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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바라보는 (2021.04.04. 주일예배 설교. 마태복음 18:21~35)

 

마태복음 18

21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달란트 빚진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데나리온 빚진 동료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일을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빚을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날은 바로 부활절입니다. 바로 우리 예수님의 부활이야 말로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중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우리 예수님을 그리스도, 메시아로 고백하게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을 때에, 유대인들은 물론이요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죄를 짓고 저주를 받은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신명기 말씀에 나무에 매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의 충격이 매우 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야 예수님이 죄가 없으신 분이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것은 우리의 값을 치르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님께서 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지고 죽으신 것입니다. 나아가 제자들은 우리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저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을 제자들과 함께 있다가 하늘로 승천하사 하나님의 곁으로 가셨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고 사람, 사람의 삶을 인도하시고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고, 우리의 모든 삶을 통치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몸으로 연합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땅에 내려 오실 때에 우리가 주님과 같이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게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믿는 , 그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깨닫게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이제껏 갖고 있던 모든 생각이 뒤집어지는 경험을 하였고, 성경의 모든 말씀을 새롭게 바라보게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고백의 중심이 되는 사건이 바로 부활절 사건입니다. 부활이 우리 모두의 운명을 바꾸었다고 믿는 사람, 그러한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생활은 바로 부활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매주 일요일에 모여서 날을 주일로 지키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의 핵심은 부활을 기념하고, 부활을 축하하고, 부활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매주 지켰던 안식일은 토요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 십계명에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말씀하시면서 안식일을 지켜야하는 이유를 두가지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기 위해 안식일을 지키라 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죽음에서 새로운 생명을 드러내신 새로운 창조가 부활이요,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건져내어 구원하신 새로운 구원이 부활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부활안에 진정한 안식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부활이 있었던 일요일을 진정한 안식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주일을 지키고, 주일을 지키는 것을 우리에게 강조한 전통 속에서는 다름아닌 부활을 새기고, 되새기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담겨 있었습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이하며, 부활을 다시한번 기억하고 새기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은 용서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만일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하면, 제가 형제를 몇번이나 용서하여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그때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하여야 것이다. 둘의 대화는 당연히 용서를 일곱번 것인가, 사백구십번을 것인가에 대한 대화가 아니었습니다. 용서가 의지의 문제인가, 믿음의 문제인가를 바라보는 대화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실천적 차원으로서의 용서를 말하였다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이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를 바라보는 믿음의 차원으로서의 용서를 말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조금 쉽게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를 하나 꺼내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어떤 왕이 하나 있었습니다. 왕이 자기 종들과 정산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요즘 여기 캐나다도 세금 정산 기간이라서, 이제껏 세금과 수입을 계산하고, 기부금과 각종 공제를 계산해서, 어떤 사람은 나라에서 돈을 돌려받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세금을 내기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왕이 자기 종들과 금전관계를 정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정산을 하다보니 어느 종이 달란트의 빚을 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달란트는 실로 어마어마한 돈이었습니다. 만달란트는 요즘 시세로 하면 160억불 정도 되는 한국돈으론 14 정도 되는 엄청난 돈이었습니다. 돈은 사실 어찌해서도 갚을 없는 돈이었습니다. 왕은 종에게 명령하였습니다.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갚아라. 종에게 있어서 왕의 명령은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청천벽력과 같은 명령이었습니다. 사실상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종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애원하며 빌었습니다.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제가 갚겠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러한 종의 모습을 보며 왕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왕이 그를 가엾게 여긴 것입니다. 왕은 어차피 갚을 없는 돈을 탕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풀어주었습니다. 전적인 왕의 연민으로 결정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풀려난 종이 앞에서 풀려나와 가는 길에 자기에게 데나리온을 빚진동료를 만난 것입니다. 