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님과 함께 사는 (2021.03.05. 금요기도회 설교. 갈라디아서 2:11~21)

 

갈라디아서 2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우리가 함께 계속 나누고 있는 갈라디아서 말씀은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매번 갈라디아서 말씀을 나눌 때마다 설명을 해드렸듯이,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가장 먼저 선교하고 교회를 세운 바울의 자녀와 같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나고 뒤에 다른 선교사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서는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거짓 선교사들은 바울이 가르친 복음은 잘못된 복음이요, 심지어 바울은 사도로서 인정받지도 못하는 사람이라 주장하였습니다. 놀랍게도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가르침에 넘어가 버렸고, 바울을 거절하고, 바울이 가르친 복음을 거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마음을 크게 상심시켰습니다. 바울에게 있어 가장 귀한 믿음의 자녀들이 거짓 가르침에 속아 복음을 떠나게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써서 그들의 가르침이 무엇이 틀렸는지, 또한 자신의 가르침이 옳은지, 더불어 자신의 사도됨과 자신의 가르침이 어떻게 인정받고 있는지를 선포하였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다시 복음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간절한 바람이 담긴 말씀이 바로 갈라디아서 말씀입니다.

 

거짓 선교사들의 가르침의 핵심은 율법주의 유대주의였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우선됨 완전함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바로 구약의 말씀입니다. 구약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조건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의무를 선포한 말씀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고, 하나님이 선포하신 율법과 규례를 지켜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특히 당시의 유대 바리새인들은 더욱 엄격하게 안식일과 각종 절기들, 그리고 정결 예법을 지켰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백성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르침에 충실했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역시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이제껏 하나님의 백성들이었던 유대인들이 지켜왔던 할례를 하고 절기를 지키고, 율법과 규례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소홀히 가르친 바울은 거짓 가르침을 가르치는 사람이요, 사도도 아니라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완전히 틀린 주장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모든 사도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도들의 공통된 경험이 있었습니다. 사도를 사도로 만든 경험, 그것은 부활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한 뒤에,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모든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보혈의 은혜로 하나님 백성 삼아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규례와 법도로도 우리는 온전히 거룩해줄 없지만,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 우리는 거룩할 있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절기로도 우리는 하나님 안에 온전히 거할 없지만,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온전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우리의 모든 삶은 정결한 삶이 되었고, 우리의 모든 날은 거룩한 날이 되었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전환을 고백하는 이들이 바로 사도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들은 예수님 안에 거한 사람들에게 조건들을 다시 지키라고 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를 갈라디아 교회에게 다시 가르치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이 부활 경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활 경험이 사도들에게 인정받았음을 다시한번 선포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이 가르치는 가르침 또한 예루살렘의 성도들과 사도들에게 인정받았음을 다시한번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어찌해서든지 자신의 가르침이 옳다는 것과 자기 자신이 사도가 맞다는 것을 전해주어, 갈라디아 교회가 옳은 복음으로 돌아오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선포된 오늘 말씀을 통해 베드로와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를 공개하였습니다. 바울이 안디옥에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바울이 보기에 베드로가 적절하지 못한 일을 저질러서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적이 있었습니다. 일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성도들과 함께 한자리에서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자리로 들어오게 되자 베드로가 슬그머니 자리를 뜨게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주의자들,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베드로를 보고 어떻게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식탁에서 밥을 먹냐고 따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베드로와 함께 식사를 하던 다른 유대인들도 안먹은 하면서 베드로와 함께 물러갔고, 바나바도 그러한 상황 속에 휩쓸려 가식적인 행동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자리에서 베드로를 책망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도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 우리가 믿고 있는 신념대로 행동하지 않느냐, 복음을 아는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느냐 따져 물은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형제 자매가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할례를 받았던, 할례를 받지 않았던 모두가 거룩한 존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할례를 받지 않은 이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고 해서 조금도 부정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저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이러한 행동을 하였고, 바울은 이러한 위선적인 행동을 지적한 것입니다. 