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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사도들의 동일한 고백, 복음 (2021.02.26. 금요기도회 설교. 갈라디아서 2:1~10)

 

갈라디아서 2

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6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우리가 함께 금요일마다 나누고 있는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제 1차 전도여행 때에 직접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공동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나고 난 뒤에 새롭게 들어온 선교사들이 바울의 선교를 비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이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바울은 사실 사도도 아니라고 비판한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갈라디아의 교회들은 이러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점점 더 바울과는 거리를 두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바울이 가르침을 떠나 새로운 가르침을 수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크게 안타까워 하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바울과의 개인적인 관계의 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참된 복음에서 떠나 잘못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충성되게 잘 섬기던 성도가 갑자기 이단에 빠져서 교회를 떠나게 되면, 그것이 교회에 주는 충격이 매우 큽니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관계가 끊어졌다는 충격과 더불어, 그 성도가 구원의 길에서 멀어졌다는 충격이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 성도가 가족과 같이 함께 지냈던 성도였고, 또 사랑의 마음과 헌신으로 양육해왔던 성도였다면, 그 상실감과 충격은 더더욱 크게 다가옵니다. 바울에게 갈라디아 교회는 첫째 아이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온 마음과 뜻을 다해 세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공동체가 바울을 비방하고, 바울의 가르침을 떠나 잘못된 가르침을 따르게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심정은 쓰라리게 아팠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마음을 담아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통해 갈라디아 교회가 다시 바울의 가르침으로 돌아올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습니다. 바울은 격정적인 마음으로 편지를 썼지만, 동시에 차근차근 자신의 뜻을 전달하였습니다.

 

바울은 편지의 서두부터 자신의 복음이 주님으로부터 온 복음이라는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갈라디아에 온 거짓 선교사들은 유대주의적 복음, 율법주의적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유대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절기를 지키고, 할례를 받고, 유대인의 율례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가르침이 예수님의 역할을 축소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율법을 완성하신 분이십니다. 이전에는 거룩한 날이 있고, 거룩한 음식이 있고, 거룩한 사람의 표징이 있어야 했다면, 이제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모든 날이 거룩한 날이요, 예수님과 더불어 먹는 모든 음식이 거룩한 음식이요, 예수님과 동행하는 모든 사람이 거룩한 사람이여,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모든 삶이 거룩한 삶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진실로 이해하면 거짓 선교사들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는 아직 연약하였고, 오히려 더 엄격해보이는 그들의 가르침에 끌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하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잘못되었습니다. 복음은 사람은 자신의 노력으로 거룩해지는 것을 가르치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거룩해지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조건이 없는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그 은혜를 선물로 주셨기 때문이며, 그 은혜에 깊이 감격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거래를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분이십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예수님 믿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사람에게 추가적인 조건을 계속 말하는 것은 거짓된 속삭임입니다. (식사 초대, 말하지도 않은 부담, 좋은 옷을 사입어야 한다, 향수를 사서 뿌려야 한다. 이런식으로 턱을 높이는 것은 잘못된 일) 바울은 그럴싸해보이는 거짓 선교사들의 가르침이야 말로 사람의 생각이요, 자신의 가르침이야 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가르침이라 선포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선포에 이어서, 곧 자신의 사도됨을 선포하였습니다. 갈라디아의 성도들이 무엇보다 바울이 사도됨을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대 그리스도인들이 사도로 인정하는 것에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동안 함께 했을 것,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목격했을 것,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바울의 적대자들로부터 늘 공격을 당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에 그는 예수님과 함께한 적이 없다. 어떻게 그가 예수님의 사도가 될 수 있는가 이러한 비방을 늘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사람들의 비방에 맞서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경험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오히려 예수님을 비방하고,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을 핍박했던 사람이었기에, 이러한 자신의 극적인 변화야 말로 오히려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진짜 증거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곧장 제자들을 만나지 않고, 3여년을 성경 연구에 매진한 뒤에 제자들을 만났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깨달은 복음이 다른 사도들의 복음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였고, 다른 제자들로부터 자신이 사도됨을 인정받았음을 고백하였습니다.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는 거짓 전도자들의 비방에 맞서, 자신이 사도가 맞다는 것을 팩트 체크 해준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팩트체크의 연장선에서 선포된 말씀입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을 통해, 예루살렘에 있던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도됨만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르쳤던 말씀까지도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말씀 1, 2절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나 사도로 인정을 받은 뒤, 14년 만에 다시 예루살렘에 방문하였습니다. 예전에는 홀로 베드로를 찾아갔지만, 이번에는 동역자였던 바나바와 디도와 함께 예루살렘에 방문하였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성령님의 계시에 따라 올라간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성도들을 만나 자신이 이방 지역에서 전파하고 있는 복음을 설명해주었습니다. 특별히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지도자들은 따로 만나서 자신의 복음을 설명하였습니다. 바울이 이러한 시간을 갖은 것은 바울의 가르침이 예루살렘 교회의 가르침과 다른 사도들의 가르침과 동일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서로 확인하고 불필요한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 였습니다. 바울은 비록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지만, 분명한 예수님의 사도였고, 바울의 가르침은 다른 사도들의 가르침과 같은 가르침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지금까지 해놓은 일이 허사가 되지 않게 하려 이러한 일을 하였다고 선포합니다. 이미 많은 교회들이 바울을 의심하거나 비방하고 있었고, 바울은 이러한 의심과 비방이 선교에 방해가 되었기에 이러한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자신의 가르침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또 다른 사건을 선포하였습니다. 3~5절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바울과 함께 온 디도는 그리스 사람으로 이방인이었습니다.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공표하면서 동시에 그가 할례받지 않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에 그리스도인이 되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함아였습니다. 바울이 보기에 그들은 앞서 설명했듯 그리스도인으로 누리는 자유를 빼앗는 사람이었고, 오히려 율법의 노예로 만들려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에 복종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모든 교회에 분명히 보여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도 자신의 가르침이 옳다는 것을 이 사건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였습니다. 놀랍게도 바울이 이러한 뜻을 드러냈을 때 교회의 지도자들, 교회의 사도들은 바울의 편에 서서 바울을 지지하였습니다. 6절부터 9절까지의 말씀입니다.

