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님의 침묵 (2021.10.23. 주일예배 설교. 마태복음 27:11~26)

 

마태복음 27

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15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앎이더라

19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1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이르되 십자가에 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박히게 넘겨 주니라

 

마태복음 말씀은 우리 예수님께서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세개의 동사로 설명하였습니다.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치셨다. 말씀을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파하시고, 연약한 이들을 고치신 , 그것이 바로 예수님 사역의 핵심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러한 사역을 통해 이루고자 하신 목적은 우리 예수님께서 처음 사역을 시작하실때에 하셨던 말씀, 우리로 하여금 회개케 하고,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게 하고자 하신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시고, 천국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소망을 갖게 하시며, 치유를 통해 하나님의 생명으로 우리의 육체와 삶이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시고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성령님 안에서 지금 이곳에서 우리를 위해 동일하게 일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2000년전의 말씀이 오늘 우리를 위한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되도록 우리를 감동케 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성령님의 믿게하심으로 주님의 복음이 우리를 위한 복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셔서 우리에게 용서와 자유의 기쁨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우리와 함께하셔서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아픔을 치유하시고, 우리를 사로잡는 모든 헛된 우상들을 무너뜨리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2000년전에 오셔서 하신 모든 일들을 지금 이곳에서, 우리의 가운데에서도 동일하게 하고 계심을 믿는 , 그것이 바로 믿음이요, 신앙의 삶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운데 오셨을 때에,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과 전도와 치유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비판하고, 미워하고, 나아가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기존의 자신들의 가르침을 훼방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치유가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선동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그들의 종교적인 권위와 명예를 흔들고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한 종교 시스템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서기관들, 종교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고작 시골 출신의 선동가에 불과했던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심한 후에, 이들의 실행은 매우 빨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를 포섭하여 예수님의 위치를 파악하였습니다. 곧장 군사들을 보내어 예수님을 체포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대제사장의 공관으로 끌고와 재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을 그리스도라 선포하는 예수님에게 신성 모독의 혐의를 씌워 사형 선고를 내렸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 형으로 처분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만이 있는 일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보내었고, 빌라도는 마침내 예수님을 만나 재판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 11~14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예수님께서 빌라도 총독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을 심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께서는 질문에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런데 대답이 사실상 예수님의 마지막 대답이었습니다. 옆에 있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십자가 형에 처해질 있도록 수많은 죄목들을 나열하며 예수님을 고발하였지만, 예수님은 아무런 변론도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빌라도는 이러한 예수님의 태도가 의아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너에게 불리한 고발들을 하고 있는데, 고발들이 들리지 않는가? 그런데도 우리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침묵하셨을까요? 침묵은 순간의 대처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침묵은 이제껏 우리 예수님께서 해오셨던 놀라운 사역을 완성하기 위한 침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침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침묵으로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침묵으로 치유하고 살리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침묵으로 우리를 회개케 하시고, 침묵으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침묵의 의미를 생각하면 할수록, 침묵의 의미가 참으로 깊다는 것을 있습니다. 가장 크게 들리는 가르침은 침묵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삶으로 가르치는 가르침, 본으로 보이는 가르침, 존재로 가르치는 가르침이 우리에게 가장 깊이 새겨지는 가르침입니다. 가장 능력 있는 전도는 전도하지 않는 전도입니다. 깊이 사랑하는 , 용서하고 품어주는 ,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내어주는 , 그것을 통해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는 , 그것이 가장 위대한 전도 방법입니다. 가장 위대한 기적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기적입니다.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오히려 감사하는 , 심지어 순교의 순간까지도 기뻐하는 , 그것이 가장 놀라운 기적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드러내시기 위해 침묵을 선택하셨고, 침묵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침묵이 무엇을 뜻하는 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일이 다음 말씀에 나타납니다. 조금 말씀이지만, 다시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교독)

15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앎이더라

19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1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이르되 십자가에 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박히게 넘겨 주니라

 

