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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ir is foul and foul is fair (2021.10.10. 주일예배 설교. 마태복음 26:69~75)

 

마태복음 26

69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도당이라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울더라

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정말 엊그제 해가 시작된 같은 하루하루, 한주한주가 빠르게 지나가더니 벌써 해를 마무리해야 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해를 되돌아보면 좋았던 날들도 있을 테도, 힘돌고 어려웠던 순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모든 순간이 우리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시간들이었고, 또한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시는 시간들이었음을 깨닫게 것입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우리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는 우리 모든 성도님 되시길 축복합니다. 더불어 우리 주님과 더불어 남은 해도 충만한 은혜와 복으로 가득채워지는 날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특별히 영어로 준비하였습니다. 페어 이즈 파울 파울 이즈 페어. 말은 유명한 작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라는 작품에 있는 말입니다. 한국말로 번역해 보자면, 아름다운 것이 추하고, 추한 것이 아름답다입니다. 겉으로 보이기에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실상은 추한 것이 있어도, 겉으로는 추해보이고 못나보이는 것이 실상과 내면은 아름다운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이 추하고, 추한 것이 아름답다. 우리 성도님들께서는 말을 삶속에서 깊이 느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저는 말을 들었을 , 말이 우리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사야 53 1, 2 말씀을 살펴보면 우리 예수님을 묘사하며 예언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우리 예수님은 어린 같고, 마른 땅에서 삐져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그럴싸한 풍채도 없고,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참으로 볼품없는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 예수님의 사역의 끝은 십자가 처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의 상징이었던 십자가, 모욕과 멸망의 상징이었던 십자가, 당시 사람들이 가장 실패한 인생이 달리는 곳이라고 여겨졌던 십자가에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매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장 추한 모습, 그곳이 바로 십자가에 달린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십자가의 모습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볼품없는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삶을 살다가, 비참한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는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우리 주님의 깊은 사랑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주님의 용서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모두를 위한 주님의 헌신과 순종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가장 추한 자리에서 우리 예수님은 가장 놀라운 영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영광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는 밝음, 빛남 이런 느낌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영광이라는 단어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보드는 무겁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영광이 임한다는 것은 무거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선포되는 놀라운 사랑과 용서와 은혜가 얼마나 큰지, 사랑에 압도당하는 상태가 바로 주님의 영광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통해 사랑과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바로 추함 속에 진정한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아름다운 것이 추하고, 추한 것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곰곰히 곱씹어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살펴볼 있습니다. 우리는 그럴싸한 모습으로 우리 자신을 포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 안으로 굽어 있습니다. 가장 먼저 나를 생각하는 교만과 자기 사랑이 있습니다. 것을 움켜쥐려는 욕심과 질투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놓칠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고자 하는 속임수와 거짓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속내를 감추려는 위선과 비겁함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는 헤아릴 없는 복잡한 감정과 죄악들이 함께 있는 것이 우리의 정직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감추는 능력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교육을 받을수록, 사회 생활을 할수록 이러한 능력들은 더욱 발전합니다. 심지어 우리는 신앙생활 마저도 우리 자신을 포장하는 데에 사용하곤 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팔리라는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가룟유다가 나는 아니지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또한 예수님을 팔아넘기기 위해 입맞춤을 표시로 삼은 것처럼 나를 포장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포장된 모습이 진짜라고 생각해서, 깊은 죄악된 모습을 깨닫지도 못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우리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의 진짜 모습을 가르쳐주십니다. 말씀은 깊은 동굴과 같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비추어주는 입니다. 나도 몰랐던 나의 모습, 나의 실제의 모습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 깨닫습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한번 살펴보겠습니다.

 

69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도당이라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울더라

