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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 이후,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늘 불안정하고, 분열하였으며, 우상을 숭배하고 죄를 지었습니다. 가인과 아벨, 라멕, 노아의 홍수, 바벨탑 사건은 이러한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은 생명과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만 올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 그 목마름을 채우려 하나 더 깊은 갈증만을 느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죽음의 권세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그저 바라만 보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셨고,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회복하고자 하셨습니다. 가인을 향한 보호도, 노아의 홍수 사건도, 바벨탑 사건도 이러한 하나님의 노력이었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 직접 찾아오셔서 그 삶을 깊이 만지심으로 하나님을 알리고자 하셨습니다. 그 첫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떠나 죄와 죽음의 권세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참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버려진 고아와 같았습니다. 그는 먼저 삶의 토대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히브리 사람이었습니다. 히브리라는 뜻은 ‘하비루’라는 단어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도시를 유랑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로 표현하면 부랑자, 노숙자, 유랑민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고향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떠났습니다. 낯선 타향에서 아브라함은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낯선 타향을 유리하는 그의 삶은 하나님을 떠나 유리하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는 불안하고 두려운 삶 그 자체를 살아내었을 것입니다. 둘째로 그는 생명이 없었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는 아이를 낳지 못하였습니다. 더욱이 이미 75세가 되었고 더 이상 아이를 낳을 가능성도 없어 보였습니다. 당대에 자녀를 갖지 못한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이라 여겨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력을 드러내지 못하고, 죽음의 권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없는 사람의 비참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브라함을 주목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전혀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며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을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내려놓는 것이지만 사실 하나님은 그의 고통의 멍에, 눈물의 짐, 사망과 억압의 삶을 내려놓기를 요청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지금까지 살아왔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제시하셨습니다. 방랑하고 유리하던 삶에서 하나님 안에서의 믿음의 삶으로, 죽음과 단절의 삶에서 생명과 번성의 삶으로, 홀로 살던 삶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으로 바꿀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나님의 요청에 응답하였습니다. 그는 지금껏 자신을 억압한 삶, 불안함과 두려움 가운데 살던 삶을 과감히 털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삶으로 나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은 이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형편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 그로부터 공급받는 삶을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의 삶을 요청하십니다. 십자가의 삶은 고통의 삶, 죽음의 삶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을 고통과 아픔 가운데 머무르게 했던 집착의 삶, 우상의 삶을 내려놓았던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우상과 집착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으로부터 떠나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우리를 못박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에 스스로를 못 박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풍성히 누린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