당시는 유월절 명절 기간이었습니다. 한국에서도 광복절, 성탄절 같을 때에 특사가 있어서 죄수들중에 모범수들을 풀어주곤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당시 유대에서도 명절이 되면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죄수 사람을 풀어주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해 결과 그가 십자가형을 당할만큼의 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십자가 형은 로마 제국에 반역을 일으켰거나, 노예가 주인을 죽이거나, 또는 강도떼들에게나 주는 형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일을 한적이 없었고, 유대인의 왕이라는 호칭도 정치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유월절 특사를 이용해 자연스럽게 예수를 풀어주고자 하였습니다. 특히 그의 아내가 꿈을 통해 예수님을 처형하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느꼈고, 그것을 빌라도에게 말했기 때문에 더더욱 예수님을 풀어주고자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군중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를 풀어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냐, 예수냐? 그런데 군중들은 이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 의해 포섭된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바라바를 풀어주기를 원했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자고 외쳤습니다. 빌라도는 이러한 군중들의 목소리에 경악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이러한 결정을 하느냐? 그가 무슨 악한일을 하였느냐? 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더욱 크게 소리를 지르며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빌라도는 이상 말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민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기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기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는 물을 가져오라 명령하여 무리 앞에서 자기의 손을 씻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들이 알아서 하라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외쳤습니다.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십시오.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지겠습니다. 이에 빌라도는 바라바를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여 십자가 처형에 넘겨 주었습니다.

 

두번째 장면은 상상하기만 해도 매우 시끄러운 장면으로 떠올려집니다. 우리 예수님의 침묵과 명백하게 나뉘는 장면입니다. 두번째 말씀에는 군중들이 나오고 빌라도가 나옵니다.

 

군중들은 무섭게 소리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시요. 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어떠한 의미가 되는지도 모른채 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이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속아서, 또는 이들에게 약속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또는 사람들의 군중심리에 휩쓸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라 소리친 것입니다. 나아가 무서운 죄에 대한 대가를 자기와 자기 자손들에게 돌리라 외치기까지 하였습니다.

 

또한 빌라도는 이러한 군중의 목소리를 두려워합니다.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역사 사료에 따르면 빌라도는 야심만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높은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자신이 총독으로 부임한 예루살렘을 어떻게 해서든지 안정적으로 이끌어야 했습니다. 그는 침묵하고 있던 예수님의 의로움에 귀를 기울이기보단, 소리를 지르고 있던 군중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예수님 십자가 처형에 최종 결정권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후 2000년동안, 앞으로도 예수님이 오실때까지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속에서 십자가 처형의 주범으로 불리는 치욕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때에도 침묵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이때에 조금이라도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셨다면 쉽게 풀려나올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침묵하자 순간 의로운 주님 대신에 죄인이었던 바라바가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바라바는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 처형 앞에서 있었던 사건은 죄인된 모든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주님의 침묵, 주님의 십자가로 풀려나게 것을 암시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앞서 말씀에서 나누었듯, 우리 예수님께서는 2000 유대 지역에서 행하셨던 모든 사역과 일하심을 오늘 이곳에서 성령님을 통해 동일하게 행하시고 계십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며, 치유를 통해 우리를 회복시키십니다. 나아가 우리 주님은 침묵으로 보여주신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지금 순간에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라 외치던 군중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욕심, 자랑, , 자신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죄를 짓기도 합니다. 심지어 주님을 십자가의 길로 밀어 넣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때때로 군중들의 소리에게 겁을 먹고 비겁한 선택을 했던 빌라도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것을 지키기 위해,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세상의 목소리와 평가에 휘둘리며 예수님을 십자가의 길로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이 승리한 길이요, 무엇이 진리의 길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 침묵으로 순종한 , 침묵으로 사랑한 ,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 주님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침묵의 길을 가셨습니다. 침묵의 길이 승리의 길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와 같이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갑시다. 야고보 사도의 가르침처럼 말과 혀로 사랑하는 삶을 넘어서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에 묵묵히 순종하며, 주님 따르는 삶으로 주님을 찬양합시다. 날마다 은혜의 자리, 사랑의 자리로 나아가 우리의 삶을 주님의 향기 품는 삶으로 만들어 갑시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때로는 지독한 외로움과 고독의 자리라 지라도 우리 주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나아갑시다. 우리가 이러한 길을 따라갈 우리 주님 때문에 바라바가 구원을 얻고, 나아가 인류가 구원을 얻었던 것처럼,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과 일하심이 드러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