데나리온이면 노동자 백일치의 품삯이었습니다. 앞서 계산한 가치에 따라 금값으로 바꾸어 계산해보면 2 6 4백줄정도 되는 돈이었습니다.  아주 적은 돈은 아니었습니다. 종은 자기에게 빚진 동료를 붙들고 멱살을 잡으면서 나한테 빚진 돈을 갚으라 소리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동료가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애원하면서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갚겠습니다. 호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종은 자기 주인이 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습니다. 자기에게 빚진 동료를 그대로 끌고가서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빚을 갚을때까지 꺼내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들은 다른 동료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갇힌 동료를 구하여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모든 상황을 들은 왕은 격노하였습니다. 자기는 자기에게 무려 일만달란트를 빚진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풀어주었는데, 사람은 고작 데나리온 빚진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감옥에 가두었기 때문입니다. 왕은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지 못하는 태도,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태도에 크게 분노하였습니다. 왕은 종을 다시 불러 들였습니다. 그리고 말하였습니다. 너는 악한 종이다. 네가 무릎을 꿇고 간청하기에 나는 네가 빚을 모두 탕감하여 주었다. 왜냐하면 내가 너를 불쌍히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빚을 탕감받고 돌아갔으면, 너는 마땅히 일에 감사하고, 역시 그러한 태도를 갖고 살아야 했다. 그런데, 너는 동료가 너에게 간청을 하는데도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과연 그러한 너의 태도가 옳은 것이냐? 왕은 크게 분노하여 종이 자기 동료에게 그대로 돌려 주었습니다. 빚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야기를 들려 후에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35 말씀을 다같이 봉독하겠습니다.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앞서 말씀드렸듯이 베드로는 용서를 실천의 문제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일곱번 용서할 있는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용서하고 사랑하라 말씀하시니,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기로 결심하려고 것입니다. 사실, 제가 우리 성도 여러분께 용서하며 사셔야 합니다 라고 선포한다면, 우리 성도님들은 번이나 용서를 있을까요? 우리가 과연 한번이나 용서를 제대로 있을까요? 그리고 용서를 한다고 해도 사람이 같은 잘못을 이상 한다고 하면 우리는 용서할 있을까요? 우리의 다짐과 결심을 통해 의지적으로 하는 용서는 사실 이렇게 쉽지 않은 것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용기를 가지고 주님, 제가 일곱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물은 것입니다. 일곱 용서한다는 것은 정말 사람이 최고의 인격 수준으로 용서할 있는 경지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일곱번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번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듣게 되면, 우리는 바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거, 사람의 노력과 의지로는 불가능한 용서이구나. 주님이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말씀하시는구나.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바로 정확한 생각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사람의 능력과 의지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람의 의지를 최대한 높이는 차원을 말한 것이라면, 예수님은 사람의 의지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용서할 있을까요?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야기에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왕은 종에게 악한 종이라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왕이 종을 악하다고 선포했을까요? 그것은 종이 왕이 자신에게 베푼 불쌍히 여김, 긍휼히 여김이 얼마나 사랑이었는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왕이 자기에게 베풀어준 용서가 얼마나 용서였는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종의 시선이 조금도 왕에게 있지 않고, 왕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은 , 그것이 종이 악한 이유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짚어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호기롭게 일곱번 용서하면 되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일곱번이 아니라 한번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내가 용서할 있다 착각하며 내가 용서하겠습니다 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일곱번 용서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용서해야 한단다. 주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서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용서할 없는 사람,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같은 사람이 우리 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그곳에서 머물게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용서 앞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용서할 없는 사람인데, 용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사랑할 없는 사람인데, 사랑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은혜 받을 없는 사람인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용서와 사랑이 우리의 의지와 우리의 힘으로 이루지는 것이 아니라,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은혜를 깨닫는 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은혜를 외면하고 무시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악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은혜와 사랑을 믿고 앞으로 나아갈 때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용서하는 삶으로 조금씩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용서를 믿는 , 삶이 일곱번씩 일흔번 용서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절을 기억하며,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요? 바로 주님의 용서와 사랑입니다.  주님의 용서와 사랑이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주님의 용서와 사랑이 우리의 삶에 충만합니다. 이것을 바라보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온전히 잠긴채 하루 하루를 살아가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