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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때린 사람들  (2021.10.03. 주일예배 설교. 마태복음 26:57~68)

 

마태복음 26

57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58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뜰에까지 가서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59   대제사장들과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거짓 증거를 찾으매

60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사람이 와서

61   이르되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있다 하더라 하니

62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3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6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신성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66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자가 누구냐 하더라

 

얼마전 오징어 게임이라는 드라마가 넷플릭스에 나왔습니다.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456명의 사람들을 어떤 비밀장소에 데려와서 456억이라는 상금을 걸고 게임을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게임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같은 전통 게임을 하는 것이었고, 충격적인 것은 게임에 지면 죽음을 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치열한 경쟁사회와 경쟁에서 도태되면 사실상 죽음에 이르는 현실을 빗낸 내용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의 공감을 가져온 같습니다. 전세계 모든 국가에서 1등을 하며 넷플릭스 사상 최고의 흥행을 드라마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드라마 속에서 묘사하는 장면들을 보면 절박한 상황에 놓은 사람들, 죽음 앞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폭력적일 있는지, 얼마나 야비해질 있는 , 사람들이 이제껏 지켜온 도덕과 윤리, 그리고 양심이 얼마나 쉽게 무력해질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선이라는 것을 정말 실천할 있을까에 대해 깊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이 가진 보편성이 드라마가 이처럼 크게 흥행한 이유 중에 하나라 생각 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도 이와 같은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와 죄악을 그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하나님과 더불어 생명과 사랑을 풍성히 누리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타락한 이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죽음과 다툼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생존과 안전 때문에, 자신의 욕심 때문에 끊임없이 다른 이들을 속이고 해치고 빼앗은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나온 뒤에 그들의 아들들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라멕이라는 사람에게 이르렀을 때엔 폭력이 온세상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로 지배했던 이집트의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가 많아지자 남자 아이를 모두 죽이라는 참혹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제국의 번영과 안정을 위해 수많은 아이들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얼마전 우리가 새벽 예배 말씀에도 나누었는데, 모압의 몰렉에겐 전쟁의 승리와 평화를 위해 자기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결국 생존 때문에, 욕망 때문에, 자기의 아들마저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을 행사하고 다른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현실을 말씀은 그대로 보여줍니다. 성경 말씀에서 우상숭배에 대한 비판은 단지 다른 신을 믿는 것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이처럼 종교를 이용하여 자기 욕망을 추구하고, 나아가 과정에서 폭력과 죄악을 정당화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은 이러한 사람들의 죄악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선동하여 자신들의 권위를 흔들고 예루살렘 종교 체제를 어지럽힌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 때문에 자신들이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가장 손쉬운 방법, 그리고 인류가 이제껏 쉽게 해왔던 방법, 예수님을 죽이는 방법을 선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이후로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과 권력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오셔서 상을 뒤집어 엎으시고, 성전을 통해 이익을 챙기는 자들을 비판하신 후에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기에 공개적인 자리에서 예수님을 체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올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길이 자신의 길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실망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에게 예수님의 위치를 누설하였습니다. 결국 이들은 가룟 유다의 인도에 따라 뭉치와 칼을 들고 예수님을 찾아가 예수님을 체포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체포하여 곧장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미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미 사전에 체포와 재판이 모두 치밀하게 계획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명분이 필요하였습니다. 이들은 공정한 재판을 통해 벌을 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벌을 내리기 위해 재판을 것이었습니다.

 

대제사장과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증인들을 앞에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거짓 증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앞뒤가 맞지 않거나 없는 일을 지어낸 말들을 하였습니다. 모두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좋은 명분이 될만한 것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사람이 와서 예수님을 죽일 있을 만한 결정적인 증언을 하였습니다.

 

61, 62 말씀입니다.

 

61   이르되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있다 하더라 하니

62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사람은 이전에 예수님이 하셨던 증언을 그대로 옮겨 증언하였습니다. 증언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실 때에 하셨던 말씀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 18~22 말씀입니다.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성전은 사십육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사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이러한 예수님의 뜻을 이해할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발언을 성전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였고, 자신들이 지키고 있는 성전 체제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들은 이것만으로도 예수님을 충분히 죽일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그들의 오해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은 자기가 품고 있는 확신을 조금 확실히 하기 위해 예수님에게 결정적인 질문을 하였습니다. 63, 64 말씀입니다.

