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삶 (2015.03.29. 대학부 집회 설교)
누가복음 20장
45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7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1장
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믿음 생활은 그 믿음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을 직면하고, 은총을 간구하며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예수님이 살던 시대에는 글을 배우는 데 특별한 교육이 필요했습니다. 특별히 이 시대 사람들은 대부분 아람어를 썼기 때문에, 히브리어 성경을 읽는 데에는 특별한 교육이 필요했습니다. 공부는 공부를 할 수 있는 충분한 여유가 있는 높은 계층만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종교적인 율법이 일상에서 매우 중요했습니다. 때문에 율법을 공부하고 율법을 해석해줄 전문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이들이 바로 서기관이었습니다. 이들은 종교적으로는 바리새인이었고, 사회적으로는 학자이자, 종교지도자이자 높은 관리였습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판사 + 목사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서기관들은 권위를 상징하는 긴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말 솜씨와 종교적 소양, 인문학적 능력을 이용해서 긴 기도롤 하였습니다. 긴 기도 자체가 그들의 권위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들은 회당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습니다. 언제 어느 자리에 가든지 상석에 앉았고, 의전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도 혜택을 받았습니다. 상류층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서기관들아 너희들이 엄중히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급진적이며 날카로운 경고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지점에서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쉽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판단합니다. 그들을 탐욕스럽고 인정사정없는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과 우리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간단히 문제를 넘어가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자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오늘날의 열심있는 기독교인들과 매우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엄격한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지키는 일을 자신의 목숨만큼 귀하게 여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라는 단어 자체가 구별된 자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유대인들이 했던 마카베오 전쟁 이후 가장 엄격한 종파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물려받은 율법, 말씀의 전통을 존중하고 일상의 모든 것들 속에서 말씀을 충실하게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십일조와 말씀을 엄격히 지키겠다고 약속한 사람들만을 엄격한 평가 기간을 두고 그들 안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고, 죽은 자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이렇게 엄격한 사람들을 예수님은 교만한 사람들, 탐욕스러운 사람들, 외식하는 사람들, 요즘 말로 하면 허세부리는 사람들,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사람들이라고 비판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왜 이러한 비판을 받았을까요? 바리새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충실히, 율법에 맞추어 살려고 애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비판을 받으면서 내가 언제 과부의 가산을 빼앗았나요? 내가 언제 외식하였나요? 내가 언제 교만했나요? 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눈에 보기엔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당신이 스스로 하나님이라 우기면서 율법을 파괴하는 것 아닙니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항변과 분노를 넘어서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그들을 이렇게 비판했을까요. 그들에겐 어떤 문제가 있었을까요.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질문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대체 신앙이란 무엇이냐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에게 물었습니다. 서기관아 너의 기도와 너의 예배가 무엇을 위한 것이냐, 너의 말씀 읽기와 너의 율법 지킴이 무엇을 위한 것이냐 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서기관들의 문제는 그들의 기도와 예배, 말씀읽기와 말씀 실천이 모두 자기 자신과 자기의 신념을 위한 것이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간구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재물을 주시고, 권세를 주시고 영적 권위도 주시고, 나라의 해방을 주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자신에게 이러한 것들이 주어졌을 때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복을 얻었다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얻게 된 모든 것들이 자신이 하나님께 드린 것에 대한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이 모든 지위도, 재산도, 영적 권위도, 대접도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모든 것들이 어떻게 내 손으로 왔는지에 대해서 그 과정과 구조에 대해서는 무감각했습니다. 부끄럽지만 이건 마치, 오늘날의 목회자들이 가난한 성도들이 한푼 두푼 모아 낸 헌금으로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이건 마치, 여러분들이 좋은 대학을 가게 되었을 때 이것은 내가 노력하고, 내가 기도한 결과이니 학벌이 주는 모든 특혜를 누리는 것이 당연한 거야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건 마치 미국과 유럽이 수많은 식민지에서 수많은 약탈과 살인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뒤에,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받는 복이야 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누군가의 헌신으로, 누군가의 아픔 위에서 이익을 누리며 그것을 당연한 것, 곧 하나님의 주신 복이라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신앙은 하나님도 놓칠뿐더러 내 곁의 이웃의 아픔까지도 놓혀 버리게 만들어 버립니다. 예수님은 그 신앙의 핵심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적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뼈아프게 지적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과 더불어 한 과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계층의 비천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그녀를 세상은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아마 회당에서도, 잔치에서도 가장 소외되었을 것입니다. 시장에서도 그녀에게 아무도 인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그녀를 예수님은 주목하셨습니다. 그녀는 비록 가진 것이 없었지만 자신의 연약함을 직면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하나님 앞에서 엎드렸습니다. 그녀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기브 엔 테이크를 요청한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 전부를 사랑으로 드렸습니다. 서기관들은 하나님께 투자했지만, 과부는 헌신했습니다. 그녀는 무엇도 돌려받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렸고, 그 드림을 통해 가난한 이웃을 도왔습니다.
이 과부의 모습은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순종으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주심은 곧 사랑이었습니다. 과부도, 예수님도 온전한 사랑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과부의 드림이 가장 큰 드림이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드림도 가장 큰 드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드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신앙은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하나님께 나의 가진 것 일부를 투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내 모든 존재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온전히 받은 사랑에 감격하여, 그 사랑을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당연히 내 것이라 여기지 않는 것 입니다.모든 것이 은총이요, 모든 것이 감사임을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깨닫는 것입니다. 세상의 아픔에 귀 기울이고, 이웃의 눈물에 공감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신앙은 예수님과 가장 멀리 있는 신앙입니다. 그 신앙의 모습이 아무리 아름다워 보이고, 헌신적으로 보여도 그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자기중심적 신앙과 하나님 중심적 신앙의 핵심적 차이는 무엇일까요? 자기중심적 신앙은 자기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합니다. 자신에게도 율법을 들이대고, 다른 이에게도 율법을 강요합니다. 그리고 율법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합니다. 심지어 천국마저도 자신의 힘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중심적 신앙은 겸손하게 하나님의 구원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를 정직하게 고백하고, 모든 것이 예수님의 은혜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히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합니다. 자기중심적 신앙이 바벨탑과 같은 신앙이라면, 예수님 중심적 신앙은 십자가와 같은 신앙입니다. 자기중심적 신앙은 날이 갈수록 근사해 보이나 교만해지지만, 예수님 중심적 신앙은 날이 갈수록 겸손해보이나 자유와 기쁨과 평안이 있습니다. 자기중심적 신앙은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 들지만, 예수님 중심적 신앙은 죽기까지 겸손해집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자기중심적 신앙을 추구할 때가 많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주신 열정, 꿈, 비전, 영광, 권세, 선한 영향력과 같은 말 속에서 그러한 자기중심적 신앙에 빠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님께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오직 우리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남게 해 주셔서, 그로인해 우리가 예수님 중심의 신앙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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