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가룟유다의 배신으로 예수님께서는 칼과 몽치로 무장한 사람들에게 사로잡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왔습니다. 그곳에서 우리 예수님은 신문을 받았고, 결국 신성모독이라는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얼굴을 치고, 뺨을 때리고, 크게 조롱하고 모욕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을 따라왔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용감한 제자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 앞에서 장담하였습니다. 제가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때에 칼을 빼어서 대제사장의 마고의 귀를 잘라버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집에 끌려오자 직접 곳까지 따라와 상황을 관찰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진실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믿었고, 언제든지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줄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나타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아서 동태를 살피고 있는데, 대제사장의 여종이 가까이 와서 보더니 사람들 앞에서 말하였습니다.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이 아니냐?  베드로가 깜짝 놀라 모든 사람들에게 부인하며 말하였습니다. 나는 당신이 지금 무슨말 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자리를 떠서 앞문까지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여종이 나타나서 베드로를 보더니 사람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던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다시 깜짝 놀라 이번에는 맹세까지 하면서 사람들에게 부인하였습니다. 나는 사람을 알지 못합니다. 가까스로 상황을 모면했나 싶었는데, 조금후에 다시 곁에 있던 사람들이 다가와서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틀림없이 예수 무리와 한패요. 당신이 지금 갈릴리 사투리를 쓰고 있지 않소. 끝까지 몰린 베드로는 이제 저주까지 하며 맹새하며 말하였습니다. 나는 사람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때에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순간 자신의 진짜 모습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밑바닥을 보게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호언장담하던 때에 우리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자기에 대해 가장 알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의지는 확고했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분명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반할 없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위협이 다가오자,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수님을 부인하고 나아가 저주까지 하고 맹새까지 하였습니다. 포장지로 덮여진 자신의 모습, 뚜껑으로 막았던 자신의 실제 모습이 순간 드러나게 되었고, 자기의 내면의 진실을 보게 베드로는 견딜 없게 것입니다. 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그저 조금 나은 사람이 되는 길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수많은 도덕과 윤리처럼, 우리에게 조금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선포하는 것은 자신을 알라 것입니다. 네가 그토록 오랜 시간 덮어왔던 모습의 진실, 네가 스스로 부정하는 모습을 정확하게 직면하라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진짜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럽기에 우리는 모습을 그럴싸한 교양의 포장지, 문화의 포장지, 심지어 종교의 포장지로 덮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있냐고 물었던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없다고 선포합니다. 이전의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자기 자신을 직면하여 보는 것입니다. 내가 죽을 밖에 없는 죄인이구나를 깊이 깨닫는 , 이것이 바로 죽음과 같은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이러한 자기 직면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기 직면은 어디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자기 직면을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절망하고 통곡하는 때에, 베드로가 깨달은 것은 바로 우리 주님의 십자가 죽음이 자기 자신 때문이라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나도 나의 생존 때문에, 나도 나의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부인하였구나, 예수님을 저주하였구나. 내가 대제사장, 서기관들, 장로들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나도 본질적으로 그들과 같은 사람이 아닌가. 더군다나 나는 주님께 3년동안이나 사랑을 받은 제자 아닌가, 나는 주님께 사랑한다 고백하고, 주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 고백하지 않았던가. 나는 주님께 죽을 지언정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고백한 사람 아닌가, 그런데 나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장로들과 같은 자리에 서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떠나갔다. 그렇다면 내가 죄인이 아닌가.  베드로는 이를 깊이 절감하며 자신의 모습 때문에 통곡하였습니다.

 

통곡과 절망이 바로 십자가 앞에서의 자기 직면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를 날마다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우리 주님이 나를 위해 죽어 주셨다는데,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무엇보다 우리는 성령님께 기도하며, 주님 우리 주님의 십자가가 나에게 어떠한 의미가 되고, 어떠한 현실이 되는지를 진실로 깨닫게 해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나를 위한 십자가라는 사실이 진실로 받아들여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정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의 용서의 의미를 깨닫을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의 의미도 깨달을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무엇인지를 있습니다. 진실로 나는 죄인인데, 주님이 나를 용서하여주시고 구원하여 주셨구나. 현실을 깊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 제목을 다시한번 살펴보며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아름다움 속에 추함이 있고, 추함 속에 아름다움이 있다. 아름다움 속에 추함이 있다는 말을 성경적으로 표현한 비유가 있습니다. 회칠한 무덤입니다. 속에는 시체와 죽음이 가득한 겉은 회를 칠해서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는 것이 바로 회칠한 무덤입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이와 같은 비유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들은 내면에는 욕망과 교만이 가득한데 이것을 살피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겉에 보이는 모습만을 신경쓰며 사람들에게 훌륭한 종교인으로 보이는 데에 집중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자기 자신을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름다움이 추함이라는 단어가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보면, 그는 추함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베드로의 부인 이야기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 모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모두 나오는 이야기가 많지 않습니다. 그만큼 이야기는 중요한 이야기였고,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는 곳마다 전해진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베드로가 훗날 어디에서든지 이것을 고백하고 다녔다는 것을 뜻합니다. 베드로는 모든 그리스도 교회의 어른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 추한 모습을 감추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죄악된 모습, 부끄러운 모습을 정직하게 직면하게 순간이 오히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한 순간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갑시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직면할 있게 해달라 간구합시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선포된 사랑과 용서와 은혜와 영광을 진실로 깨닫게 해달라 간구합시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세계,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