 

63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6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대제사장은 예수님께 직접적으로 물었습니다. 너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며 말해보아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대답하라. 그때까지 침묵하고 있던 예수님께서 명확하게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이미 말하였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이제 이후에 내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다시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게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같은 권위를 가졌다는 것과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을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하나님이라고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대제사장으로서 도저히 받아들일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이것은 명백한 신성모독이었습니다. 65절부터 68절까지 말씀은 예수님에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신성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66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자가 누구냐 하더라

 

당시 유대인들은 듣지 못할 이야기를 들었을 자신의 비통함을 표현하기 위해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자기가 듣지 못할 이야기를 들었다는 표시로 이처럼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신성모독을 하였다는 말을 공표하였습니다. 대제사장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말을 사람에게 해당하는 벌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사람들은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응답하였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했던 이들에게 예수님의 대답은 그들의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명분이 되었습니다.

 

명분을 얻고나자 사람들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밷고, 어떤 사람은 주먹으로 얼굴을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렸습니다. 마구잡이로 예수님을 때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네가 그리스도라며,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해봐라. 방금 너를 때린 사람이 누구인지 맞춰보아라. 그들은 거리낌 없이 예수님을 모욕하고 짓밟고 능멸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의 감추고 사는 우리의 진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 장로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했기 때문에 죽이려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예수님의 죄목을 찾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진짜 이유는 예수님이 자신들의 이익과 안정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성직과 성전을 중심으로 했던 당시 종교 체제, 율법과 절기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던 당시 종교 체제, 종교적인 권위와 권력을 바탕으로 세워져 있던 당시 종교 체제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조용히 체포해왔고, 여러 증언들을 통해 예수님을 죽일만한 명분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들의 이러한 행동을 정당화할만한 명분을 찾자, 이들은 이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예수님에게 침을 뱉고, 때리고, 모욕하고,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자신들의 분노와 폭력를 행사하는 걸림돌이 되었던 브레이크가 사라진 것입니다. 이들의 모습을 깊이 살펴보면 이들의 우상은 권력과 안정이었고, 하나님은 일을 위한 명분이었으며, 명분이 확보되자 권력과 안정을 위협하는 이들을 짓밟고 죽이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던 것입니다.

 

얼마전 유행했던 드라마 디피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끊임없이 다른 병사를 괴롭히던 악역 병사가 나왔습니다. 고통당하던 병사가 자기에게 이렇게 했냐고 물으니, 악역 병사의 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렇게 해도 되는 알았다 것이었습니다. 군대의 질서가 명분이 되어주니, 자신의 재미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버는 , 살아남는 것이 드라마 주인공들에겐 가장 명분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렇게 되니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도,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도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원주민 기숙학교 복음을 전하고, 문명화를 시킨다는 명분, 정부와 교회, 카톨릭, 4100명이상)

 

오늘 말씀에 등장한 대제사장, 서기관, 장도들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키는 일이 명분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그저 시골 출신에 배운 것도, 가진것도 없는 선동가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때리고 모욕하고 죽이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러한 일이 하나님을 때리고, 모욕하고, 죽이는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말씀은 우리가 앞에 있는 누군가에게 어떠한 명분으로 그러한 일을 하든, 일이 하나님을 때리고, 모욕하고, 죽이는 일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나아가 그러한 일을 방관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죄를 저지르는 일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으로부터 우리는 누구도 자유로울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요, 하나님 앞에서 우상숭배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우리의 진실된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를 위해 오늘 말씀에서 우리 예수님이 모든 폭력을 받아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러한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고, 다시 사랑을 베풀어 주시며, 새로운 삶의 길을 선포하여 주셨습니다.

 

오징어 게임을 보면 그들을 폭력으로 이끌었던 가장 근본적인 원동력은 바로 생존에 대한 두려움과 돈에 대한 욕망이었습니다. 우리의 죄악의 근원에도 이와 같이 생존을 향한 갈망과 이를 위한 욕망이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실 아니라, 우리의 생명과 삶을 책임져주시고, 나아가 무엇으로도 채울 없는 우리의 욕망을 덮어줄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가 진실로 주님의 사랑과 용서와 은혜와 책임지심을 깨닫게 우리는 비로소 사랑을 나누는 , 주님 닮아가는 삶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되돌아봅시다. 나는 진실로 무엇을 위해 사는가,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삶을 적시고 있는가? 오늘도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계심을 기억하고, 다시 주님을 붙들고 나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