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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를 타신 예수님 (2021.05.16. 주일예배 설교. 마태복음 21:1~11)

 

마태복음 21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저희가 마태복음 말씀으로 주일 말씀을 나눈 벌써 1 반이 지났습니다. 정말 짧지 않은 시간, 예수님의 사역을 깊이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마태복음을 나누는 시간동안 캐나다에서의 새로운 삶의 자리를 다져가고, 목회에 대해서 다시금 결단하고, 무엇보다 코비드 19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우리 예수님을 붙드는 귀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께서는 마태복음이 어떠한 의미로 다가왔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성경만을 가지고 이렇게 오랜 시간 나누는 것이 장점과 단점이 모두 있을 있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성경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면 깊이 나눌 있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다른 좋은 성경들을 없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을 마치면 조금 다양한 말씀을 나눌 것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마태복음을 깊게 나누고 있기에 끝까지 끝마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고, 대신 구약의 말씀과 신약의 다른 말씀들은 아침 묵상 말씀과 금요기도회 말씀을 통해 함께 나누어 가고 있습니다. 성도님들께서도 아침묵상 말씀과 금요기도회 말씀을 함께 들으시며 주일 예배 말씀을 들으신다면 훨씬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실 있을 것입니다. 참고적으로 아침묵상은 열왕기상 말씀을 나누고 있고, 금요기도회는 빌레몬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설교 영상은 아침에 보내드리는 계정에 보시면 모두 업로드 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이제 마태복음이 절정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마침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말씀입니다. 지난주와 지지난 주에 이미 말씀드렸듯, 우리 예수님의 사역은 크게 갈릴리에서의 사역과 예루살렘에서의 사역으로 나뉩니다.

(지도) 우리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생과 사역기간의 거의 대부분을 갈릴리 지역에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베들레헴이었지만, 헤롯의 박해가 있어서 이집트로 잠시 피난을 가셨다가, 갈릴리 지역의 나사렛에서 서른살이 때까지 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서른살 즈음에 사역을 시작하셨는데, 사역지 역시 대부분 갈릴리 지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호숫가 가버나훔이라는 마을에 거점을 잡으셨으며, 호수 주변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모두 어부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 사역, 치유와 이적 사역, 귀신을 쫓는 사역, 많은 이들을 먹이신 사역,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논쟁하신 사역 거의 모든 사역이 갈릴리 지역에서 이루어진 사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갈릴리 사람들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갈릴리에서 사역을 마치신 이후에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이유는 매우 분명하였습니다. 당대 거짓된 종교지도자들, 성전지도자들의 죄악을 드러내고, 하나님 뜻을 선포하신 ,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통해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이제까지의 갈릴리에서의 사역이 뿌리와 줄기와 같은 사역이라면 예루살렘의 사역은 열매와 같은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 사역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부터 20장까지의 말씀은 예수님의 탄생과 갈릴리에서의 사역을 선포한 말씀입니다. 21~28 말씀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사역을 선포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사역은 오늘 우리가 읽은 예루살렘 입성을 통해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 마태복음 아니라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개되었습니다. 오늘은 중요한 예루살렘 입성 말씀을 통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 1~5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과 함께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벳바게에 이르렀습니다. (지도) 지도를 보시면 벳바게는 정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관문과 같은 마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곳에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맞은 마을로 가라. 그곳에 매여 있는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나귀를 지금 어디로 데려가는지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고 말해라. 그리하면 그들이 너희가 나귀를 데리고 가는 것을 허락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실때에 타고갈 짐승으로 어린 나귀를 선택한 것입니다.

 

4, 5 말씀은 이것이 이미 선지자를 통해 예언된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예언된 말씀은 스가랴 9 9 말씀입니다. 함께 말씀도 살펴보겠습니다.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나귀 새끼니라

 

우리 예수님께서는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고자 예수님께서 나귀를 친히 가져오라 명령하시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궁금한 점이 하나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을까요? 우리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스가랴를 통해 이것을 미리 예언하게 하시고, 예수님을 통해 예언을 이루게 하셨을까요? 사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자체에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예수님께서 가운데 선포하신 가르침의 핵심을 다시한번 떠올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된 나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된 나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공의와 정의가 회복된 나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마태복음의 말씀을 통해 내내 살펴보았듯, 우리 예수님은 말씀을 온전히 해석하여 가르치심을 통해, 비유를 통해, 기적을 통해, 치유를 통해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을 선포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당신이 정말 메시아가 맞습니까 라고 물어보았을 때에, 우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1 5 말씀에서  

 

5     맹인이 보며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을 통해 회복되고 있음을 분명히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이루기 위한 마지막 미션, 십자가의 사명을 이루시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 나귀를 탈것이라 예언한 스가랴 9 9절의 말씀을 다시한번 살펴보면 이것이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나귀 새끼니라

 

