인으로서 자기 권리를 행사할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당시 상황을 율법과 복음의 관계, 나아가 기성 종교와 복음의 관계로 비유하였습니다. 3절부터 5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선포합니다. 우리도 어렸을 때에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도 노릇 하였다. 초등학문이라는 단어의 뜻은 비단 율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어는 이제껏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종교적인 모든 행동들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 사자, 바위, , 나무, 이러한 자연을 숭배하고, , , , 우주를 숭배하고, 세상의 황제들과 권세들을 숭배하고, 나아가 어떤 철학이나 신념, 종교들을 숭배하는 행동들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에 이러한 세상의 종교들을 숭배하였습니다. 이러한 종교들과 율법주의는 동일한 원리가 있었습니다. 바로 공로주의, 기복주의입니다.

 

제가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에 거의 아흔이 되신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재작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돌아가신 교수님이신데, 한국 신학계의 거목으로 불리시던 원로 교수님이십니다. 교수님께서 강의정도를 맡아서 하시는 , 수업도 즐거웠지만 옛날 이야기도 즐거웠습니다. 제가 어느 교수님께 옛날 우리 한국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라고 질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교수님께서 주신 이야기가 재미있었습니다. 예전에 불당에 가보면 앞에 부처님이 있고, 부처님 앞에서 설법을 듣고, 설법을 듣고 뒤에 부처님께 간절히 소원을 빌고, 마지막에 나올 때에 불전을 내고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처음 교회가 생기고 뒤에 보니, 부처님 자리에 십자가가 있고 나머지는 똑같았다고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설교를 듣고, 설교를 듣고 뒤에 간절히 기도를 하고, 마지막에 나올 때에 헌금을 내고 나오는 것까지 똑같았다고 합니다. 결국 대상만 바뀔 , 종교의 모양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사회의 종교와 신앙은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심청이 이야기를 보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석을 시주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심청이는 삼백미를 구하기 위해 바다를 오가는 상인들에게 자기 목숨을 팝니다. 그리고 바다의 상인들은 폭풍우를 잠재우기 위해 심청이를 인당수에 제물로 바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인류 역사에 계속해서 내려온 신앙의 모습이었습니다. 대상이 하늘이든, 바다든, 나무든, 산신령이든, 미륵불이든, 관우든, 용왕이든, 곰이든, 호랑이든 사람은 제물이나 헌신이나 공덕을 바치고, 댓가로 사람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그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모습이었습니다. 거꾸로 생각하면 사람의 간절한 마음과 소원을 어떤 대상에 의지해서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종교와 신앙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조상님들이 물을 떠놓고 빌었던 것이나, 서낭당에 가서 빌었던 것이나, 보름달을 보고 빌었던 것이나, 불당에 가서 빌었던 것이나 이러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에도 당연히 이와 똑같은 모습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신앙을 어렸을 때의 신앙이라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우리가 이제껏 믿어왔던 종교의 방식으로 믿었던 신앙이 바로 어린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신앙을 위해 율법을 잠시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방식을 가르쳐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아직 아이는 모든 음식을 골고로 먹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거 먹으면 끝나고 놀아줄게, 이거 안먹으면 오늘 게임은 못한다 이런 것들을 통해 아이들에게 교육을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음식을 먹어야 건강해진다고 이야기해도 그것들이 아이들 마음에 와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신앙의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복과 승리를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복을 받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벌을 받는다. 최선을 다해 율법과 규례와 절기를 지켜라. 이러한 것들을 통해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법을 가르친 것입니다. 마치 초등교사에게 교육을 받는 것처럼, 어린 신앙의 수준에 맞게 하나님을 가르친 것입니다. 우리도 처음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엔, 예수님을 믿고 주일 성수 잘하고 헌금을 잘내면 모든 일이 잘되고, 복을 받고, 성공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있었습니다. 근본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아직 충분히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신앙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을 넘어선 신앙이 바로 복음이라 선포합니다. 이제 어린아이에서 성인의 신앙에 이르는 때가 이르렀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드러내고자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사람의 공로와 율법 준수로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믿음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사랑을 깨닫는 믿음의 자리로 우리를 초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을 만족시킬 있을 것이라 착각했지만 십자가는 그러한 생각이 오히려 교만하고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하였습니다. 우리는 복을 받을 있는 사람이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고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우리의 죄를 속량해 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초대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뒤집는 사건이었습니다. 사람이 신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신에게 사람이 보상을 받는 것이 기존의 믿음이었다면, 사람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있는 존재가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감당할 없는 은혜와 사랑을 주셨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6절과 7절은 복음이 선포하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선포합니다.