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신앙의 본질 (2021.03.19. 금요기도회 설교. 갈라디아서 3:15~29)

 

갈라디아서 3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사람을 가리켜 자손이라 하셨으니 그리스도라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   만일 유업이 율법에서 것이면 약속에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   중보자는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분이시니라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라디아서 말씀은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넘어간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바울의 편지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의 전도여행때에 세운 교회로 바울의 지극한 사랑과 정성으로 돌본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난 후에 바울의 가르침에 반대했던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찾아왔고, 이들의 가르침에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모두 넘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거짓교사들은 바울의 가르침과 바울의 사도됨을 모두 부정하였고, 갈라디아 교회는 이러한 선동에 넘어가 버렸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였고, 이들을 다시 돌이켜 복음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갈라디아서를 보낸 것입니다.

 

바울은 편지를 통해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하나하나 반박하였습니다. 우선은 바울 자신이 사도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 사도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났던 일을 고백하며 자신이 사도가 확실하다는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이 예루살렘교회의 성도와 지도자들, 그리고 사도들에게 인정받고 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이 결코 바울 자신만의 생각이 아니라 모든 교회가 함께 고백하고 있는 복음이며, 오히려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이단이라는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바울은 베드로와의 에피소드까지 들면서 자신의 가르침이 옳은 가르침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율법과 믿음과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비교하여 설명하였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처음 신앙을 가졌을 때를 생각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처음 그리스도인이 것이 마음안에 믿음이 생겼기 때문인지, 아니면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었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 있었던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를 통해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구원을 얻기위해 주목하고 붙잡아야 하는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믿는 믿음이지, 율법을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선포하였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될 있을까요? 그것은 거짓 교사들이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을 주장했고,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쉽게 따라갔는지를 이해하면 있습니다.

 

목회자로서 성도님들을 섬기면서 가장 어려운 부분 하나는 삶의 중요한 선택 앞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선택인지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상황마다, 하나님의 뜻을 적용하고 해석하고 선택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함 마음으로 함께 기도하고, 함께 마음을 모으고, 함께 기도하면서 걸음, 걸음 내딛을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매순간 주님의 뜻을 구하는 것을 어려워하기 때문에 거꾸로 우리의 삶을 이끌어주는 분명한 규칙과 원칙을 요구하고 스스로 정하곤 합니다. 쉽게 이것은 되고, 저것은 안된다. 이것을 하면 복을 받고, 저것을 하면 심판을 받는다. 하나님과의 관계안에서 깊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고민하고 선택하는 대신, 율법과 규칙으로 삶의 길을 결정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결론은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강제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명하고 그것이 간단하기에 사람들은 이러한 방식을 따르는 것을 선호합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이러한 함정에 빠졌습니다. 이제껏 그들에게 율법주의가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확실하게 보증해주는 할례를 주장했습니다. 거룩함을 확증하게 보증해주는 정결례를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절기를 지키고, 규례를 지킴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확신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이제까지의 방식이었고, 그것이 편했으며, 그것이 마음의 안심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은 모양만 바뀐 우리에게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직분을 받고, 종교 생활을 열심히 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교회에서 정해주는 몇가지 규칙, 예를 들어 술을 안마시고, 주일에 일을 안하고,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러한 율법주의의 다른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마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규칙에 사로잡혀서 경직된  종교인이 되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규칙을 따르지 못해 두려워하며 불안해하는 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율법주의를 넘어서는 것이 복음이라고 선포합니다.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거 신앙의 껍질만 지키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저 겉으로만 지키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깊이 들어가 하나님과 진실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우리는 비로소 자유를 얻게 되고, 자유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무엇을 할까, 하지말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삶의 방향과 규칙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을 통해 이러한 원리를 성경말씀에 근거해서 신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15~20 까지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4)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사람을 가리켜 자손이라 하셨으니 그리스도라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   만일 유업이 율법에서 것이면 약속에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   중보자는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분이시니라

 

바울은 율법과 약속을 대조하며 복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율법을 주기 훨씬 이전에 아브라함과 약속을 맺으셨습니다. 약속은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고, 크게 번성하게 하며,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한 만민이 복을 얻게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손을 자신들을 지칭하는 말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손이 단수로 표현된 점을 들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라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보내주겠다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모세의 율법보다 먼저 있었다는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나아가 모세는 율법을 천사를 통해 받은 것이지만, 약속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것임을 선포하며 율법보다 하나님의 약속이 권위가 있음을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인 예수 그리스도가 우월함을 선포하였습니다.

 

계속해서 21~24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이어서 이제까지의 율법의 역할에 대해서 설명하였습니다. 율법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한정된 시기동안만 효력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설명하기 위해 초등교사를 비유로 설명하였습니다. 당시 그리스, 로마 사회에는 초등교사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일종의 과외 선생님인데, 똑똑한 노예가 귀족 자녀들을 보호하며 양육하며 가르치는 제도였습니다. 이들은 귀족자녀들에게 삶의 규칙과 원칙들을 가르치며 엇나가지 않도록 통제하였습니다. 그러나 귀족 자녀들이 성인이 되면 자유를 얻게 되었고, 그때부터는 이상 초등교사로부터 통제를 받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결정할 있는 힘과 능력과 지혜를 얻었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율법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처음에는 이와 같은 규칙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규칙들은 우리를 통제할 근본적으로 우리를 바꾸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러한 율법은 우리가 어디에 서있는 존재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을 , 하나님의 지극히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그것을 바울은 율법으로 우리는 죄인됨을 깨닫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 구원을 얻게 되었다 선포하였습니다.

 

끝으로 25절에서 29 말씀입니다. 제가 봉독하겠습니다.

 

25   믿음이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바울은 우리에게 선포합니다. 우리는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습니다. 믿음안에 거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음 안에서 우리는 세례를 받고,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옷으로 입은 사람들입니다. 왕의 옷을 입은 사람이 왕이고, 귀족의 옷을 입은 사람이 귀족이듯, 우리는 예수님의 옷을 입은 예수님의 사람이 것입니다.

 

바울의 선포에 복음의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율법과 규칙으로 정해진 삶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의해 이끌리는 삶입니다. 율법과 규례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정적이며 제한적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목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놀라운 용서, 그리고 무한한 영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죽기까지 사랑하신다는 주님의 음성에 기울이는 것이요, 삶과 죽음을 넘어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지시겠다는 주님의 선포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의 자리를 나오는 것도, 기도를 하는 것도, 말씀을 듣는 것도, 찬양을 하는 것도, 헌금을 드리는 것도, 속에서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것도 모두 주님의 사랑의 깨닫기 위함이요, 사랑을 고백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결국은 본질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 드렸는데, 본질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 우리의 속에서 보여지는 가장 대표적인 모습은 사람의 기준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기준이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하나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의 가장 단점은 율법을 기준으로 사람을 구분하고 계층화하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고, 자유인과 종을 나누고, 남자와 여자를 구분합니다. 사랑보다는 원칙과 규칙이 우선이요, 구분과 평가가 우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품고 용서하고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드러냅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유산으로 받을 사람이라 선포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새벽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것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고정된 원칙과 규칙이 가장 우선순위가 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지극히 사랑이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은혜가 우리의 대장 되게 해야합니다.  은혜가 우리의 첫째가 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엄격한 종교생활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단단한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며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기적으로 이끌어 갈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고, 우리는 삶의 모든 선택의 자리에서 성령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올바른 선택을 하게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과 지혜로 우리 자신을 구원할 없음을 기억해야합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복음의 원리를 깨닫고 더욱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나아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