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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2021.08.29. 주일예배 설교. 마태복음 26:1~13)

 

마태복음 26

1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3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4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5   말하기를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6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있었겠도다 하거늘

10   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   여자가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보는 영화나 드라마, 소설을 보면 종종 나오는 스토리가 있습니다. 바로 아주 어려운 역경이나 고난, 어려움을 맞이한 상황 속에서 주인공들이 서로 사랑하고, 사랑으로 어려움을 이겨내는 내용입니다. 때때로 이야기가 비극으로 끝난다고 지라도 안에서 사랑을 끝까지 지켜나가는 내용을 보면 우리는 감동을 받습니다. 제가 예전에 한국에 있을 ,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를 적이 있습니다. 영화는 6.25전쟁을 배경으로 다루었는데, 치열한 상황 속에서 끝까지 서로를 생각하고 사랑하는 형제의 우애가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처럼 고난과 비극 속에서도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오히려 모든 것을 이겨낼 있도록 하는 힘이 사랑입니다.

 

오늘 말씀부터 마태복음 말씀은 우리 예수님의 고난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의 사역을 마치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 성전을 새롭게 하시고, 예루살렘의 장로들, 서기관들, 대제사장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종말을 선포하시며 신앙을 끝까지 지키고자 하는 이들에게 소망을 선포하셨습니다. 모든 말씀을 마치고 나자, 반대편 진영의 사람들이 이제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이상 살려둘 없는 위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고난의 , 죽음의 길로 걸어갈 것을 이미 결심하셨습니다. 오늘 말씀 1절과 2 말씀입니다.

 

1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모든 말씀을 마치시고 이제 제자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분명히 선포하였습니다. 이제 이틀이 지나고 나면 유월절이라. 유월절에 내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하여 이제 팔리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옳은 길을 끝까지 가기위해서,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땅에 드러내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이 이제 문턱까지 다가왔습니다.

 

말씀은 계속해서 음모가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3~5절까지의 말씀입니다.

 

3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4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5   말하기를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말씀에 따르면, 시기엔 이미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마음을 굳혔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모욕하고, 하나님을 모독하고, 무엇보다 자신들의 권위를 흔들어 기존 질서를 깨는 위험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굳혔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에겐 그저 언제 예수님을 죽일까, 어떻게 예수님을 죽일까 하는 방법과 시기의 문제만이 남았습니다. 이들은 이를 의논하기 위해 당시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예수님을 잡아 죽일까 의논하였습니다. 이들에겐 자신의 권위와 권력을 지켜줄 사람들의 지지도 중요했고,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것도 중요했기에 이러한 것들을 고려하며 예수님을 죽일 날짜를 선정하려고 하였습니다. 점점 예수님의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두운 시기,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오는 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사건 하나가 일어난 것입니다.

 

6절과 7 말씀입니다.

 

6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초입에 있는 베다니라는 마을에 있던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그때에 여인이 매우 귀한 향유 옥합을 가지고 나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말씀에 따르면 여인은 마리아였습니다. 그녀는 이를 통해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지극한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였습니다. 말씀에 보면 누구도 예수님을 이렇게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누구도 예수님께 이렇게 감사를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죽는다는 말씀을 하셔도 주변의 제자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오직 여인만이 예수님을 이렇게 지극히 사랑하고 섬긴 것입니다.

 

그런데, 사건이 일어나자 옆에 있던 제자들의 반응이 매우 놀랍습니다.  

 

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있었겠도다 하거늘

 

제자들은 놀랍게도 사건을 보고 분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여자를 비난하였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여자에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네가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있었겠도다.

 

사실 말속에 제자들의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이 가득한지를 우리는 그대로 엿볼 수가 있습니다.