바울은 에피소드를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전하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내가 가르친 가르침은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를 책망해도 만큼 바른 가르침입니다. 베드로마저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이것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제가 가르치는 가르침은 모두가 인정하는 올바른 가르침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어서 가르침으로 돌아오십시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다시한번 옳은 가르침으로 돌아올 것을 호소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에피소드에 담겨져 있는 깊은 의미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복음이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선포하였습니다. 15절에서 19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바울은 선포합니다. 본디 유대 사람이요, 이방인 출신의 죄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죄인인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할례를 받고, 율법과 규례를 지킨다 할지라도 우리는 온전한 의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이러한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우리는 의롭게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통해서만 의롭게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예수님을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면 우리 예수님의 은혜가 완벽하지 못하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보혈의 은혜로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하셨는데, 우리가 의인이 되기 위해 다른 무엇을 해야 한다면, 우리 주님이 해결하지 못하는 죄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신 분이십니다. 구약의 율법이 아파트 모델하우스 같은 것이라면, 우리 예수님의 복음은 실제 아파트와 같습니다. 구약의 율법과 규례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 그분 자체입니다. 율법과 규례를 통해 우리가 거룩한 사람의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면,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거룩한 사람으로 선포하십니다. 놀라운 예수님의 은혜와 구원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다시 율법을 세울 수도 없고, 율법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다시 구원을 얻기 위해 율법과 규례를 지키고, 정결례를 따르고,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사는지를 선포합니다. 20, 21 말씀입니다.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받기 위해 사는 삶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율법과 규례를 지키며 사는 삶을 넘어섭니다. 오히려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였다는 신비로 살아갑니다.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은 세상의 주관자가 되시고, 우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었습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구분된 , 하나님께 속한 것을 뜻합니다. 구약의 율법은 우리에게 거룩함을 가르쳐 주기 위해 율법과 규례와 절기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민족 (할례), 하나님께 속한 사람 (제사장, 레위인), 하나님께 속한 (가나안), 하나님께 속한 건물(성전), 하나님께 속한 (절기), 하나님께 속한 행동(율법), 하나님께 속한 음식, , 물건(정결) 구분하였고, 구분을 통해 거룩함과 하나님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구분됨을 통해 거룩해질 있었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거꾸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당신의 것으로 삼아주셨고, 우리와 동행하시고, 나아가 우리와 연합하셨습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 우리는 거룩하게 구분하여 하나님을 이해했다면, 우리는 예수님 덕분에 모든 삶이 거룩하여 졌습니다. 바울은 놀라운 신비를 20 말씀에서 이와 같이 선포하였습니다.  나는 성령님 안에서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이전의 , 부정한 , 죄인된 나는 주님과 더불어 죽게 된것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이전의 나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나와 온전히 연합하여 안에 살고 계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에 모든 존재와 모든 삶이 거룩해진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나는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내가 서있는 모든 땅이 거룩한 땅이요, 내가 사는 모든 날이 거룩한 날이요, 존재가 정결하고 거룩하다 칭함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것을 깨달은 사람으로서 이제 삶은 주님이 주신 거룩함에 합당하게 사는 삶으로 내어드렸습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서 자기 몸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사랑과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복음은 우리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다고 선포하신 것은 뜻을 담고 있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할례와 절기와 규례를 지켜야 한다고 선포한 것은 뜻을 깨닫지 못한것과 다름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21 말씀처럼, 놀라운 주님의 은혜를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놀라운 구원의 신비를 깨달아야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나아가 연합하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아무리 화려한 건물도 왕이 살지 않으면 왕궁이라 불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초가집이라도 왕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 그곳은 왕궁이 됩니다. 우리 주님이 초가집 같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왕궁이라 불러주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에 함께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우리 존재를 가장 존귀한 존재로 선포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이에 합당한 삶이 되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놀라운 복음의 신비를 깊이 깨닫는 성도가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진실로 내안에 계시는구나. 의미를 깨달아 , 우리는 우리의 삶속에 주님께서 얼마나 은혜를 주셨는지를 진실로 알게 것입니다. 길을 함께 걸어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