스가랴 말씀은 선포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왕이 되실 것입니다. 그분은 공의를 이루실 것이고, 구원을 베푸실 것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우리 주님으로 인해 기쁨을 얻을 것이고, 즐거이 찬양하게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통해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게 것이요,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와 온전한 구원을 얻게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고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완전히 이루시는 길을 나귀 타고 올라가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를 통해 주님께서 이루시는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다시한번 보여 주시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실 때에에 복음이라는 단어를 쓰셨습니다. 복음은 유앙겔리온이라는 헬라어 단어인데, 오늘날 우리말로 번역하면 기쁜 소식입니다. (가스펠) 고대 로마사회에서는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는 황태자가 탄생했을 , 황제가 전쟁에서 승리했을 사용했던 단어였습니다. 황제가 새로운 땅을 정복하고, 다시 로마로 당당히 개선하는 소식을 유앙겔리온이라 표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던 시대에 복음, 유앙겔리온이란 단어는 권력과 명예와 승리를 상징하는 단어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가지 흥미로운 것이 있습니다. 당시 황제가 로마로 개선할 때엔 아주 크고 하얀 말을 타고 입성하였습니다. 말을 에쿠스라고 불렀습니다. 에쿠스는 당시 로마 황제의 권세와 명예와 부와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복음, 단어를 천국과 함께 붙여서 천국 복음이라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식을 기쁜 소식이라 가운데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기쁜 소식, 복음은 이제껏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복음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권력과도 거리가 멀고, 명예와도 거리가 것이었습니다. 부와도 거리가 멀고, 전쟁의 승리와도 거리가 것이었습니다. 기쁜 소식은 이러한 것들로 얻어내는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복음은 겸손을 통해, 섬김을 통해,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로마 황제의 방식과는 정확히 반대의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타신 어린 나귀는 이러한 주님의 방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의 복음의 상징이 에쿠스라면, 예수님의 복음의 상징은 어린 나귀 새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알고 있습니다. 로마의 화려한 유적들은 이제 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자랑은 오늘날 박물관에서나 있을 뿐입니다. 강하고 화려했던 권력과 명예와 부가 먼지와 같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로마 황제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여전히 세상의 왕으로 땅을 통치하십니다. 수많은 이들이 주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갑니다. 우리 주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여전히, 그리고 오히려 더욱 풍성하게 땅가운데 확장되어 가고 있습니다. 주님이 진정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어린 나귀와 같은 우리 주님의 복음이 이와 같이 승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주님이 복음으로 전한 하나님 나라의 핵심에는 다름아닌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이토록 겸손히 길을 걸어가신 이유, 자신을 기꺼이 내어 주시며 희생하신 이유는 우리를 향한 지극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 위해서, 우리를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켜주시기 위해서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주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고, 사랑안에서 진정한 공의가 회복되며, 사랑 안에서 우리가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랑으로 세상을 이기셨으며, 사랑으로 왕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다른 무엇이 아닌 우리 예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서 오르시는 이유, 우리 예수님께서 기꺼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사랑을 믿고 받아들일 ,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되며,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깊이 깨닫고 경험할 때에만 진실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라고외쳤습니다. 

호산나는 구원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말을 주님 간절히 구하오니 이제 우리를 구원하여 주옵소서라는 뜻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옷을 거리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이와 같이 외치며 주님을 환영한 것입니다. 이들은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께서 다윗처럼, 왕이 되셔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번영하게 해주기를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어쩌면 이들은 로마의 복음처럼, 예수님께서 에쿠스의 , 승리의 길을 이루어 주길 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주님의 응답은 어린 나귀의 ,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 그리고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 어린 나귀 새끼를 구하면서 유명한 말씀 한구절을 남기셨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말은 나귀를 향한 말이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예수님을 향한 말씀이기도 하셨습니다. 어리고 순전한 나귀, 온전히 주인의 뜻에 순종하였던 나귀와 같이 우리 예수님께서 온전히 자신을 낮추어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순종으로 십자가를 기꺼이 지셨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뚜렷이 드러내는 가장 확실한 증표,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증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에쿠스를 탔던 로마 황제는 자신을 지극히 높혔습니다. 자신을 신이라 선언하였고, 세상이 자신의 이름을 숭배하게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로마 황제를 보며 권력과 명예와 부와 승리를 생각하였고, 그것이 인생에서 참된 가치를 드러내는 증표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 나아가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의 상징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거스르고 자기 자신만을 높이는 것은 그저 죄와 사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에쿠스의 길이 아니라 어린 나귀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다시,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길을 걸어갈 있도록 빛을 비추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빛은 우리를 향한 지극한 사랑입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내어주시며 우리를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진실로 깨달을 , 우리는 기꺼이 주가 쓰시는 나귀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귀가 예수님을 모셨듯, 우리의 삶은 예수님을 드러내는 ,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삶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