 

6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선포합니다. 모든 교회가 인정하고 유력하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 또는 제자였으며, 사도이고, 또 교회의 지도자들인 야고보나 베드로, 요한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 분들은 제가 디도에게 할례를 받지 않게 해도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그것은 복음과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히려 이들이 바울의 이방 전도의 역할이 베드로의 유대인 전도의 역할과 같은 역할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었고, 또한 바울이 이방인들을 전도하는 역할을 맡은 것은 예수님께서 부르신 일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울의 가르침의 방식, 바울의 사도됨, 바울의 뜻을 모두 인정하였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야고보와 베드로, 요한과 더불어 친교를 나누었고, 서로간의 사역을 존중하는 시간을 보낸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시간을 통해 자신이 이러한 이들의 든든한 지지를 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바울과 사도들은 다만 한가지만은 중요하게 생각하자는 약속을 하였는데, 그 약속; 10절 말씀에서 선포되었습니다. 제가 봉독하겠습니다.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바울의 가르침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들은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유대인들에게 필요했던 할례와 절기와 율례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이것들보다 더 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이러한 것들을 강요하지 않는 것을 모두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사도들과 바울이 공통적으로 고백한 그리스도인이 수행해야 하는 의무는 오직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따라 사랑을 하는 삶이었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은 오늘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복음의 의미를 깨닫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먼저 다가와서 선물로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그저 우리에게 사랑으로 주시는 은혜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고, 주님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주님은 자격 없는 우리에게 자격있다 선포해주셨고, 주님은 부정한 우리를 거룩하다 선포해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삶을 동행하여 주시겠다 약속해 주셨고, 주님은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시겠다 선포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상태나 조건에 따라 우리와 함께 하실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은혜로, 그저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 곧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때때로 불안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것도 해야할 것 같고, 저것도 해야할 것 같은 마음이 들때가 있습니다. 뭐라도 해야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주시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그렇게 두렵고 불안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오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기꺼이 주님께 나아가고 싶은 마음,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싶어서 달려가는 그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오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은혜를 주시고, 먼저 사랑을 주셔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케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무시하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조건을 거는 가르침은 거짓된 가르침입니다. 우리 주님은 진실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에게 자신을 던지셨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그 사랑을 깨닫게 된다면, 그 놀라운 은혜를 알게된다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은 주님이 원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누리는 모든 성도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