 

첫번째 이들이 썼던 의도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제자들의 생각을 있습니다. 제자들은 여인에게 네가 무슨 의도로 일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여인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일을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앞선 제자들의 행태를 본다면, 이들은 여인이 아마도 예수님께서 높은 자리에 오르셨을 가장 앞선 자리를 얻고자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예수님께 가장 잘보이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을 있습니다. 이들은 여인이 예수님께 일종의 아부, 일종의 뇌물을 드리는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뒤집어 말하면 이미 제자들이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을 만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욕심이 상대를 향한 비판으로 바뀌어서 나타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누군가가 지극한 사랑과 감사를 전한다면, 우리의 1차적인 반응은 사람에게 감사와 사랑을 전하는 것이어야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지 않았고, 여전히 자신의 욕심과 야망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여인의 행동은 감추어져 있던 욕심과 야망을 자극하였고, 그들의 질투를 자극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여인을 이처럼 비판한 것입니다.

 

둘째로 제자들은 일을 허비하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사랑은 근본적으로 허비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기브엔 테이크가 아니라, 조건 없는 기브입니다. 제가 아이를 키우면서 느꼈던 것이 있습니다. 어린이날이나, 생일 이럴때에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사줄 , 이거 어차피 사줘봐야 며칠 갖고 놀다 마는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경제적 관점에서 합리적으로 따져본다면 이것은 완벽한 낭비이자 허비입니다. 그런데, 장난감을 가지고 아이가 이렇게 놀겠지, 이것을 모아뒀다가 이렇게 팔면 정도의 비용이 들고 정도의 가치가 창출되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사주는 아닙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장난감 사주는 순간에 아이가 보이는 행복한 표정, 좋아하는 것이 너무 좋아서 그냥 사주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는 꽃다발입니다. 이거 먹을 있는 것도 아닌데, 어차리 뿌리잘린 죽은 식물인데, 이런 생각하면 꽃을 주는 것만큼 허비, 낭비가 없습니다. 그러나 순간에 우리가 함께 느끼는 행복, 주는 기쁨, 사랑을 표현하는 마음을 생각하면, 그것은 돈으로 헤아릴 없는 기쁨과 감동이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모든 구원의 역사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허비에 가까운 일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죄를 짓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을 , 하나님께서 가장 쉽게 있는 일은 그냥 없애고, 하나님 듣는 새로운 존재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구지 말을 안들을 수도 있는 자유로운 의지를 가진 존재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이 타락하자 계속해서 인류 역사에 개입하시고, 말씀하시고, 심지어 자신이 사람이 되셔서 내려오시기 까지 하셨습니다. 거기에서 멈추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죽음을 통해 모든 이들이 구원을 얻도록 지금도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저 사랑을 위해, 수많은 수고를 감당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개개인의 삶을 봐도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알려주시고자 지금도 얼마나 수고하고 계시는 지를 아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은 한시도 우리와 떨어지지 않으시며,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사랑하시고, 이끄시고 계십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우리는 효율이 매우 떨어지는 존재입니다. 엄청난 사랑을 줘도 조금 사랑을 깨달을 말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허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허비가 사랑을 본질입니다.

 

제자들이 일을 허비하는 일이라 생각했다면, 그들은 아직도 사랑의 본질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로 제자들은 자신들의 분노의 이유를 그럴싸한 명문에 두었습니다.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에게 있었겠도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의도를 가지고 만났습니다. 제자들은 여인에게 질투했고, 제자들은 자신들의 자리가 빼앗기는 같아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분노했습니다. 그런데, 분노의 이유를 정직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없다 명분을 들며 자신의 분노를 합리화 하였습니다.