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그것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힘입어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하신 것입니다. 복음은 선포합니다. 너는 이제 무엇의 종도 아니다. 너는 이제 하나님을 종처럼 바라보지 말아라. 너는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딸이다. 너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을 있게 되었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선포였습니다. 이제껏 우리를 사로잡아왔던 모든 종교적 관습과 규칙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믿고 받아들이는 , 그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다는 것은 이제 모든 것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의 과거도 우리의 현재도 우리의 미래도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도, 우리의 꿈과 소망도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가정도, 일터도, 사업도, 자녀도 모두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고, 불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복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체가 것입니다. 시편 23 6 말씀처럼, 우리의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우리를 따르게 되었으니, 우리는 이제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구원이나 복을 얻기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허락한 은혜와 복을 누리고, 사랑을 나누기 위한 삶이 것입니다. 때때로 삶의 고난이 있을 있고, 아픔이 있을 있고, 여전히 기도가 필요한 삶이지만,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지 않고 인도하고 계심을 믿으며,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일이 것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기도하지만, 다른 모든 종교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가 다른 것은, 우리의 기도는 어떤 공덕이나 공로를 위한 기도가 아니요, 우리의 아버지와의 깊은 교제와 나눔, 그리고 믿음의 기도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놀라운 은혜의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고, 다시 예전의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였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그저 종교적 방식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8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8   그러나 너희가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노릇 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바울은 선포합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받아들이기 , 하나님을 믿기 전에 너희는 각종 신을 섬기고, 우상숭배를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너희의 것들을 바치고, 대가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 종의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여러분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보혈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과 이토록 깊은 관계 안에 살아가고 있는데, 자녀된 권세를 내려놓고 종처럼 하나님을 섬기려 하십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지 않고, 다시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바치고 대가를 얻는 삶으로 돌아가려고 하십니까? 여러분은 다시 이방인처럼, 복음을 알지 못하는 유대인처럼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고, 형식적인 종교를 따르려 하십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한 일들이 헛된 일이 될까 두렵습니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을 따르는 일이 결국은 복음을 다시 종교로 전락시키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세우고 참된 기쁨과 평강과 사랑을 주지만, 종교는 사람을 우상의 종으로 만들고 각종 강박과 비판, 두려움과 불안을 뿐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시작할 때엔 누구나 하나님을 통해 우리가 얻고자 하는 복을 구하며 나아갑니다. 우리의 믿음이 연약하고 어릴 때에는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 삶을 세워주십시오. 사업을 축복해주십시오. 건강을 붙들어 주십시오. 자녀에게 복을 주십시오. 우리는 끊임없이 복을 구하며,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우리의 시간을 드리고, 헌신을 드리고, 예물을 드리고, 기도를 드립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도움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마음을 귀히 여기시고, 기도에 응답하시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거기에서 우리의 믿음이 멈추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시선이 우리의 문제에서 십자가로 옮겨지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는 우리의 모든 삶의 문제와 죄악의 문제와 죽음의 문제를 홀로지고 걸어가신 예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되면, 은혜를 깊이 느끼게 되면, 우리의 믿음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계시고, 우리의 모든 삶을 붙들고 계시며, 태초부터 영원까지 우리의 생명을 붙들고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모든 것에 모든 것을 더하시는 주님이 우리의 모든 삶을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상 우리의 삶의 문제에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불안해하지 않게 됩니다. 조급하지 않게 되며, 의심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이 선포하신대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이 되고, 먼저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되며,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주님의 생명의 열매를 맺어가는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속에서 빛이 되고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관건은 복음을 깨닫는 , 예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 오직 성령 충만 가운데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선포하는 믿음입니다. 놀라운 믿음이 우리 모든 성도님의 심령 가운데 가득하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