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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을 경험한 사도 바울의 고백 (2021.02.19. 금요기도회 설교. 갈라디아서 1:11~24)

 

갈라디아서 1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   내가 동족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   그러나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나보다 먼저 사도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8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21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23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우리의 고국 한국의 교회들이 여러가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를 계속해서 흔드는 문제 하나는 바로 이단들입니다. 이단들은 왜곡된 교리와 거짓된 가르침으로 성도들의 신앙을 흔들고, 성도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이단들은 여러 종류가 있는 특별히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되는 이단들은 교주가 자기를 신격화하는 이단들입니다. 우리가 이미 아는 신x지, 하x님의 교회, 통x교, JxS, 영x교 등이 이러한 이단들입니다. 이러한 이단들은 사실상 뿌리에서 나온 이단들로 교리 또한 비슷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단들이 흔히 하는 속임수는 이러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이 적었다. 성경에 능통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예수님을 적대하지 않았느냐, 정말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들만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이제는 예수님 시대가 지나서 종말의 시대가 되었다. 종말의 시대에 새로운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에 내려왔다. 사람만이 시대에 구원을 이룰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알아 봤던것처럼, 시대에도 지금의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 아주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들만 새로운 하나님의 사람을 알아보고 선택받았다. 사람들이 여러분이다. 이러한 교리를 성경을 가지고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것이 이단의 설명방법인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들 교주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사람이 바뀌면서 이러한 이단은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단의 설명은 당연히 성경 말씀을 교묘히 왜곡한 설명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시대와 종말의 시대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는 세상 끝나는 날까지 모두 예수님의 시대, 신약의 시대입니다. 이단들은 자신들의 교주를 위해 종말의 시대를 만들고, 종말의 시대를 위한 새로운 구세주의 자리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구세주는 없습니다. 땅에 다시 오실 분은 오직 우리 예수님이시요, 또한 우리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볼 있다고 말씀은 전하고 있습니다.  

 

한가지 매우 중요한 점은 당대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에는 누구도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이라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세주요,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은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후, 이를 직접 목격한 사람들에 의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당대에 사람과 하나님을 엄격히 구분했던 유대인들이,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나 그림조차 만들지 않고,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마저 직접 부르지 않았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이라고 부르게 것은 부활이라는 어마어마하게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늘날 어떤 이단 교주가 나왔을 그의 말이나 행동 정도를 보고 그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시작은 우리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바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가말리엘이라는 당대 최고의 율법학자에게 사사를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냐면, 구약의 주요 구절들을 모두 암송하는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골수 유대인이었기에, 예수님의 등장을 매우 불편해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전통을 무시하는 행동을 종종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있는 듯한 발언을 하셨다는 소식은 바울을 매우 분노하게 하였습니다. 그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 그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을 잡아 가두는 일에 앞장섰고,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돌로 쳐서 죽이는 일에 가담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의 아들을 참칭하는 , 나아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입에 담을 수도 없이 참담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울을 직접 만나주신 것이었습니다. 이는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당시의 상황을 담아 오늘 말씀에서 이와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11절부터 16절까지 말씀입니다.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   내가 동족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   그러나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을 믿지 않는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자신의 복음이 옳은 것임을 설명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설명의 과정에서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복음을 믿게 되었는지를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설명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무엇으로부터 왔는지가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은 선포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제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어떤 교리를 만들어서, 또는 누군가와 합의해서, 또는 학문적으로 만들어낸 것도 아닙니다. 어떤 신비한 체험을 해서 만들어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었다면, 철저히 율법을 공부한 제가 넘어 갔을 없습니다. 그런것들이었다면 저를 조금도 설득할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유대교를 그냥 믿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또래의 사람보다 지나칠 정도로 열심히 믿었습니다. 얼마나 철저히 믿었던지 예수님께서 율법을 왜곡하고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해서 그를 따르던 사람들을 잡아다 죽이는 일을 하였습니다.  저는 교회의 가장 적대자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와 같은 일을 그만두고 오히려 주님의 복음을 전하게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몸으로 저를 만나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상상속의 일도 아니요, 어떤 신비적인 체험도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육체로 저를 만나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저의 존재를 바꾸었습니다. 제가 부활하신 그분을 증언하는 사람이 것입니다. 저는 우리 예수님께서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저를 선택하시고, 은혜로 저를 부르셨음을 고백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이 것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까지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저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예수님을 따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사 모두 겁에 질려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그저 놀라운 능력이라 생각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들을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지 않을 없게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 그리하여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한 사람들을 사도라 부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씀을 통해 깊이 상고하고자 자신만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16~18 말씀입니다.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나보다 먼저 사도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8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 아무와도 경험을 나누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가족과도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놀랍게도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했던 다른 사람들과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해석을 듣고 선입견에 빠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라비아로 내려갔다가, 다메섹으로 돌아갔습니다. 무려 3여년동안 부활하신 예수님을 묵상하였던 것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시간동안 구약 성경을 상고하며, 부활의 의미를 찾아 나섰을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3년이 지난 후에 베드로를 방문하러 예루살렘에 올라갔고, 그곳에서15 동안 머물며 오직 야고보와 베드로만을 독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자신이 보았던 예수님, 그리고 부활의 의미에 관해 함께 나누었습니다. 놀랍게도 사도들의 고백과 바울의 고백은 일치하였습니다. 성령님께서 이들 가운데 역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했을 , 사도들이 깨달은 첫번째는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신 분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렸을 , 유대인들은 나무에 매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는 신명기 21 23 말씀에 따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아 죽게 된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조차 그들의 믿음을 잃고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죄로 인해 심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예수님의 무죄를 선포하셨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어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사도들은 이사야 말씀과 레위기 말씀을 통해서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고 돌아가신 것은 죄인들을 위한 속죄 제물이 되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용서가 가득 담겨있다는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 죽음과 죄악을 이기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사람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구원하러 땅에 오신 하나님 그분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 이루어진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으며,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목자요 우리는 양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신랑이요, 우리는 신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고, 세상을 주님이 뜻으로 바꾸어 가실 것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예수님께서 세상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주님이 먼저 부활하셨던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주님과 더불어 부활하게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실 것이요, 하늘과 땅에서 성도는 부활한 몸으로 영원히 주님과 거하게 것입니다.

 

바울을 말씀을 통해, 그리고 성령님의 주관하심과 역사하심을 통해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 역시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을 각각의 자리에서 놀라운 은혜를 깨달았고, 함께 모였을 깨달음이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들의 고백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함께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주 고백하는 신앙 고백도 사도들의 고백을 정리한 사도신경입니다.

 

바울은 과정을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고백함으로, 자신의 신앙고백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신 고백이라는 것을 분명히 선포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이 전한 복음이 왜곡되는 일을 막고자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 20~24 말씀은 이러한 바울의 심정을 그대로 전합니다.

 

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21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23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바울을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거짓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제가 박해자였다는 것은 모든 유대 지방의 교회들이 아는 사실입니다. 그들도 저의 회심 소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놀라운 회심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전한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은혜입니다. 가르침으로 다시 돌아오길 바랍니다.

 

바울의 고백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땅에 오셨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다. 고백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도들의 고백을 통해 끊임없이 의미를 찾아 나아가야하는 신앙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도들의 신앙 고백을 진지한 이야기로 듣고,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성령님 안에서 놀라운 은혜를 깊이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귀한 새벽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께 평생 간구하며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진실로 주님을 알기 원합니다. 진실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알기 원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깊이 깨닫고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삶이 하나님 나라의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우리가 주님을 찾아 간구할 , 우리 주님은 반드시 우리를 사도들의 고백으로, 복음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놀라운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성도님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