 

이는 선한 명분이 얼마나 쉽게 우리의 죄악을 은폐하는 도구로 쓰이는 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저와 같은 목회자들이 조심해야 하는 함정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서, 목회를 위해서, 정의를 위해서 무언가를 한다는 명분으로 자기 이름을 높이고, 자기 의를 드러내며, 자기 우상을 숭배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조심해야 하는 함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다는 명분으로, 옳은 일을 드러낸다는 명분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판단하며, 사실은 자기 의를 높이고 자기 만족을 주구하는 함정에 빠질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도 아름다운 명분으로 포장된 수많은 죄악과 폭력이 존재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얼마전 이곳 캐나다에서 수많은 원주민 어린이들이 땅에 묻혀있었던 것이 발견되어 슬픔을 안겨준 일이 있습니다. 슬프게도 일은 캐나다 정부와 교회가 앞장서서 저지른 일이었습니다. 명분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문명을 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든 이미 깊은 속내를 알고 있습니다.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고 차지하는 있어 방해가 있는 문화를 바꾸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명분은 이처럼 때때로 우리의 죄악의 욕망을 은폐하고, 나아가 우리가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게 하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바로 이러한 함정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성전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지키기 위해, 신앙을 지키기 위해 그들이 선택한 것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를 위해 없는 사람을 죽이는 일에 아무런 가책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옳은 일이요,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이 무섭게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제사장과 서기관들, 장로들의 사고 방식과 제자들의 사고방식이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 음모를 꾸미는 사람과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이 각자 서있는 자리에 따라 선택이 다르게 나타났을 ,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대답에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응답하셨습니다. 10절부터 13 말씀입니다.

 

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   여자가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여인을 괴롭히고 있느냐? 그녀는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주님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마리아의 사랑의 고백, 감사의 고백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보다 우리에게 귀하고 가치있는 일임을 주님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기꺼이 받아주시고, 일이 아름답고 좋은 일라는 것을 다시한번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선포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저는 말씀을 보면서 우리 예수님께서 사랑의 본질을 가르쳐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라고 선포할 , 이웃이 누구일까요? 저는 이웃이 지금 내가 살을 부대끼고 살아가는 앞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지긋지긋하게 하고, 나를 때때로 힘들게 하고, 그러면서 내가 함께 보내야 하는 사람, 가족, 아내, 남편, 아이들, 부모님, 직장 동료, 거래처 사람들, 손님들, 우리 옆집사람, 이런 사람들이 바로 이웃입니다. 이러한 부대끼며 같이 살아가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어딘가에 있을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라는 말은 사실 아무런 의미도 힘도 없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말은 제자들이 보여줬던 것처럼 우리의 의도를 감추고, 사랑하지 않고 있으면서 사랑하고, 우리의 욕망을 위해 이용당하는 도구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러한 진짜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앞에 있는 진짜 사람을 사랑하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눈앞에 있는 진짜 사람, 예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그에게 자신의 것을 허비하며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그를 섬겨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역에 가장 가치있는 하나가 것입니다. 세례 요한 세례를 베풀며 물로 예수님 사역의 시작을 알렸다면, 마리아가 기름으로 에수님의 사역의 마무리를 준비하게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여인의 행한 일이 기억되리라 선포하셨습니다. 앞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귀한 사역의 통로가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 다시한번 우리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사역의 핵심을 나누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의도 가진 사랑이 아니라 진심을 나누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효율적인 사랑이 아니라, 얻기 위해 주는 사랑이 아니라 허비하는 사랑, 기꺼이 것을 값없이 주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말로만 하는 사랑, 뜬구름 잡는 사랑이 아니라 앞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마리아는 그렇게 우리 주님을 사랑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앞에 있는 가장 작은 사람에게 베푸는 나눔이 예수님에게 베푸는 사랑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처럼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을 그렇게 사랑해야 것입니다.

 

그전에 한가지 우리가 기억해야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무엇가를 얻기 위해서 아니라 우리 존재 그자체로 우리를 있는모습그대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말그대로 허비하시듯이 우리를 지극히 매순간 사랑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한국교회, 기독교) 우리 사람, 사람을 직접적으로 관계 맺으시며 사랑하십니다. 사랑을 먼저 깨닫고, 사랑의 삶을 사는 우리 모든 성도 되시길 소망합니다.