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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위해 묵묵히 잡히신 예수님 (2021.09.19. 주일 예배 설교. 마태복음 26:47~56)

 

마태복음 26

47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49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51   예수와 함께 있던 중의 하나가 손을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55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56   그러나 이렇게 것은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오늘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체포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가르치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고치시고 살려내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께 순종한 참으로 아름답고 귀한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이러한 삶의 끝에 맞이한 것은 사람들에 의해 체포되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보다 의롭고 선한 사람이 악한 세상 속에서 맞이하게 되는 비극적인 운명을 주님께서 직접 걸어가신 것입니다.

 

주님의 체포는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에 일어났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죽음을 앞에두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고난을 앞에두고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있거든 잔을 내게서 옮겨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고, 그러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주님의 번민과 순종을 그대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시간을 보낸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순간 제자들은 곁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기도를 올려드리고 나자, 놀랍게도 주님을 잡으러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고난의 때가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잡으러 사람들을 데리고 앞장서서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였습니다. 지난 3여년간 함께 지냈던 주님의 제자, 우리 주님께서 마음에 품고 사랑하며 가르쳤던 제자 가룟 유다가 주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가룟 유다는 주님을 잡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위치를 알려주기 위해 이들을 데리고 주님께로 다가온 것이었습니다.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님을 파송하기 위해 무리를 보냈는데 이들의 손에는 칼과 몽치가 들려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출발하기 전에 그들과 미리 암호를 만들었습니다. 내가 예수가 있는 곳으로 당신들을 데리러 것이요. 그곳에 가면 예수와 그를 따르는 이들이 함께 있을 것이요. 내가 그들 중에 누가 예수인지를 알려주겠소. 내가 가서 예수에게 평소 그와 인사했던 것처럼 그에게 입맞춤을 하며 인사를 것이니 여러분은 사람을 확인하는 즉시 체포하시오. 가룟유다는 평소 주님과 나누었던 인사로 예수님을 배신하였습니다.

 

가룟유다는 사람들과 약속했던 데로 예수님께 나가와 인사하며 입을 맞추었습니다. 성경에 우리말로는 안녕하시옵니까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원래 인사는 샬롬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샬롬 샬롬 인사를 합니다. 샬롬은 평화라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께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라고 인사를 하면서, 사랑의 친밀한 교제인 입맞춤을 하며 인사를 하면서 인사로 예수님을 죽음의 자리로 몰아 넣었습니다.

 

그때 우리 예수님의 반응이 너무 놀랍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가룟유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친구여 네가 하려고 하는 일을 이제 행하라.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하는 행동의 의도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모든 상황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 예비하신 , 뜻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기꺼이 일에 순종하기로 하셨기에

모든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사람들은 가룟유다의 신호를 듣고 다가와 예수님을 체포하였습니다.

 

때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제자 중에 사람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칼을 빼들었습니다. 제자는 다름아닌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는 재빨리 칼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잘라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상황을 참을 없었고,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보호하려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더욱 놀라웠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상황이 조금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종의 이름은 말고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상황 속에서도 종의 귀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하느니라. 주님께서 걸어가실 길은 평화와 용서와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는 칼로 만들 없음을 분명히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은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이와 같이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지금이라도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면 하늘에서 열두 군단도 넘는 호위 천사들을 내려 보내주실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한다면,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고 한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주님은 이러한 일을 감당하는 것이 자신에게 능력이 없어서,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성경의 예언, 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자신을 잡으러 온 무리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늘 가르치지 위해 성전에 있었다. 그때에는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서 나에게 손도 대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제는 칼과 몽치를 들고 나를 잡으러 왔으니, 내가 강도라도 된단말이냐? 이러한 이들이 벌어진 것은 예언자들이 말씀을 통해 선포한 것을 이루기 위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고 체포당하실 때에,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구약의 이사야 534절부터 7절까지는 이러한 메시아의 모습을 예언한 말씀이 있습니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깎는 앞에서 잠잠한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우리 주님이 고난을 받게 것은 우리의 질고와 슬픔을 감당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용서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셨고,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을 깍는 앞에서 잠잠히 있는 어린양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묵묵히 일을 감당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보여주신 주님의 모습이 이미 이사야에서 예언되었고, 우리 주님은 예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감당하기 위해 묵묵히 체포당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도, 가룟유다가 가장 비열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배반한 것도, 제자들이 모두 도망쳐 버린 것도, 그리고 묵묵히 주님이 잡히신 것도 모두 하나님의 뜻안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던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 예수님께서 묵묵히 체포되신 것은 궁극적으로는 우리 사람, 사람을 위한 주님의 용서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악의 모습이 예수님의 체포의 장면 속에 있음을 있습니다.

 

칼과 뭉치를 들고 사람들의 모습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폭력성을 발견합니다. 인류의 역사, 그리고 사람 사람의 삶은 폭력의 역사, 폭력의 삶입니다. 이웃을 향한 폭력, 자신을 향한 폭력, 자연을 향한 폭력,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폭력의 역사였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있습니다. 내가 언제 폭력을 행사했단 말입니까? 저는 누구를 때려본 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한 1 3 15 말씀은 우리가 누구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하는 것이라 선포합니다. 우리 주님은 마태복음 5 말씀에서 이웃에게 분노하고, 모욕하고, 조롱하는 것이 살인과 같다고 선포합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는 칼과 몽치를 들고 이웃을 대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말씀은 인간의 폭력의 역사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은 , 처음으로 저지른 죄는 서로를 향한 비난과 정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여자 때문에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때문에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비난하였습니다. 그리고 세대가 지나자 가인은 아벨을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차게 되었음을 말씀은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홍수 심판은 폭력을 향한 심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폭력으로 결국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게 칼과 몽치를 들이댄 것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결국 우리가 우리의 이웃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마다, 때로는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마다, 그리고 조금 넓게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마다, 폭력이 궁극적으로 우리 예수님을 향한 폭력이 됨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폭력을 묵묵히 받아주는 시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가룟 유다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비열함과 속임수를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창조의 지혜를 주셨습니다. 창조의 능력으로 사랑을 창조하고, 평화를 창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창조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창조의 능력으로 거짓을 만들어 냅니다. 이웃을 속이고, 나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입니다. 속으로는 나의 욕망과 나의 자랑, 나의 이기심을 사랑하면서, 겉으로는 그럴 싸한 사람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정직한 모습입니다.

 

가룟 유다의 모습은 우리의 이러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는 자기 유익을 위해, 자기 뜻을 위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길이 자기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나자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길을 되돌아보는 대신, 예수님을 비난하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러한 이중성을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기름부은 여인을 비난한 사건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비싼 향유를 붓자 가룟 유다는 그녀에게 돈을 낭비하느냐고 비난하였습니다.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낫다고 질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속셈은 자기가 돈을 차지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돈을 자기가 원하는 일에 쓰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그는 가난한 사람 핑계를 대며 마리아를 비난한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 일관된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우선이었고, 모든 것들은 이용대상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명분을 이용하고, 예수님을 이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그는 모든 것을 버려버렸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가룟 유다의 이중성과 속임수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죽이는 길로 보내며 샬롬이라 인사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팔아 넘기면서 그에게 입맞춤을 합니다. 가장 사랑하고 친밀한 이에게 하는 , 이제껏 예수님과 나누었던 교제의 나눔을 통해 예수님을 십자가의 비극에 넘겨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가장 비극을 가장 아름다운 포장지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모든 속임수를 알면서도 기꺼이 모든 속임수를 받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네가 하려고 하는 일을 하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속이는 우리의 모습을 받아주시고, 용서해주시고, 치유해주시기로 결단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진실된 사랑, 변치 않는 사랑, 신실한 사랑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만용과 동시에 비겁함을 발견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고 뒤에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죄악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나타나는 죄악 하나가 만용과 비겁함입니다.

 

만용은 교만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 , 자기 자신이 무엇이든 있다고 생각하는 상태가 바로 만용입니다. 말씀은 주님의 고난의 순간에 제자들이 보여주었던 만용을 정직하게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얼마나 자신의 믿음이 연약한지, 얼마나 그들의 의지가 아무런 힘이 없는지를 몰랐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부인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을 , 너도 나도 자신있게 항변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이들은 자신의 믿음을 과신했고, 자신의 결단을 과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그들의 호언장담이 어떻게 끝났는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 56절 말씀은 선포합니다. 이에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결국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만용을 부렸으나 비겁한 모습으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우리는 모두 우리의 눈이 밝아졌다고 착각합니다. 그리하여 교만함 속에 우리 자신을 판단하고, 우리의 이웃을 판단합니다. 우리의 이웃에 대한 판단은 정죄와 비난으로 빠진다면, 우리 자신에 대한 판단은 만용으로 빠집니다. 그리고 만용 속에서 실패할 , 우리는 다시 비겁함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그러면서도 마치 여우가 높이 달린 포도를 보며 나는 포도를 먹을 있어 호언장담하다가, 결국 포도를 못먹게 되자 포도는 신포도일거야 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정당화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누구보다 아시는 분은 우리 예수님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제자들이 호언장담할때도 모두 결국은 도망갈 것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목숨을 걸고 자신을 지켜주기는커녕 같이 기도해주지도 못한 것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끝까지 품기로 결단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제자들을 위해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연약한 우리를 위해 당신께서 품어주기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 우리의 죄악 때문에 묵묵히, 그러나 홀로 걸어가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권세와 능력을 포기하셨습니다. 폭력을 그대로 받으시고, 속임수를 그대로 속아 주셨으며, 비겁함을 그대로 품어주셨습니다. 모든 것은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우리를 온전히 세우시기 위한 주님의 사랑과 은혜였습니다.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선포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모든 것의 열쇠는 우리 주님입니다. 분의 사랑 앞에 있을 우리도 폭력을 내려놓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그분의 신실함 앞에 있을 우리도 속임수를 내려놓고 신실한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분의 용납앞에 있을 우리도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겸손한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오직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사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날마다 날마다 은혜로 나아가는 우리가 됩시다. 우리가 그렇게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사랑할 ,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모습으로 빚어가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